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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
게일 맥도날드 외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1994년 8월
평점 :
품절
중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대학 시절. 나는 친구들 중에서 단연 손편지를 가장 많이 쓰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친구들은 내 엽서나 편지를 받고 답장을 썼었고 엄청나게 많은 그 답장들은 얼마전에 이사를 한 친정집에서 발견했다. 신발 상자로 몇 개에 가득찬 그들의 답장들을 보며 난 얼마나 많은 편지들을 써 댔던걸까, 도대체 그 내용들은 무엇이었을까, 이렇게도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난 뭐라고 말을 걸었었나 무척 궁금했지만 궁금함을 풀 길이 없다. 나에겐 그들에게 쓴 내 편지가 없으므로.
십수년만에 만난 대학 때 친구와 수다를 떨며 알게 된 사실은, 그때 그녀에게도 내가 자주 엽서를 건넸다는 것이다. 그녀는 한창 힘들 때 그것에 위로를 받았고 내 격려와 위로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사실 그녀에게까지 엽서를 건넸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별로 친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지금 역시 몇 년에 한 번 정도 보는 친구이기에. 난 그녀에게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시절의 나는 진짜 상대의 마음을 읽고 위로하는 자리에 있었을까? 그저 위로자의 자리에 서고 싶었을까? 아니면 돌아오는 칭찬과 찬사에 목말라 있었을까...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었고, 때론 위로를 건네고 싶었고, 그리고 그 결과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칭찬도 받고 싶었던 나의 반짝거리던 모습은 시간이 흐른 어느 시점에서 보니 그 빛이 바래 원래 모습이 어땠는지 그게 진짜 내 모습이긴 했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변해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로 받을 사람은 나야, 내가 가장 불행해, 내가 가장 우울해,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돌볼 여유 따위는 없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시간만 남아버리고 어느새 너무 나에게만 촛점이 맞추어져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조차 잊어버린 가여운 나를 발견할 뿐이었다. 여러 환경 탓을 할 수도 있겠고 꼬이고 꼬였던 인간관계에 원인을 둘 수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확실한 사실은 내가 변했고 지금은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이 쭈그러들어 주저앉아 있다는 것.
길고 긴 단절의 터널 속 어두움에 삼켜져버려 원래 내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잊어버릴 때 즈음, 다시 찾고 싶다 생각할 때 즈음, 그게 가능이나 할까 하며 다시 포기하고 있었던 때에 우연히 떠밀린 모임에서 이 책을 함께 읽게 되었다. 책 제목만 듣고 참석하게 되었는데 후에 '관계'에 대한 책이라는 것을 알고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내가 제일 피하고 싶은 주제. 제일 귀찮아하고 제일 비관적인 부분. 게다가 교회 안에서 진행되는 모임이기에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의무감 같은 것들 때문에 마음이 상당히 복잡했다. 타고난 책임감과 성실성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참 난감했던 첫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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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부담스러웠던 책이었는데 읽어내려가며 그 인사이트가 상당함을 깨닫고 예상치 못한 흥미가 생겼다. 사람 내면의 심리와 관계에서의 어려움, 사람을 어떻게 살리고 세워가는지 결국엔 어떤 모습이 되어야 마음이 통하는 관계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경험적인 내용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수십년의 목회 활동과 부부생활을 겪으며 그들이 깨달은 것을 신중하게 고른 의미있는 단어들과 문장으로 담담하게 써 내려간다. 물론 이 책은 기본적으로 예수를 아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만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혹시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수긍이 갈 만한 방법을 제공하는 책이다. 관계에서 친밀함을 누리고 사람 사이에 반목과 갈등을 뛰어 넘는 하나됨 - 특히, 가족이나 부부 사이-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발 더 깊이 들어가 이 책을 보게 되면 일반론적인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서로를 향해 투명해야 하는 이유, 서로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해야 하는 이유, 객관적이고 일상적인 대화의 단계를 넘어서 마음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소통을 해야 하는 이유, 불편하고 힘든 갈등 관계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헌신해야 하는 이유, 공동체 안에서 민감함을 가지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워야 하는 이유...이 모든 이유는 예수가 자신의 12명의 제자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배경이 다른 12명의 사람을 불러 함께 지내며 보였던 모습에서 그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사실 그 이유가 아니었다면 굳이 그렇게 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런데 내가, 혹은 우리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언제나 사람들과 잘 지내보려고 하고 특히 가족들과는 항상 부딪히지만 또 극복하려고 애쓰고 희생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내가 발견한건 결국 나의 한계다. 그저 참고 인내하고 용서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함과 부당함에 대한 항변, 피해의식과 비판하고 싶은 욕망 등이 나를 결국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기도 한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도를 닦듯 실패해도 또 일어서고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조인간이 되어야 하는걸까?
