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놓아야 오는 게 있다. 모든 걸 버린 뒤에야 짜릿하게 얻는 게 있다. 바로 자유다. 그토록 갈구하는데도 언제나 그것이 멀기만 한 것은 우리 일상 자체가 버릴 수 없는 것들을 위한 연극 무대이기 때문이다. 밥벌이를 위해 힘껏 고개 숙여야 하고, 눈물을 감추기 위해 크게 웃어야 하며, 벼랑이 두려운 나머지 단단히 밧줄을 잡아야 한다. 정말로 자유가 다급하다면 그 모든 걸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극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관계망이란 현상과 자유라는 본질을 동시에 얻으려는 모순된 굴레, 그런 인간 속성을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줄 위를 오가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진 못해요.’『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고용주인 ‘나’에게 저처럼 일갈한다.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인 척해도 그것은 실제 자유와는 별 상관이 없다.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은 자유를 위해 제 인생 순간순간을 도박에 걸지는 않는다. 그토록 어리석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인 조르바는 다르다. 벼랑에 몰리더라도 인간이 줄을 자르지 않으면 무슨 살맛이 나겠냐고 다그친다. 일상의 우리가 우물쭈물하며 생각만 하고 있을 때, 소설 속 조르바는 과감하게 내려놓고 실천한다. 본능의 화신인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부렸다. 춤추고 싶으면 춤추고, 떠나고 싶으면 떠났다. 그에게 과거란 없는 것이며, 미래는 미리 걱정할 게 아니었다. 오직 현재만이 유효한 놀이터였다.
무지렁이 단순 일꾼 조르바는 안타까운 인간 굴레를 위무하기 위해 만든 작가의 꽃다발이 아니었을까. 살아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게 완전무결한 인간의 자유라는 걸 방증하기 위해 조르바란 꿈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조르바의 눈에는 팽팽한 긴 줄 끝에 있으면서도 끝내 그것이 자유라고, 행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으로 보일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