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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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들이라면 나 같은 사람도 - 여기서 '나'같은 사람이란 '소설'을 잘 못 읽는 사람이란 뜻이다- 읽을 만 하겠다 싶었다. 차 안에서 읽어도, 집 거실에 앉아 읽어도, 침대에 누워 자기 전에 읽어도 어디에서나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난 내 삶이 소설인데 남의 이야기 따위 읽고 싶지 않다고 은연중에 '다른 이의 이야기들'을 거부했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사회 현실을 고발한다거나 우리의 내면을 돌아본다거나 하는 명목 하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까발려지고 드러내지고 심지어는 과장되어지고 부풀려지는 지금 같은 시대엔 더더욱. 영화를 잘 보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난 내 삶의 이야기가 풀어내는 이면의 의미 따위에 집중하느라 '다른 이야기'에 귀 기울일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조금 여유있어졌나 싶었졌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난 소설을 읽을 때가 되었구나 싶었지만 지금 돌아보니 꼭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궁지에 몰린 사람이라는 의식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건 객관적으론 맞지 않는 말이다. 가족 모두 건강하며 평안하고 딱히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가 없는 현 상태에서도 난 항상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다. 과거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는건 아닐까, 과도한 집착으로 인한 피해망상인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오지도 않을 미래에 대한 불안증 같은 것인가 싶기도 하고......확실한 건 여전히 난 여유가 없다는 거다. 내면적으로 외면적으로 모두 다.

 

신경숙의 <모르는 여인들>은 그렇게 돌아볼 여력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겐 딱 좋은 이야기들이다. 딱 좋은 이야기일 뿐 아니라 덩달아 위로 받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들이다. 물론 이 곳에도 어김없이 상처입고 소외되고 세상의 끝에 몰려 나뒹굴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것도 모양과 색도 다른 일곱 가지의 이야기들을 안고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봤을 때, 내가 읽어야 할 책은 아닐 것이라 밀어냈었다.

 

 

<극단적인 고립>, <우울하고 고독한 시대>, <지독한 세속적 일상>....

 

한 번 흝는 리뷰들 속에 등장하는 이 낱말들은 여타 다른 단편 소설들과 다를 바 없을 거라는 선입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내 삶에도 등장하는 것들이다. 하나 새로울 것들이 없다. 오래 사귄 연인에게서 이별 통보를 받은 후 말을 잃은 여자나, 동경하던 이가 정신지체가 되어 버린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바쁜 누군가나, 희대의 살인마에게 가족 모두를 처참하게 잃고 나락을 빠진 어떤 이나, 교통사고로 고립되어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한 남자나, 명확하지 않은 이별의 순간을 오랜동안 마음에 품은 어떤 이들이나, 가장 가까운 아내의 암 소식으로 인해 괴로워 하는 그 남자나....그들은 내 모습이기도 하고 주변의 흔한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내게 뻔한 자극과 충격을 주는 대신 은근한 울림과 위로를 준건, 작가가 이런 비극이나 삶의 과정에 집중하고 있지 않아서인 것 같다. 너무나 일상적인 것처럼 덤덤하고 간결하게 묘사하는 그 흐름이 내 거부감을 없애 주었다. 그래서 삶의 모습과 겪은 일상은 다르지만 결국 그 안에서 그네들이 느끼고 있는 모순과 답답함과 절망은 내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들게했다. 무겁지만 무겁기를 거부하고, 절망적이지만 겉으론 평온하기를 애쓰는......신경숙 작가가 구사하는 언어들은 구차하고 지리하게 나열하고 묘사하는 대신, 짧은 언어로 그들의 말과 마음과 분위기를 대신하고 있는 듯 하다. 7편의 단편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침묵함으로 자신의 고통을 대신한다. 뱉어내고 질러 버리고 고함치는 대신 그들은 조용히 감내하며 돌아보며 자연스럽게 털어내는 과정을 거친다.