기독교에서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애초부터 못을 박는다. 이 책에서도 결국 인간 스스로는 완벽하게 이룰 수 없는 영역임을 암시한다. 챕터마다 제시하고 있는 인간적인 방법들은 꽤 도움이 되지만 새로운 것들은 아니다. 이미 세상에 많은 책들은 관계의 회복에 관해 심리학 분야, 교육학 분야, 처세술 분야에서 넘쳐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관계의 회복과 사람들 사이의 이상적인 하나됨의 본을 예수에게서 찾아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은 약간의 도움을 넘어서 큰 깨달음과 감동을 줄 것이다. 예수가 자신을 배신하고 핍박했던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서로 누가 더 잘났느냐 싸우는 제자들을 위해 어떤 기도를 했는지, 그의 제자들이 변하여 예수의 도를 전할 때 그들이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어떻게 행동 했는지를 찾아 볼 수 있다.
어렸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위로의 편지를 썼던 나는, 어쩌면 나를 위로하고 싶어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늘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만 상대의 마음과 상황과는 별개로 내 만족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나. 물론 그때의 순수한 민감함이 누군가에게 진짜 위로가 되었었다면 참 감사한 일이지만...
나이가 더 들은 지금의 나는 진심으로 타인을, 가족을 혹은 친구를 잘 세워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일방적인 소통이 아니라 정말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서 투명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민감하게 상대를 다루며 온전하게 사람을 세워주는. 지금의 나는 완벽하게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본이 되는 예수를 따라 가다보면 열매를 볼 수 있게 되리라 믿고 싶다.
그 시작은 정말 놀랍게도 단순하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것'. 그리고 실행에 옮기는 것.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같지만 이건 진짜 어려운 일이다. 상대의 어떠함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어떠함이 문제라는 것. 그게 이 책의 출발점이다.
사랑을 통해 친밀함을 개발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가르치신 첫 번째 원리는 바로 사랑하기로 결단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p.34
모든 것은 헌신에서 시작된다.-진정한 친밀함은 헌신 - 한계를 뛰어넘어 연합으로 이끄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한 사람과의 관계를 선택한 다음, 그 관계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요구되는 모든 대가를 치불하는 것이다. p.49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바로 헌신의 시작이다. p.57
친밀한 사람은 투명하다.-자신의 삶을 열어 보인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되지 않고는 결코 가치 있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투명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이 없이는 친밀한 관계를 누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p.67
최초의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알려 주는 맨 처음 신호는 갑자기 아담 쪽에서 투명함이 사라지면서 찾아왔다.p.69
예수님은 투명한 인간의 모범이셨다. 그 분은 경제적 수준이나 영적 능력에 관계없이,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는 투명한 분이셨다....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삶을 제자들에게 열어 보이지 않으셨다면, 그 분은 결코 그런 제자들을 남기실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신학자가 아니었다. 단지 예수님과 함께 걷고 함께 사는 삶을 통해 인생의 청지기 직분을 배우는 학생들이었다. 이들이 성장한 것은 예수님의 삶이 플라톤의 새로 지은 집처럼 방마다 창문이 달려 있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p.71
사람들이 한쪽만을 내보일 때는 - 투명함을 거부하고 인격의 좋은 면만을 보이면서 무엇을 숨기려 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고통과 연약함과 수치를 숨기려 한다. 사기꾼 증후군 p.76
자신을 알려는 노력이 없이는 절대로 투명함에서 건전한 관계를 이룩할 수 없다. 자신을 향해 건전한 비판을 추구할 때에만 그 많은 창문은 비로소 열리기 시작한다. 우리 삶의 뒷방에는 어떤 두려움과 수치심과 낭패감과 죄책감과 모욕감이 자리잡고 있는가?
