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간밤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못 잔 게 아니라 잠 잘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렸다. 희붐한 아침이 왔을 때야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만큼 몰입도는 최상이었다. 평생 불면의 밤과는 친구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만큼 잠과 친숙한 체질이지만, 더러 몰입의 밤과도 친구할 만큼 한 곳에 집중하면 시간이 어찌 가는지 잊어버리곤 한다. 시쳇말로 나는 ‘그분이 오시면’ 무작정 쓰게 되고, ‘필이 꽂히면’ 빨려들듯 읽게 되는 부류이다. 몸을 위해선 결코 좋은 생활 패턴이 아니다.

 

세상엔 잘 쓰는 작가들과 좋은 책들이 널렸다. 평생 읽고 쓰는 데만 온전히 시간을 바쳐도 그(것)들을 내면화하는 데는 시간이 모자란다. 한데 좋은 사람들 만나 수다 떠는 걸 즐기는데다, 짜인 일들까지 갈무리하면서 읽고 쓰는 나 같은 이는 늘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다. 게을러서 생긴 강박관념은 몸의 피로를 몰고 오고, 그것은 자연히 마음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나름 열심히 하는 건 분명한데 늘 허망한 이 느낌. 실체를 알 수 없는 이 핍진감의 원인은 고백하건대 단 하나다. 뭔가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제대로 하지 않는 진실이 그것이다. 충만감에 가닿지 못하는 모든 열정은 몸의 피로와 마음의 불안을 낳는다는 것을 알겠다.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은 현재를 넘어설 수 있고,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은 현재를 더욱 꼼꼼하게 채워간다. 미래란 현재의 동력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미래란 현재에서 이어지는 시간이지만, 반드시 현재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현재에서 준비한 것들이 미래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을 수 있다는 걸 안다.”

 

『메이드 인 공장』에서 작가 김중혁이 한 말이다. 현재를 꼼꼼하게 채워가는 것 같은 데도 스스로 충족에 이르지 못하는 심리 상태는 작가의 말처럼 미래에 대한 비관 때문에 생긴 감정이 아닐는지. 현재에서 준비한 것들이 미래에서 소용에 닿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 그것 때문에 몸과 마음의 피로가 누적된다는 것. 그 피로를 이기는 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2. 최소한의 양심

 

‘가난한 자가 원망을 품지 않기는 어렵지만 부자가 오만하지 않기는 쉽다.’ 공자가 한 말이다. 신체 건강한 사람이 살면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일까. 돈 없어 비굴하고 비참하고 불안하고 불편할 때일 것이다. 반면에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의 오만은 허영심에서 오는 자기 과시욕에 지나지 않으니 힘든 것과는 그리 상관이 없다. ‘허영’은 ‘비참’보다는 덜 심각한 감정이다. 따라서 부자가 오만에서 벗어나는 건 가난한 자가 원망을 품지 않기보다 쉽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이 가졌으면서 더 오만하고, 덜 가졌는데도 전혀 원망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왜 세상엔 이토록 착한 사람들이 많은지. 왜 한 편에선 저토록 양심 없는 사람들이 있는지. 가진 자들이 저들끼리 속이고 속으면 ‘그들만의 판’이려니 하면 그만이다. 한데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의 눈과 마음을 속이고 치졸하게 구는 걸 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작게는 너와 나의 인간관계에서 크게는 경제활동을 아우르는 기업의식에 이르기까지 그 양상도 다양하다.

 

가진 자들이 제 것 귀한 줄 아는 것 백만 배 이상으로 덜 가진 자들의 제 것은 소중하다. 덜 가진 자들은 원래 가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작은 것 하나도 귀할 수밖에 없다. 덜 가진 자들이 순진하고 바보 같아서 가진 자들의 더티 플레이를 방관하는 건 아니다.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거다. 약자이기 때문에.

 

법이 허용하는 안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는 사업주가 있다 치자. 어인 일인지 그는 사회사업과 기부에 관심이 많다. 그런 그가 자신이 헌신하는 종교 단체의 사회사업에 기부금을 냈다 치자. 그는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정말로 선한 사람이라면 사업주로서 먼저 자신의 직원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쳐주었을 것이다. 저보다 훨씬 못한 이들을 짓밟아 얻은 돈으로 행한 선행은 칭송 받아 마땅한 걸까.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고 어른들이 말했다. 적어도 덜 가진 자들 앞에서 양심 찔리는 행동은 하지 말자. 종일토록 이런 화두에 매달렸다.

