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락의 키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키치(Kitsch)’에 관한 작가 고유의 예화들로 가득하다. 주인공들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각자 고유 캐릭터인 가벼움과 무거움의 속성을 바탕으로 상호 교류한다. 그 과정에서 진실로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인간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즉 키치에 관한 것이었다.

 

 

  키치는 한마디로 ‘저속함’을 말한다. 그 말의 본래적 태생을 떠나, 밀란 쿤데라 이후 이제 그것은 ‘삶을 바라보는 가짜의 태도’로까지 영역을 확대하게 되었다. 쿤데라 식으로 이해하자면 키치는 ‘싸구려 잣대로 공감대를 유도하는 유치한 놀음이자, 우연하고 당위적인 실체를 위선적인 미적 가치로 환원시키려는 모든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봄이 왔다. 너나할 것 없이 벚꽃놀이를 간다. 달리는 차창밖의 모든 풍광들은 봄빛에 조화롭다. 저 꽃과 나무들이 풍기는 시각적 향연, 저 들판에 솟구치는 대지와 공기의 냄새. 이런 것들을 기대하기까지는 키치가 끼어들 틈이 없다. 백년이 넘은 아름드리 꽃길에 행락객이 부려지는 순간, 우리의 눈길을 이끄는 건 흐드러진 꽃가지가 아니라, 나무 사이마다 빼곡하게 들어찬 좌판대의 물결이다. 멀리서 바라봤던 벚꽃은 환상이나 거짓의 풍경으로 밀려나고, 가까운 생존의 물결은 진실이 되어 시야를 불편하게 한다. 일차적 키치의 현장을 목도하는 순간이다. 웬만한 서민적․대중적 코드에 무난한 나 같은 사람도 그 키치적 부담 앞에선 견디기 힘들었다.

 

 

  여기서 그치면 키치에 대한 쿤데라 식의 완전한 정의가 될 수 없다. 쿤데라는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야말로 키치라고 단언했으므로. 부어라, 마셔라, 떠들어라 식의 정서적 친밀감이 서린 그 행락 문화는 관찰자의 피로와 염증을 수반하더라도 그 자체가 키치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그런 풍경 속에 골치가 지끈거리면서도 흐드러진 봄꽃 잘 보고 왔다고 역시 자연은 위대하다고, 자연 만이 살길이라고 기만적 힐링을 외친다면 그것이 곧 키치이다.

 

 

  좁은 땅에서 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향연을 즐기려니 온갖 물리적 야단법석은 필수가 되고 만다. 그러다 보니 꽃구경은 힐링이 아니라 킬링이, 스트레스 해소가 아니라 스트레스 해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가 이 봄 구경을 포기할 수 없는 건 오래된 절집 텃밭에서 피어오르는 똥 냄새야말로 우리 삶의 근원임을 알게 되는 그 짧은 순간들의 영속성 때문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생존과 관련이 있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똥을 수반한다. 똥을 부정하지 않는 시선, 키치로 전락하기 직전의 그 경건한 한 순간을 위해서도 우리에게 봄은 필요하다.

 

 

 

  

2. 신중과 경솔

 

 

  신중함이 고급한 미덕인 것만은 틀림없다. 애석하게도 나는 신중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대체로 급하고 다혈질이라 실수가 잦다. 젊은 한 때 환경적 요인에 의해 무척 신중한 시간들이 내게도 있었다.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생각이 많은 편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소심하고 걱정이 많았다. 아마 그때 별로 만족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부러 신중함 앞에서 결례를 일삼는지도 모르겠다.

 

 

  신중한 사람은 겸손하고, 과묵하며, 들뜨지 않는다. 경솔한 사람은 허둥대고, 오지랖을 떨며, 참지 못하고 앞선다. 신중한 사람은 소심하며, 무례하지 않고, 절제한다. 경솔한 사람은 대범하며, 적극적이며, 즉흥적이다. 신중한 사람은 견해를 자제하며, 판단하기를 주저하며, 통솔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경솔한 사람은 말이 앞서고, 판단에 서두르며, 의기투합하기를 즐긴다.

 

 

  써놓고 보니 하늘이 보시기에도 일견 신중한 사람에게 후한 점수를 주게 생겼다. 하지만 신중한 것이 좋고 경솔한 것은 나쁘다, 꼭 이런 얘기가 성립되는 것만은 아니다. 경솔의 실수가 신중의 갑갑함보다 인간적일 때도 많기 때문이다. 좋은 쪽으로도 참지 못하는 그들은 먼저 행동하고, 앞서 배려하며, 빨리 나아간다. 신중파에 비해 실수가 잦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다소 거친 듯 에너지가 넘치는 그들 곁엔 사람들이 몰린다. 지루한 평화보다는 어설픈 열정이 훨씬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실수나 과장이 주는 약점이 갑갑한 무결점 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는 건 본능이 알아차린다.

