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시 자체보다 시인의 말이 더 시적일 때가 있다.

  원래 시부터 보는데, 어쩌다 시인의 말부터 읽은 시집이다.

  한창훈 소설가의 발문도 좋은데, 맨 뒷장 시인의 말을 보니

  왜 이정록 시인이 시인인지 알겠다.

 

 

  시인의 말, 이 말이 한 편의 시보다 더 좋아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낭송 잘 하는 이가 중저음 목소리로 읊었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자 돌려  가며 다시 읽었다. 그 때 누군가 이 아까운 새책 - 책 험하게 보는  내가 왜 이 책은 조심스레 다뤘는지는 묻지 말아 달라 -의 뒷 표지 안쪽을 확, 꺾어 꺾은 선을 아래 위로 내는 것이었다. 눈에 불이 났다.  평소 말 실수가 잦은 이라 좀 짜증이 났다. 진중한 사람이 그랬다면 이해심이 넘쳤을 것이다. 지금 시집을 바라보는데 그 꺾인선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왜 남의 새 책 표지에다 맘대로 책 골을 만드나. 나는 표지에 꺾은선을 만들며 책을 보는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무심코 한 행동이니 시인의 말처럼 '손가락질은 하지 않'겠다. 손짓은 웃으며 타인에게 할 때 어울리고, 손가락질은 엄정하게 스스로를 향할 때 발전이 있는 법.  

 

 

   이정록 시인은 문장  털기에 능하다. 그래서 내 맘이 원하는 진짜 시인이다. <문장 털기, 혹은 흩뿌리기>란 내가 지은 말이다. 말들이 달린 나뭇가지를 흔든다. 마구 흔든다. 끝까지 살아 남은 것만 추린다. 다 털려 나목의 상태로 줄기만 남은 것, 그것이  알짜배기 문장이다. 나머지 잎새와 꽃잎일랑은 미련두지 말자. 그건 읽는 자의 몫이거나, 맘에나 쟁여둘 일이다.  형용사는 간혹, 부사마저 드물게 이렇게 써도 마음이 움직이는 것, 무심한듯, 털털한듯 서늘한 문장 그런 것이 제대로 된 문장이다. 웃음을 말하지 않는데도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물을 감추는데도 눈물이 흐르고, 가슴을 쥐어짜지 않는데도 심장이 따끔거리는 것, 탈탈 털어버린 문장 속에서 이런 걸 발견하는 기쁨이란!

 

  혹자는 이런 문장을 무미건조하다고 한다. 무색 무취 무맛인 문장이 발산하는 깊이와 재미에 빠졌다면 무조건 고! 맥진할 따름인뎌.  

 

   귀한 시집 주신 분도 시인의 말이 맘에 들었음에 틀림없다. 시인의 말을 옮겨 적는 내 손끝이 예민해진다. 문장 부호 하나라도 틀리게 받아 적을 까봐.

 

 

시인의 말                         이정록

 

쓰는 게 아니라

받아 모시는 거다.

시는, 온몸으로 줍는 거다.

 

그 마음 하나로

감나무 밑을 서성거렸다.

손가락질은 하지 않았다.

바닥을 친 땡감의 상처, 그 진물에 펜을 찍었다.

홍시 너머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사랑의 주소는 자주 바뀌었으나,

사랑의 본적은 늘 같은 자리였다.   

 

                          -정말, 이정록,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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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2-0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에요. 문장털기요!
그래서 올리브 키터리지도 좋아할 거라고 직감했구요.
표지 꺾는 거 저도 남편이 그렇게 해도 싫더라구요.
그래도 이 시집의 경우엔 용서ㅋ해 드리기로 해요, 우리.ㅎㅎㅎ
문장털기, 이거나 마음에 꼭 새길랍니다. ^^
근데 님, 늘 아주 늦게 잠자리 드시나 봐요. 건강 챙겨야 돼요.^^

2012-12-07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7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2-12-06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시 넘은 새벽에 이 시를 가지고 노셨군요. 팜 님 멋져요.
저도 모아 두었던 시집을 다시 꺼내 읽어 보고 싶게 만드는 페이퍼예요. ^^

다크아이즈 2012-12-07 10:43   좋아요 0 | URL
페크님, 누구나 다 시를 쓸 필요는 없지만, 읽고 쓰는 이라면 시집을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좋은 시집을 만나면 심장 박동수가 급격히 올라요.
좋은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내린 축복 중에 하나 맞지요?
시집 읽는 페크님의 생각 가지치기 기다려 볼게요^^*

이정록 2012-12-07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 쓰는 이정록입니다. 번개라도 하고픈 아름다운 칭찬이네요.고맙습니다.

다크아이즈 2012-12-07 10:57   좋아요 0 | URL
이정록 시인님 친히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시인님을 지난 여름 바닷가 강연에서 뵌 적 있지요.
멀리 앉아 있었지만, 시인님이 왜 시인일 수밖에 없는지 그때 이미 눈치챘지요.
은근히 까다로운 저 같은 독자를 만족시키는 시인님이라니...

마음은 벌써 번개자리에 가있습니다.^^*

제 리뷰 중, <꽃은 까지려고 핀다>는 그때 강연회에서 누군가 <시인의 서랍>을 선물로 주셨는데, 시인님께서 한 줄 흔적 주셨지요. 그걸로 적은 단상이자 시인님에 대한 제 헌사입니다.

시인이 완벽한 문장으로 시를 말할 때 시쳇말로 저는 뿅~ 가버립니다.
저 지금 당연히 뿅뿅~~ 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주말 맞이하시길...


라로 2012-12-07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글 역시 밤에 읽을래요!!!
이 혼잡한 순간에 어떻게 이 글을 읽을 수 있겠어요!!(누가 뭐래나??ㅎㅎ)

다크아이즈 2012-12-08 17:03   좋아요 0 | URL
나비님 안 읽어 주셔도 이렇게 찾아와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격인걸요.
웬체 바쁘신 나비님이니...
따땃한 봄바람 불면 프레님과 이곳으로 놀러오세요.
제가 초대 한 번 할게요. 진심이어요.^^*

라로 2012-12-15 14:15   좋아요 0 | URL
"시인의 말을 옮겨 적는 내 손끝이 예민해진다. 문장 부호 하나라도 틀리게 받아 적을 까봐."라는 문장을 읽고 시인이 어땟을까요!!! 저도 떨리는걸요!!
글 잘 읽었어요. 시집은 안 산지 천년은 된 것 같은데 보관함에 담습니다.

다크아이즈 2012-12-16 04:28   좋아요 0 | URL
시인님은 아마 문장 털기에 능하다고 헌사를 바친 제 말에 고마워했을 듯.
실제로 할 말만 하는데도 서정성과 털털함이 다 보이니 이런 시를 어찌 좋아하지 않겠어요. 구질구질하게 뱉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시에 비하면 천상 시인이죠, 뭐.

나비님, 시집은 많이 읽을수록 좋긴 해요. 몸과 맘 정화되고, 문장도 배우고...

2012-12-07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8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9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9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