 

 

3. 마왕과 신해철

 

 

 

 

 

 

 

 

 

슈베르트 가곡 ‘마왕’을 여러 버전으로 보며 듣는다. 애니메이션이 따르는 몇몇 성악가 버전부터 흑백 화면으로 된 피터 디스카우를 지나, 바리톤 최현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석을 접한다. 평소 좋아하던 가곡이긴 하지만 새삼 이 짧은 가곡 하나에 온몸과 마음을 빼앗긴다.

 

괴테의 시에 열여덟의 소년이었던 슈베르트가 곡을 붙였다. 셋잇단음표로 휘몰아치는 피아노 전주에 맞춰 노래가 이어지는데 성악가는 내레이터, 아버지, 아이, 마왕 등의 목소리를 차례로 연주한다. 폭풍우 휘몰아치는 밤 아픈 아들을 감싸 안고 집을 향해 말을 달리는 아버지. 꽃과 놀이와 소녀들이 있다며 아이에게 죽음의 세계로 유혹하는 마왕. 두려움에 떨며 마왕의 속삭임을 아버지에게 전하는 아들. 그것은 엷게 퍼진 안개 무리이며, 마른 나뭇잎들의 바스락거림이며, 오래된 버드나무의 음울한 흔들림일 뿐이라며 아이를 안심시키는 아버지. 하지만 안마당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 품에서 아들은 죽어있었다.

 

‘마왕’을 들으며 신해철을 생각했다. 아니 그 때문에 다시 슈베르트의 마왕을 클릭했다는 게 맞는 말이다. ‘마왕’ 별호는 그와 무척 잘 어울린다. 강렬한 울림의 그 이미지는 노래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했고, 정당한 이유 없이 개별자를 구속하는 것들에 반기를 들었다. 부패한 정치권이 도덕에 파격적인 유행가 가수들보다 더한 유해매체라고 일갈했으며, 부와 명성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 세상을 바꿀 힘은 없어도 세상의 일부인 자신을 바꿀 힘은 있지 않겠느냐는 멋진 말도 남겼다.

 

음악인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아티스트였지만, 논객일 때의 그도 더할 나위 없는 멋진 사나이였다.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음악적 열정과 사회적 패기의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마왕. 그 영역 안으로 유혹할 어린 양들이 이리도 많은데 정작 그 자신이 먼저 먼 길을 떠나버렸다. 안개 무리이며,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이며, 버드나무의 흔들림인 모든 것들의 진실을 노래하고 품었던 그를 애도하는 아침이다.

 

 

4. 식구 모두의 배려

 

어쩌다 엄마께 전화하면 엄마는 올케언니 칭찬부터 한다. 언니가 얼마나 집안 대소사를 살뜰히 챙기며, 얼마나 자주 안부 전화를 걸어오며, 얼마나 형제들 간에 우애를 다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가를 조곤조곤 들려주신다. 엄마는 좋으시겠어요, 요즘 그런 며느리가 어디 있어요, 라고 맞장구를 치면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완벽한 며느리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언니의 노고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면 올케언니에게 전화를 건다. 좋은 며느리가 되려하지 말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은 억지로 하지 말라고. 그런 내 충언(?)이 먹힐 리 없다. 사십년을 그렇게 살아온 언니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하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올케언니의 삶은 누가 보상해주나 하는 생각에 이르면 미안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엄마로서는 복 받은 노년을 보내는 거지만 그렇다고 올케언니의 정성에 박수만 칠 수도 없다. 가부장적 사고에서 비롯된 여성적 삶의 원칙들이 무조건 옳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간 여성의 개성은 권력이나 집단의 하위 개념일 때가 많았다. 더구나 이런 여성상은 여성 스스로 강화하는 면이 없지 않았는데, 그들은 스스로 도리와 헌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왔다.

 

전통적 권위는 남성 또는 아버지 차지였고, 헌신은 여성 혹은 어머니의 다른 이름이었다. 자연히 효 이데올로기의 최전방 행동대원은 여자들 차지였다. 젊디젊은 스타가‘결혼 상대는 우리 부모에게 잘 할 수 있는 여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하기 때문’이라고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면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근성이 여전히 여성에게만 강요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여성을 한 집안의 효(孝) 대리인쯤으로 생각하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참아내지 않을 만큼 여성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긴 했다. 그렇다고 남녀평등이 보편화되었다거나 여성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고 교묘하게 선전하는 집단들에는 여전히 동의할 마음이 없다. 가족 집단에 대한 희생이나 배려는 여성만의 몫이 아니라, 식구 모두의 것이 되어야 온당하다.