 

 

  신중이 개별성에 함몰되면 지겹거나 매혹이 반감되고, 경솔로써 대중을 호도하면 밉상이 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극단적이지 않다는 전제 하에 신중과 경솔 중 누구를 친구로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후자를 택하겠다. 경솔이 인간적 미덕이 되는 딱 그 지점에서 추가 멈췄으면 좋겠다. 신중함의 불편 보다는 경솔함의 편리함, 즉 제 안에 갇힌 햄릿보다는 말 달리는 돈키호테가 훨씬 내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3. 송덕봉의 유머 코드

 

 

  조선시대에 활약한 여성 문인들은 많았다. 신사임당을 비롯한 황진이, 이옥봉, 이매창, 허난설헌 등이 그들이다. 물론 송덕봉도 빠질 수 없다. 송덕봉은 16세기 초중반 활동한 주부 시인인데 인간적 재치와 유머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미의 문학적 성과 대부분은 남편인 미암 유희춘이 남긴 ‘미암일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인품과 학식은 믿을만했지만, 키가 작다는 이유로 가족은 미암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자 편지로 미암에게 신행 올 때 버선발에 두꺼운 솜을 켜켜이 넣어 신고 오라고 충고했다. 우리나라 키높이 신발의 원조가 될지도 모를 에피소드가 덕봉에게서 나온 셈이다. 한편 장난끼 많은 미암이 부인에게 이런 시를 지었다. ‘부인이 문 밖에 나갈 때 코가 먼저 나가더라.’ 콧대 센 부인을 놀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가만히 있을 덕봉이 아니었다. ‘남편이 길을 갈 때 갓끈이 땅을 끌더라.’ 미암의 작은 키를 농으로 받아치는 여유를 발휘한다.

 

 

  오랜 귀양 생활 끝에 벼슬길에 다시 오른 미암은 고향에 남아 있는 덕봉에게 자신의 행실을 자랑하고 싶었다. 지난 몇 개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큰 은혜를 입은 줄 알라고 편지를 보낸다. 덕봉은 답한다. 늘그막에 홀로 지새는 것은 당신 건강에나 좋은 일이지 마누라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은 아니라고. 더구나 시모의 삼 년 상을 거두고, 귀양살이 때 먼 길 찾아 나선 것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나은 것이냐고 일침을 가한다.

 

 

  저토록 거침없는 화법과 진솔한 여성적 유머 코드가 용인된 당시 조선 사회는 확실히 여성에게 열린 사회였다. 논리적이고 담대하며 문학적 감수성 면에서도 결코 미암에게 뒤지지 않았던 덕봉 여사의 한 궤적도 남편인 미암의 배려 없이는 꽃피우기 힘들었을 것이다. 비 따라 봄 오는 오늘 같은 날, 봄꽃을 앞에 두고 덕봉과 미암은 어떤 시로 부부의 정을 나눴을까. 그미를 위한 온전한 시집은 사라지고, 미암의 기록만으로 그 시절을 되돌려야 하는 게 조금은 애석하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3-03-31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각조각 흩어진 단어들을 모아 돌아오고 싶지만 영 할 일이 많네요.
댓글로나마 단어들을 집합해봅니다.
이 페이퍼는 제 마음 한 구석을 콕콕 찌르는 데가 있어요. 밀란 쿤데라와 애덤 스미스는 언젠가 꼭 읽으리라 다짐은 하고 있지만 알라딘에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처럼 어떤 연유 때문에 읽지 못하고 있거든요. 한국소설도 못 읽는 판에 ... 흑
쿤데라는 정말 읽고 싶네요. 키치.

다크아이즈 2013-04-07 10:27   좋아요 0 | URL
애덤 스미스는 미루더라도 쿤데라는 소이진님 읽어도 감흥이 올 듯.
확실히 재미로만 보면 우리 소설이 좀 처지는 듯.
그래도 쓰려면 무척 어려운 게 우리말 소설...
감각적인 외국어 소설들이 저를 울리는 아침입니다.^^*
이진님 봄날 가네요. ㅠ

2013-03-31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7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3-04-01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쿤데라,,,멋진 작가에요,,,
그리고 애덤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최근 제 장바구니에서 가장 많이 들락거린 책인데 아직도 구입하지 못하고 있네요,,,흥미위주의 책을 먼저 구매하게 되는 것 같아요,,ㅠㅠ하지만 보관함에 있으니 언젠가 사게 되겠지요,,ㅎㅎㅎㅎ
밑에 글들도 댓글은 못 달았지만(한동안 제 컴이 고장) 다 읽었어요,,,힛

다크아이즈 2013-04-07 10:23   좋아요 0 | URL
저도 제 흥미위주로 보는 걸요.
컴 고장 나도 나비님의 책사랑, 알라딘 사랑은 쭈욱~~
알라딘에서 님 위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없는 동안 맛보았지요.
봄날 파이팅^^*
내일도 파이팅 흐흐~~~

굿바이 2013-04-01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한민국 예식장 건물만큼 키치라는 단어를 잘 상징하는 것이 또 있을까요?^^
쿤데라는 저렇게 멋지게 그것을 표현하는군요. 역시나 브라보~!입니다!!!

다크아이즈 2013-04-07 10:18   좋아요 0 | URL
현상적 키치도 키치요, 마음의 키치는 더한 키치로 그려내는 쿤데라 식 통찰에 혀를 내두릅니다.
굿바이님 굿모닝^^*

2013-04-01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7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