 

상처 입은 사람은 또 다른 상처 입은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다고 하던가...이곳에서 주인공들은 또 다른 '나', 또 다른 소외된 존재들에게 위로를 얻고 치유받는다. '치유'와 '회복'과 '구원'의 과정이 녹아져 있다는게 참 좋았다. 사실은 참으로 얼토당토 않을지 모르는 신화적이고 환상적인 장치들이지만, 주인공들은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도 아닌, 그러니까 어쩌면 일어날 지도 모를 그런 기적과 같은 일들 때문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착한 소설>이라는 느낌은 아닌데, 그들은 착한 과정 속에 녹아져 있다.

 

오래된 연인의 일방적인 통보로 말을 잃어버린 그녀가 오래 전 죽은 한 여인이 손수 차린 식탁을 마주 하며 입맛과 삶을 찾게 되는 이야기. 언뜻 이 이야기는 말도 안되는 환상이 아닐까 싶지만, 이 소설의 맥락에서 이건 환상이 아니라 현실처럼 느껴진다. 당연히 그렇게 위로받고 회복되어져야 할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그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서로를 위로하고 일으켜준다. 그리고 그게 참으로 자연스럽고 따뜻하게 느껴지게 하는 힘, 그것이 신경숙 작가의 단어들이 아닐까 싶다.

 

 

<절대화하지 않는 고통> <서로 함께 존재함> <신화적인 체험> <절망의 극점에서 발견되는 구원의 빛>

 

삶이든, 인간관계든 어떤 기점이 되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건 논리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사실 내 삶도 그런 일들 투성이다. 오늘같이 아침부터 흐린 날씨로 인해 오전 내내 우울하다가도, 방금 반짝 베란다 가득 넘치는 햇살로 인해 갑자기 오후 약속에 대한 기대가 한껏 생겨버렸다던지, 우연히 펼쳐 든 책 속에서 발견한 오래된 메모 같은 것들 - 그런데 그게 지금 내 상황에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던지 하는-도 그렇다. 이건 흔히 겪게 되는 일들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잠깐 생각했는데 그 사람에게 점심을 같이 하자는 전화를 받는 것도,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동시에 집어드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도....우연이고 상상일 수 있지만 현실이고 현재가 되는 순간들.

 

그 순간들은 이 단편 소설 속 절망적 주인공들에게도 한결같이 일어나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쉽게 거부하고 쉽게 단정짓는 세상에서 쉽게 긍정하고 받아들여주는 '네'라는 한 마디에도 그들은 얼마나 쉽게 회복이 되는가......그런 순간은 이야기들을 읽는 나에게도 전달되어 마치 함께 그 순간을 겪는 것인양, 내게도 위로와 기쁨을 준다. 그래서 어떤 이에게는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이야기들이 나에게는 하나의 작은 신화적 순간이 되어 참으로 친근하게 다가왔다.

 

어떤 한 구절 속 <무거운 고독>이란 단어가 책 전체에 스며들어 책이 마치 비오는 날 구름처럼 축축하고 묵직하게도 느껴졌지만, 다 읽고 덮은 순간은 반짝 햇살에 바짝 마른 낙엽처럼 조용하지만 가벼웠다. 내 마음도 절망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은 사람답지 않게 따뜻하고 충만한 감성으로 가득찼다.  그것만으로도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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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2-03-28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한민국에서 자녀를 키우며 사는 40대 부모가 책을, 그것도 소설을 읽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이렇게 훌륭한 리뷰까지 쓰시다니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3-28 23:25   좋아요 0 | URL
아....이게 대단한 일이었군요..ㅎㅎㅎ
훌륭한 리뷰라뇨. 맨날 쓰지 못하고 맴맴 돌다 뱉어내는게 부끄러워요.
활기찬 포핀스님 보고 운동해야 겠다 마음 먹는 요즘이예요~ㅎㅎ

아이리시스 2012-03-2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햇살과 가을낙엽 그리고 사람의 체온까지 모두 다 들어있는 리뷰예요!

현맘님, 뭐가됐든, 여기에 더해 제 위로도 더해드릴게요. 화이팅!!!^^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3-28 23:26   좋아요 0 | URL
아프지마요~건강해야 해요!
아이리시스님의 위로에 간절함을 더 보태 다시 돌려드릴께요. 얼른 털고 일어나세요.