만일 사람이 자기를 바로 알고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투명해지는 법을 배우는 면에서 첫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를 밟은 것이라 할 수 있다. p.82
민감함 : 안을 들여다보는 기술 - 예수님은 인간 안에 있는 두려움을 미리 아셨다. "베드로야, 두려워 말라.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놀랍고 친밀한 우정은 이렇게 민감함에서 시작되었다.p.91
민감함의 뿌리는 에덴 동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길을 선택하고 자신의 투명함을 잃어버렸을 때, 그 영향은 즉각적이고도 비참한 것이었다....이제 하와는 아담이 자신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와는 아담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 무게를 저울질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과 몸짓을 유심히 살펴야만 했다...하와가 아담을 친밀하게 알려면 아담 쪽에서 투명해지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했다. '관계의 협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아담은 투명해야 했고 하와는 민감해야 했다. 서로를 진실되게 아는 정도와 친밀함의 형성 여부는 바로 그런 노력을 얼마만큼 열심히 하느냐에 달려 있다. p.93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는 법 - 민감함이란 기도와 경청하고자 하는 마음을 통해서, 그리고 조심스럽게 행하는 지속적인 연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p.104
상대방 속에서 발견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본인에게 얘기해 준다면, 그것이 바로 오단계 대화에 나타나는 인정이다. 다른 사람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현재의 가치와 미래의 잠재력을 믿는다는 말과 같다.p.146
많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비난과 험담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책망에 능한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을 지적해 주기가 두려워서, 좋은 친구들과 동료들이 이런저런 형태의 개인적인 파산의 지경으로 치달아도 그냥 내버려 두는 경우가 꽤 많다.p.149
만일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아무런 갈등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문제다...갈등이 없는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독실한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니다. 갈등이란 대화에서 불가피한 부분이다.p.162
사도들은 자기들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을 들었지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원망하는 마음을 바로 처리하기 위해 일단 문제를 표면으로 제기했다. 자칫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질 우려가 있으므로 속으로만 투덜대는 상태에 그냥 놓아 두지 않았던 것이다...불이익을 당한 쪽 사람들 역시 비난만 일삼은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해결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많은 경우 갈등을 제대로 처리하면 성장이 찾아온다. p.167
그들의 사고에서 우위를 점한 것은 전통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손이 함께했다는 증거가 분명히 제시되고 인정되자, 순식간에 의견 일치가 이루어졌다.p.168
10과 <일이 뜻대로 잘 안 될 때>와 11과 <사람을 세우는 법>은 상당히 인상적이고 감명 깊은 통찰을 주는 챕터이다. 특히 위의 인용문에 해당되는 사건-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에 논란이 일었다. 사도들은 오랫동안 지켜온 율볍에 어긋나는 행동을 두고 쉽게 비판하고 손가락질 하는 대신 열린 마음으로 문제를 검토하기로 했고 결국 생명처럼 고수했던 전통의 겉 형식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 안에 율법이나 전통보다 더 중요한 진짜 진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도들이나 기존의 구성원들이 극복해야 했던 것은 자존심을 세우며 전통을 고수하느냐, 아니면 본질을 꿰뚫는 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느냐의 선택의 순간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전자를 택한다. 그것이 훨씬 안전하고 자신의 자존심과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내 신념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인격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더 좋은 것을 지향하기 위해 만든 형식과 율법이 정말 지켜야 할 본질을 흐리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리고 그 입장을 내려놓고 본질에 다가서는 일이 얼마나 큰 진통을 주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때의 사도들과 성도들의 믿음이 얼마나 복음중심적인지 - 예수의 본을 잘 따라가는지 - 알 수 있다. 작은 규칙이나 교회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로 비난하고 힐난하고 결국엔 의가 상해 보지도 않고 사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면 진심으로 마음이 많이 아프다. 교회 안에서 추구해야 할 진실인 '예수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이라는건 그저 성경에 있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치부되고 마는 일들이 너무 많다.
