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도 너무 길다. 일본의 독특한 문학 장르인 ‘하이쿠’(俳句)를 가리킬 때 자주 듣는 말이다. 하이쿠는 우리나라의 시조와 비견될 수 있겠다. 글자 수로만 비교한다면 우리나라 단시조의 초장 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독서클럽에서 하이쿠 모음집을 읽고 토론했다. 일본 문학을 깊이 공부한 이가 없으니 수박 겉핥기이긴 했다. 아쉬운 대로 하이쿠에 대한 기본 정보를 나누었다는 데서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큰 소득도 있었다. 짧은 시가 주는 매력과 그것이 주는 치유의 느꺼움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하이쿠는 총 17글자로 이루어진 5·7·5조의 일본 정형시이다. 지구상의 가장 짧은 시 형식 중의 하나이다. 처음 그것을 접했을 땐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예를 들면 ‘해묵은 연못이여 / 개구리 뛰어드는 / 물소리, 첨벙’ - 마츠오 바쇼의 이 하이쿠는 최고로 꼽히는데,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이게 왜 좋은 시라는 건지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하이쿠 특유의 일본 정서를 살피다 보면 짧은 시가 품은 그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이쿠는 크게 세 가지 형식미를 갖는다. 앞서 나온 대로 열일곱 글자 내외의 정형성을 갖는다는 게 그 첫번 째다. 두 번째로 짧은 시 안에는 계어(季語기고)가 있어야 한다. 개구리, 장마, 기러기, 첫눈 등 누가 봐도 계절을 연상할 수 있는 낱말들이 하이쿠에 자주 쓰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 번째는 절자(切子기레지)를 갖추어야 한다. 세 구 중 어느 한 곳에 여운이나 감탄을 나타내는 어미를 써서 시적 흐름을 끊어주는 것을 말한다. 위의 바쇼 시에서 ‘해묵은 연못에’ 하지 않고, ‘해묵은 연못이여’하고 한 호흡을 끊어줄 때 훨씬 시적 긴장을 유발한다.
짧은 시가 주는 긴 여운이 신기해 우리식으로 17자 시 짓기 대회를 했다. 격조 높아 부담스러운 우리 시조에 비해 접근하기가 쉬워서 그런지 회원들 반응이 나쁘지 않다. 하이쿠의 묘미인 촌철살인엔 미치지 못해도 저마다 숨겨뒀던 발설욕구는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겠다. 시가 뭐 별건가. 제 안을 맴돌던 말씀들의 향연을 짧은 호흡으로 쏟아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마다 시인이 아니던가. 모두들 절제된 언어의 명쾌함이 주는 치유 놀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고 있었다.
< 회원들의 미완 촌철살인 하이쿠 모음 >
1.시린 손 불며
기표하는 스무 살
떨리는 손끝
2. 녹는 똥 밟았다
조카 크레파스 십팔색깔!
구린 신 바닥
3. 벗은 나무여
가지마다 설움 달아
흐느끼는 온밤
4. 첫눈길 님 마중
맘보다 차바퀴 앞서네
가드레일 휘청!
5. 살얼음 꼈네
백로떼 어딜 갔나
호수엔 그림자만
6. 시린 어깨여
켜진 프린터 소리가
온풍기인 줄!
7. 시린 발걸음
마음처럼 못 가는 건
심장 먼저 언 탓
8. 마른 잔디밭
성급한 냉이 돋아
당황한 햇살
9. 얼음 낀 물확
수초는 그대론데
마실 갔나 구피!
10. 하이쿠 짓는 동지
팥죽 색깔 얼굴만
붉으락 푸르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