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눈이 싫다. 늙기도 늙었지만 비와 달리 눈이 내린 후 지저분한 마무리를 싫어한다. 한바탕 쏟아지는 소나기가 목욕탕 이태리 타월 같은 느낌이라면 펑펑 내리는 눈은 기름때 덕지덕지 낀 냄비를 설거지 한 후 손에 남아있는 불쾌한 미끈거림과 비슷하다. 더불어 눈에 대한 트라우마도 제법 있다 보니 요즘처럼 하루 멀다하고 펑펑 내리는 눈은 전혀 반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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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1
지금보다 조금 젊었을 때 예비군 훈련을 받기 위해 아침부터 유난을 떨었었다. 통지서를 한 손에 들고 룰루랄라 집을 나서서 저 밑에 있는 초등학교로 내리막길을 달려가고 있을 때. 난 떴다. 마이클 조단이 부럽지 않아요. 아 빌리브 아 캔 플라이 해요. 하는 느낌이 대략 4~5초간 지속되더니 무지막지한 충격음과 더불어 눈 덮인 내리막길에 사정없이 파워 밤이 작렬되었다. (주) 파워밤-프로레슬링 기술로 상대방을 들어 링에 매다 꽂는 기술. 충격도 충격이지만 비주얼과 효과음이 기가 막혀 파워풀한 기술로 통함)
30여초 어버버 벙어리 삼룡이 모습으로 말도 못하고 얼음판에 자빠져 있었고 상태를 지켜보던 지나가던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모습까지 연출된다. 어디 크게 다친 건 없었으나 사람이 의식을 놓친다. 란 의미를 몸소 체험했던 첫 번째 경험이었다.
트라우마 #2
눈 온 다음날 운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무모한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역시나 내리막길에서 만화 속 이니셜 D의 장면을 연출하며 그대로 앞차를 추돌. 다행히(?)바른 생활 부부를 만나 별 문제없이 보험처리로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눈 깔린 날 도로상황은 마복림 할머니의 신당동 떡볶이의 비결만큼이나 며느리도 모를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트라우마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오는 날 운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승용차가 아니라 트럭이라는 사실과 이건 미끄러지면 그걸로 끝이 아니라 전복까지 갈 수 있는 상황. 더불어 고속도로라는 상황에서 어중간한 부상이 아닌 사망으로 직결될 수 있다는 사실. 무슨 무슨 재난영화처럼 눈 덮인 산꼭대기 고속도로에 무릎 밑까지 내린 눈에 차가 파묻혀 4시간을 넘게 갇혀 있었던 이야기. 아주 잠깐 베어 그릴스는 이 눈으로 둘러싸인 척박한 환경에서 뭘 잡아먹었더라?를 생각했더랬다. (눈을 퍼 먹는 건 기억나는데 나머진 도통...)
이제 나도 호호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정강이와 팔뚝의 상처를 보여주며 손자에게 들려 줄 “무용담” 정도는 하나 생겼다고 애써 해석하고 싶었단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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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난 정말 눈이 싫다..우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