그리구요.....일 치신거.....그거 뭐예요? 궁금...궁금...ㅋㅋㅋㅋ

비로그인 2012-03-28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글 올리신걸 보니 좋아요. 소설 리뷰인 것도 좋구요.
저는 그래서 소설이 좋더라구요. 소설은 위로에요. ^^

오늘은 바쁘고 스트레스 받는 날이었어요. 게다가 내일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그래서 위로를 위해 장바구니에 책을 넣다 뺐다 하는 중이에요. ㅎㅎ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3-28 23:27   좋아요 0 | URL
소설이 위로군요....그러니까요. 소설 많이 읽고 좋아하시는 분들 보면, 참 좋아보여요. 전 그렇질 못해요. 아직 퍽퍽하게 남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런가봐요.

스트레스 받으면 안 좋은데...그럴때 알라딘은 참 좋은 스트레스 해소처긴 해요. 저도 지름신이 오시면 알라딘 쇼핑이 1순위이니까요...그래도 뭐...빽 같은거 사는것 보단 낫지...않을까요?ㅎㅎㅎ

프레이야 2012-03-28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패스하고 있었는데 현맘님의 리뷰가 확 지름신을 불러요.
담아갈게요.
무거운 고독이 읽고나면 가벼워진다니 끌리고, 그래도 신경숙이니 끌리고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3-31 10:28   좋아요 0 | URL
이 책 구입하셨어요? 몇몇 단편은 몇 번 읽어도 좋을 것 같던데...
전 신경숙씨 책은 깊은 슬픔 이후엔 단 한편도 없었어요. 워낙 소설 잘 안 읽기도 했구요.
그냥 요새는 머리 많이 써야 하는 인문학책보다는 마음으로 읽는 소설에 자꾸 눈이 가네요..ㅎㅎ

신지 2012-03-29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를 부탁해를 사놓고 아직 못 읽었는데 너무 많이 알려졌고
단편 모음인 이 책을 살 걸 그랬네요. (리뷰가 좋아서..)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3-31 10:29   좋아요 0 | URL
엄마를 부탁해는 저도 있어요. 선물 받았는데 안 읽어봤다죠.
가족에 대한 소설은 더 읽기 힘들어요.ㅎㅎㅎ
전 단편 소설이 부담없고 좋더라구요.
잘 지내셨죠?^^

마녀고양이 2012-04-0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현맘님은 제 맘에 들어갔나 나오는 분 아닐까?
어쩜 이렇게 쏙쏙 다가오고, 똑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지...

저도 가족 소설 읽기 힘들어요. 감정에 끌려다니는 소설은 더욱 힘들구요....
힘든 일이 가득한 세상에서, 푹 들어앉아, 더욱 울부짖는 책은, 정말 힘들어요.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좋군요.... 한발 떨어져 나를 객관화시키고 타자를 객관화시키며, 사소한 행복을 즐기지 않는다면
어찌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싶어요... 사실, 행복한 일들도 참 많은데 그걸 자꾸 까먹게 되니까 말이죠.

잘 지내시죠? ^^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4-04 09:25   좋아요 0 | URL
마고님이나 저나 가족 안에서 받았던 느낌이나 상처의 골이 비슷한 무게인 것 같아요, 우리 내면의 어린 아이도 그렇고 현재의 내 모습도 그렇고...아무래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단 생각 들어요.

우리 같은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사소한 행복을 잊는다는거죠..ㅎㅎㅎㅎ 저도 그래요. 문득 참 행복한 환경이구나 하기도 하지만, 그건 금방 잊혀져요. 온갖 불안과 두려움과 조급함이 금새 사로잡는데 참...어렵죠?

잘 지내요. 큰 아이가 중학교 가서 아침밥 해 먹이고 데려다 주고 나면 하루의 진이 다 빠지는 것 같아 요샌 그냥 조용히 지내요. 그래도 하루하루 큰 기복 없이 잘 지내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