 

 

5. 꿈과 현실의 펄럭임

 

우리가 지닌 이미지 속에서 꿈과 현실이 완전히 분리되면 좋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 둘 사이의 이미지 중첩에서 오는 혼란 때문에 당혹해지질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국의 도시를 둘러 본 뒤 몇 년이 지나, 그곳 풍광에 대한 실제 이미지가 희미해지면 그곳을 가기 전 꿈꿨던 상상 속의 이미지와 실제가 뒤섞여 혼란스러움을 맛보게도 된다.

 

예를 들면 리스본의 구시가 언덕 골목길 바닥에 깔린 오랜 돌들에 대한 이미지가 상상 속의 것인지 실제의 것인지 헛갈리고, 그 한갓진 골목에서 흘러나오던 파두의 목소리 주인공이 크리스티나 마데이라였는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였는지 분명치 않게 된다.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을 기억한다면 그곳 노천카페에서 체질에도 맞지 않은 에스프레소를 마셨는지, 아니면 즐비하게 이어진 옷가게에서 이국풍의 티셔츠를 샀는지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다.

 

좀 더 대중적인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으로 기억을 돌리더라도 달라질 게 없다. 그 언덕길에 대한 이미지가 그곳에 가보기 전 몇 십 년 동안 꿈꿔왔던 내 안의 풍경인지, 실제 보고 난 뒤에 기억된 모습인지 확신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혼란은 당혹감을 안겨주는 게 사실이지만 굳이 그런 느낌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꿈이란 현실 속에서도 존재하고, 현실 자체도 꿈의 이미지로 조직화할 수 있다는 희망의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터이니.

 

“어느 날, 나이가 들면, 보르도에 실제로 도착하는 것보다 보르도를 꿈꾸는 것이 더 좋거니와, 더 진실하다는 걸 기억할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저 문장을 발견했을 때 조금만 자책하기로 했다. 환상과 현실의 뒤죽박죽된 이미지가 혼재해 있지 않는 삶이라면 얼마나 도식적이고 기계적일 것인가. 그곳의 빛깔과 맛과 냄새가 현실 속의 실체였는지, 머릿속 허상이었는지 불분명해지기 시작하면 다시 떠날 시기가 도래했다는 조짐으로 봐도 좋겠다. 상상으로 날갯짓하는 내 안의 펄럭임, 그것이 더 좋거나 진실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 사람들은 지금도 떠나고 앞으로도 기꺼이 떠날 것이기에.

 

 

6. 검은 다이아몬드 문체

 

 

 

 

 

 

 

 

 

 

 

 

 

“나는 내 작품의 인물들이 체험하는 일을 모두 내 자신의 일로 느낀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나는 작중 인물들의 내부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말할 때도 나는 일체 부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단지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계속 유지할 뿐이다.”

 

헝가리 출신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저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소설을 쓸 때 결코 인물 내부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은 옳다. 반면에 등장인물과 함께 슬픔에 빠지고 두려움에 떤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말처럼 보인다. 철저하게 외부적 시선을 유지하는 사람은 슬픔에 빠지거나 두려움에 떨게 될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감정적 시선에서 떨어져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슬픔이나 두려움을 다스리고 잠재워야 할 것인가.

 

하지만 그녀의 대표작『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고 나면 첫머리에 인용한 저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의 문장은 지독히 건조하고 담담하다. 묘한 것은 지독히 건조하고 담담한 그 문장들이 독자에게 건너가면 바늘 끝 같고, 손톱 같은 ‘콕콕 찌름’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벌목장에서 베이는 나무처럼 무뚝뚝한 문장들이 툭툭 넘어졌을 뿐인데, 그것을 목도한 독자는 손댈 수 없을 만큼 아린 통증을 품어야 한다.

 

건조한 문투 덕분에 오히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매혹을 앓게 하는 그녀. 너무 아프면 아프다고 말 못하고, 너무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 잇지 못하는 원리와 같다고나 할까. 과장이나 과잉 없는 서술로 사건 많은 쌍둥이의 일생을 전하는 아고타 크리스토프. 감정선을 드러내는 그 어떤 묘사 없이, 짧고 단호한 직설로 뱉어내는 발화법. 그 속에서 처절한 절망의 노래를 느끼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느 비평가가 그녀의 문체를 ‘검은 다이아몬드’에 비유했다는 말이 어쩜 이리 와닿는지. 처절하고 냉엄하고 허위적인 삶의 조각들을 불러내,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는 그녀의 방식에 뒤늦은 찬미가를 보탠다.

