절대정의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 사회탐구 과목 중에서 <사회문화>라는 과목이 있는데, 당시 배웠던 이론이 '기능주의적', '갈등주의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점점 사회의 부속품으로 감정을 배제한 채 살아야 하는 나 자신을 보며 이 '기능주의적'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새삼 느끼고 있다. 갈등 없이 기능적으로만 사회를 보면 참으로 순탄하고 매끄러워보이지만 결코 그 안에서 인간은 찾아 볼 수 없다. 그저 주어진 규범과 규칙 그리고 정의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아무런 의심없이 잘 지키며 사회의 부속품이 된다는 것이 아닌가! 아 물론, 내가 너무 오래전에 배운 이론이라 잘못 해석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갈등주의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좀 더 서구사회에서 통용되는 이론이며, 여기서 인간은 깨어난다. 그리고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정하게 된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직장인으로 사는 건 어떤것인가! 점점 기능주의적으로 빠지게 되며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상실한 채 밥그릇을 절대 놓지 않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 가족이 있으면 이는 가족 이기주의의 연장이 될 수 있고, 가족이 없어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닌지. 요즘 이런 때묻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나를 보노라면, 그저 씁쓸함과 환멸이 동시에 느껴진다고나 할까. 조금만 튀어도 아우성 치는 조직과 사회에서 과연 패기어렸던 나는 어디로 간 채, 아무 생각없이 아침에 힘겹게 눈을 뜨고, 씩씩대며 출근을 하고 지루한 시간을 모니터 앞에서 버티고 있는 건지. 그러면서도 '가늘고 길게'라는 모토를 내세우며 한달에 몇 백만원으로 내안의 나를 속인 채 위로금으로써 받는건지....

 

<절대정의>의 스토리는 심플하다. 어찌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아무런 감정은 느끼지 못한 채, 정의만을 추구하는 한 여자 이야기. 정의가 때로는 진리처럼 꼭 추구되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녀가 그런 주장을 내세우고 행동에 옮길 수록 주변의 사람들은 그녀를 증오하게 된다. 말인즉슨, 사람이라는 동물들이 사는 곳에는 꼭 정의만을 추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를 인간성으로 커버하는 것이 융통성인데, 이런 융통성은 때로는 정의에 위배될 때가 있다. 그리고 인간관계가 어렵다는 것은 이런 정의와 융통성 사이에서 판단을 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절대정의'는 없다라는 걸 아주 극단적인 스토리로 피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정의에 위반되는 것에 눈을 감은 채, 관계를 우선시하는 것이 인간적일 때가 있지만, 가끔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너무나도 피곤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의가 절대적인 것일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갖지 않아도 되는 대신, 모든 것이 자명하고 정답이 정해져 있을 때 더욱 편하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런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이 감정이 있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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