몇 몇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의 룰에 맞춰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자신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한다고 그의 신앙을 판단하고 인격적으로 모독을 주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어떤 이는 서로 다른 생활 습관 때문에 불편하다는 팩트를 두고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하지 않은 채 그저 피하면서 상대방에게 결국 상처를 주고 말기도 한다. 더욱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서로의 작은 차이를 인정하지 못해 교회 안에서 더 아파하고 상처받는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면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사람들은 가장 어려워한다.
그만큼 우리 모두 마음이 닫혀 있고 상처받아 있으며 어그러져 있다. 진실에 반응하지 못하는 현대 그리스도인.
갈등 없는 관계는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독실한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니다. 갈등이란 대화에서 불가피한 부분이다….갈등이 반드시 나쁘거나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잘 처리하기만 한다면 갈등을 통해 친밀함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p.162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관계들을 연구해 보면, 불일치라는 주제에 대해 방대한 양의 자료가 등장한다….그들의 사랑에 갈등이 배제된 것처럼 보이게 하지는 말라. p165
이기는 것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관계에는 이기는 사람도 없고 지는 사람도 없이 '성장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사실에 도달하는 것보다 이기는 것에 더 관심이 많게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파괴적인 갈등이다. p.170
갈등에 분노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남자든 여자든 대개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갈등에서 '이기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서는 결코 친밀함이 자라날 수 없다.자신이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기질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어린 아이는 흔히 원한을 품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께 가장 가까워지는 때는 바로 자비를 주고받는 과정에 있을 때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p.173
예수의 본을 잘 따르는 집단이라고 해서 '갈등'이 없을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갈등이 있으므로 오히려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와 제자들 사이, 제자와 제자들 사이에서도 심각한 갈등들이 존재했었고 그것을 풀어 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예수의 행동을 보고 한 단계씩 성장해 갔다. 하지만 갈등의 와중에 당장은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특히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화 냄'의 문제이다.
친밀했던 관계도 '분노'와 '화' 때문에 얼마나 많이 갈라지는지. 화에 가까운 짜증이 많았던 나에게도 많이 와 닿았던 부분이다. 사실 원래부터 화가 많은 사람은 없다고 본다. 나 역시 성장과정에서, 혹은 트라우마에 가까운 어떤 사건들로 인해 해결되지 못한 내면의 문제가 상실감과 같은 '짜증'으로 나타날 때가 많았다. 문제는 그런 분노와 화를 정당하게 풀고 해결하지 못한채 억누르고 간과하고 무시했던 결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 - 가족-에게 어려움을 되물림하게 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집 밖에서는 표현하지 못하고 억누르고 체면 차리느라 아닌척 했던 본래의 모습들이 가장 편안한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폭발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친밀함은 고사하고 함께 있는 것조차 불편하고 둘러싼 공기는 지극히 무거울 수 밖에 없다.