 

 

7. 욕망이라는 양철지붕

 

예술의 효용은 진실 탐구에 있다. 보편적 정서라는 잣대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고, 추한 것을 추하게 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시각이라 굳이 예술의 범주에 넣지 않아도 된다. 현상의 그 모든 이면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는 과정 그것이 예술 행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한 예로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들은 인간 욕망의 밑바닥까지를 들춰낸다.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인간 군상, 몸서리치는 자책으로 탈출을 꿈꾸거나, 환상과 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개인의 초상 등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작가의 경험과도 무관치 않은 이런 설정은 우리 일상과도 겹쳐 있기에 정당한 설득력을 얻는다.

 

누구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로 살아간다. 같은 제목의 윌리엄스 희곡은 제어할 수 없는 인간 욕망을 고양이에 비유했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 올라가기를 좋아하는 고양이는 없다. 하지만 삶이란 무대는 만만치 않다. 욕망하는 무엇을 탐색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판쯤은 견뎌내야 한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폴리트 할아버지의 생일 즈음, 모인 식구들은 평안과는 먼 분위기에 휩싸인다. 평생 남편에게 냉대 받으면서도 그를 사랑한 부인, 지나치리만큼 냉혹하고 현실적인 큰 아들 부부, 그들은 동생에게 거대한 아버지의 재산이 상속될까봐 전전긍긍한다. 둘째아들은 이런 상황과는 무관하게 개인적 고민으로 갈등한다. 동성애적 관심을 호소하던 절친한 친구의 죽음이 자신의 외면 때문이라는 자책에 시달리며 점점 비현실적 인물이 되어 간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는 사랑의 결핍에 괴로워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시아버지의 재산에 집착하게 된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스스로의 운명에 발을 동동 구른다.

 

삶 자체가 달궈진 양철지붕이다. 억눌리면 억눌리는 대로, 냉혹하면 냉혹한 대로, 절실하면 절실한 대로 우리는 그 판 위에서 저마다의 발바닥을 단련시킨다. 뜨거운 지붕 위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발바닥의 동동거림만 더해질 뿐, 좀체 벗어나기 힘든.

 

** 가끔은 술을 마실 줄 알았으면 좋겠다, 고 생각한다.

    지금이 딱 그런 심정이다. 소주라도 마시면 밤은 안 새도 될 것 같은데

    계속해서 김광석만 듣는다.  소주 안주인 김광석은 있는데 소주를 못하니 무슨 재민겨ㅠ  

    그래, 그냥 밤을 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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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11-17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자가 오만에서 벗어나는 건 가난한 자가 원망을 품지 않기보다 쉽다고 할 수 있다.

맞습니다. 부자 자식이 착해지는 건 쉬워요. 좋은 것만 보게 하고 좋은 교육을 받으니깐 말이죠.
하지만 가난한 자식이 착해지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안 좋은 것을 많이 보면서 자라니까요.
착하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선하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선하다는 윤리적 기준에 의한 것이고 착하다는 윤리적 기준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동네 바보가 착할수는 있지만 선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하다는 윤리적 판단의 의거 저항할 수 있는힘이그든요... 선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11-22 11:28   좋아요 0 | URL
곰발님 착한 것과 선한 것 관련 페이퍼 읽고 넘 공감 돼서 저도 하나 건졌잖아요. 언어는 계급을 규정한다, 랄까요. 제 새 페이퍼 4번이 님의 글에 대해서 공감 버튼을 누른 거라 생각하심 되어요. 글로써 완벽한 님은 알라딘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자주 오소서.^^*

이진 2014-11-17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에 꽂혀서 밤을 샐 수 있는, 한강 작가의 말처럼 책을 읽다 글이 읽히지 않아 고개를 들어보았더니 밤이 되어 있었다는, 그런 경험이나 집중력이 제겐 없어요. 신체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건강이 따라주지 않는데다 사십 분 정도 집중하고 나면 슬슬 정신이 흐트러져버리죠. 그래서 저는 팜님의 그 몰입이 부러워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

저는 유자왕의 마왕을 보면 입을 다물 수가 없어요.
슈베르트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마왕을 그중에서 세 번째 정도로 좋아하죠.

다크아이즈 2014-11-22 11:30   좋아요 0 | URL
이진님, 이진님
클래식과 문학을 두루두루 섭렵하는 멋진 사나이.
서울 올라가도 알라딘은 죽 계속한다, 맞지요?
아직 한강 작가를 독파 못 하고 있는데 이진님 덕에 한강을 파야겠어요 ㅋ

라로 2014-11-21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자주 올려주세요~~~~~~~.

다크아이즈 2014-11-22 11:31   좋아요 0 | URL
알잖아요, 지가 월매나 게실러 빠졌는지를
근데 좀 바지런해지기는 해야겠어요. 그래도 글 쓸 때가 젤로다 살아있는 느낌이거든요.

시험 잘 치고, 여행도 잘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