기질을 스스로 다스린다는 것은 상태가 어느정도 괜찮을 때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스스로 다스릴 수 없을 때라고 판단이 들면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투명해 지고 솔직해 지는 것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친밀함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꼭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나 역시 그 과정을 인정하고 내 상태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기까지 결코 적지않은 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해결하고 있는 중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 서로 마주보며 웃고 친밀한 스킨쉽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세워주는 일은 결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사람을 세우는 법 - 인내란 다른 사람에게 성장할 시간과 여지를 충분히 주려는 마음을 뜻한다...인내는 관계의 윤활유이다. 관계에 긴장감이 돌 때 인내심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바로 들쑤시지 않는다...친밀한 관계에서는 적절한 지적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충분한 인내가 있어야 한다. p.186
인내를 동조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인내는 다른 사람의 미숙한 모습이나 무책임한 행동을 모르는 체하는 것이 아니다. 인내란 사람마다 성장의 시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p.187
바울은 우리에게 실족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끝까지 충실할 것을 명하고 있다. 성경은 세상에서 고생하는 연약한 사람들에게 보호의 손길을 내밀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다. p.194
세워주는 관계에는 용서가 필요하다. - 용서란, 관계에 상처가 생겼을 때 그 일로 인해 상대방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로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잊어버리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긍휼을 베풀기로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용서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그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용기가 필요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용서란 스스로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바라보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p.202
용서에 대한 이런 구절들을 보며 생각하는 것은,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정말 용서가 안되서라기 보다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 먹지 못해서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싫은 것 뿐이지 어쩔 수 없이 용서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누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싶겠는가. 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준 누군가는 그냥 계속 미워하는 편이 더 편하다. 용서하겠다 마음 먹으면 그때부터 심적 갈등은 더 거세진다. 마음 속 자아와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은 아우성을 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용서하겠다고 마음 먹는 것이 가능할까? 그 질문은 또 다시 예수를 가리킨다. 예수의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용서를 하기로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부분이고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한 용서와 고백이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마지막 두 챕터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친밀함을 추구해야 할 부부 관계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밖에서 아무리 인간관계를 잘 맺고 인격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는 사람이라도 가정에서 특히 배우자에게 그런 평가를 받지 못한다면 이중인격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실상 많은 사람들은 가족이 편하다는 이유로 배려의 대상에서 더 자주 제외시키고 소통의 대상에서 밀어놓고 있다. 나 역시 내 모습을 가장 잘 아는 가족들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주고 받아 왔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어느새 포기하여 덮어버리고 외면해 오고 있었던 중이다. 신앙을 가진 가족들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막연하게 동의하는 것은 바로 가까이 내가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과 이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하지 못한다면 결국 외부적인 인간관계에서는 더더욱 희망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 부부는 결국 부부간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와 아주 유사하다고 결론 짓는다. 태초에 완벽한 가정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서로의 관계에서도 투명함을 상실하고 상대에게 책임을 떠 넘기는 불화가 시작되었던 것처럼. 예수의 모습을 따라 서로를 용납하고 세워주기로 결심하면서 태초의 하나되었던 모습을 회복해 나가기로 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의미할 것이고,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회복을 맛볼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내 주변의 사람들과 화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 돌고 도는 상관관계속에서 필요한 것은 지금 그렇게 하고자 시작하려는 결단과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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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것은 책을 읽어내려가며 그 동안 가졌던 불신 (내가 과연 변할 수 있을까?), 의심 (과연 진정한 인간관계란게 가능할까?), 분노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피해의식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든 사람이야, 아무도 날 이해할 수 없어) 따위와 신앙의 본질적인 질문들이 조금씩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절대 해결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내 어두운 마음이 조금 위로를 받았고 움직여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고집스런 자아는 모임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씩 연습해 가며 원래의 모습을 회복해 가는 것 같았다. 이 가을에 변화를 일으키는 책을 만난 것 같다. 우연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지인들에게 위로가 되고 성장의 발판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에 희망을 가지게 된 것. 조금은 다른 방식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열려 있었던 예전의 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느낌. 그저 한순간의 느낌이나 잠깐의 결심이 아니라 계속 이 길을 묵묵히 가기로 결단하려면 그 중심에는 분명히 예수가 있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분명해 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