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지만지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시리즈 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정아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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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독서를 게을리했다. 핑계를 대자면 올해 들어서는 독서보다 운동을 더 많이 하고 있어서 그렇다. 나날이 바뀌어가는 몸의 변화를 보는 재미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것이 독서의 재미를 훌쩍 뛰어넘고 있어서 어차피 자주 못 읽을 거면 벽돌책이나 읽자 싶어 고른 게 <죄와 벌>이다. 심사숙고한 끝에 ‘지만지‘에서 나온 번역본으로 골랐는데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어지간해선 번역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편인데, 김정아 역자의 글은 내내 감탄하면서 읽었다. 뭐 그건 그거고, 사실 지금 리뷰쓰기가 너무나도 막막한 상태다. 맨날 야금야금 읽어대서 그런지 메인 스토리만 기억나고, 그밖에 서사들은 부분적으로 떠올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도스토옙스키의 리뷰만큼은 신경 좀 많이 써주자 했었는데 안되겠다. 빠른 포기.


워낙 유명해서 요약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적어보자면, 법대생 R군이 전당포 노파와 동생을 살해하고 도망친 뒤에 평범한 시민인 척한다는 내용이다. 나는 주인공이 쭉 양심의 고통을 받다가 큰 시련을 겪고 개과천선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주인공을 교만한 다크 히어로와 마음만은 따뜻한 츤데레 빌런의 중간지점에 놓아두었다. 그리하여 정신이 왔다 갔다 해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가 탄생된다. 그는 잘못된 사상과 헛된 정의감에 심취하여 본인의 행적을 정당화하기에 바쁘다. 물론 이런저런 고뇌에 빠지긴 했지만 내가 기대했던 선과 악의 대립하고는 모양새가 많이 달라 아쉬웠다. 듣자 하니 성경 속 인물에서 모티브를 따온 터라 어쩔 수 없었겠구나 싶다. 빠른 납득.


노파의 살인 사건이 초반부에 나와버려, 이 많은 분량을 대체 무엇으로 채웠을까가 가장 궁금했다. 근데 어랍쇼, 사건의 후폭풍 장면은 금방 사라지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버리는 게 아닌가? 난 뭔가 살인자의 위태로운 양심고백과 선에 대한 집착 같은 내면의 고군분투를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근데 읽어보면 알겠지만 R군이 구제불능 사이코패스 같은 인물도 아니며, 오히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사회를 생각하는 썩 멀쩡한 청년으로 나온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의 태연함과 고상함이 흡사 물과 기름처럼 느껴졌달까. 딱히 두 자아의 공존까지는 아닌데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이 더 큰 것도 아니었으니, 고것 참 저자의 의도가 아리송송했다. 그러다 제2의 주인공인 소냐가 등장하면서 R군이 누군가의 도약을 위한 촉매제 역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려 1866년 작품이던데 어떻게 이런 구도를 짤 생각을 다 했을까. 그저 놀라운.


가족들을 먹여살리려 매춘부가 된 소녀. 자신의 등골을 뽑아먹는 가족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소냐는, 이 거칠은 러시아 땅에서 홀로 남은 신실한 기독교인이라 하겠다. 술독에 빠진 소냐의 부친이 사고로 죽자, R군은 없는 돈 다 털어서 장례비를 마련해 주고, 이를 계기로 소냐와 가까워지게 된다. 소냐의 남다른 심성을 구원의 빛줄기로 받아들인 R군은 마침내 커밍아웃을 시도한다. 이로써 매춘부가 된 기독교인과 살인한 법대생의 동맹 비스무리한 감정이 생겨나고, 비록 말은 안 했지만 서로가 자신의 유일한 출구임을 인지한다. 그러는 한편, 자신의 허물을 모조리 받아주는 소냐를 보며 ‘이건 또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 소냐를 밀어내고 전처럼 고독한 은둔자로 돌아가 세상을 왕따시키는 주인공. 대체 그녀에게서 뭘 얻겠다는 거냐면서 계속 멘붕과 현타를 반복하는 그의 원맨쇼가 쭉 같은 패턴이라 솔직히 질려버렸다. 이게 다 원고량이 많을수록 돈을 더 벌 수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이해는 한다만, 분량 조절 실패의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R군은 자신이 짊어진 죄의 형벌에서 어떻게든 해방되고 싶어 안절부절이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였고, 자수할 마음을 먹다가도 무너지기 일쑤였다. 이렇듯 그에게도 선한 양심은 남아있었지만 생존본능과 방어기제가 모든 걸 누르고 앞질렀다. 그렇게 자신의 범죄가 인류의 진보를 위한 첫걸음이자 밑거름으로 여겼다. 또한 그는 국가의 혁명을 위해 적들을 죽여나간 나폴레옹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그런 사상에 입각하여 자기가 ‘이(벌레)‘를 제거했다고 생각한다. 죽은 노파가 무슨 사회의 악이라도 된다는 것마냥. 그러나 죄 없고 선한 노파의 동생의 죽음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동생과 친했던 소냐한테라도 사죄해서 해방감을 느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소냐의 심성이 성직자 뺨칠 정도로 거룩하고 정결해서, 이거 잘못 건드렸다간 무신론자인데도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만 같았으니 그냥 발뺌할 수밖에 없는, 참으로 모양 빠지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쯤 되면 결말은 다 정해져있는데 계속해서 겉도는 상황들이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몇 번 더 재독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려나.


두 주인공이 저지른 죄에 대해 말해보자. 해설에서 R군의 죄는 법률·법규를 위반한 ‘Criminal‘이고, 소냐의 죄는 도덕·윤리를 배반한 ‘Sinner‘로 분류했다. 명백히 전자가 더 악랄하다고 할 수 있는데 <죄와 벌>은 후자 쪽에 무게를 두고 있어, 자칫 논란거리가 되기 쉬운 작품이다. 물론 끝에 가서는 R군이 자수하고 시베리아로 가서 수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죗값을 치르는, 나름의 권선징악이 실현되기는 한다. 죄에 빠진 R군이 소냐로 인해 교화되고 거듭나는 이 과정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얻고 구원에 나아감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R군의 죄와 고통을 함께 감당하고 짊어진 소냐는, 인류를 구원하러 나타난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서사가 탄생된 배경에는 도스토옙스키가 실제로 수년간 유배생활을 하였고, 그 기간 동안 읽었던 신약 성경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성격은 <죄와 벌> 전과 후로 나뉜다고 했다. 이전까지도 인간의 심리를 파고들며 삶을 움직이고 결정짓게 하는 요인에 대해 다뤄왔지만, <죄와 벌> 이후부터는 그의 세계관이 현실을 벗어나 영의 세계로 뻗어감을 알 수 있다. 표현 그대로 신들린 듯한 글쓰기가 시작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죄와 벌>에는 두 사람 말고도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글이 길어질까 봐 다른 내용들은 리뷰하지 않았는데, 개인적으로 R군보다 여동생의 혼사 이야기 쪽이 더 흥미로웠다. 아무튼 손가락 가는 대로 끄적거리긴 했는데 영 실망스러운 글이 돼버렸다. 훗날 재독하게 되면 제대로 칼을 간 리뷰를 써봐야겠다. 근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장담은 못 하겠다. 자 그럼 다시 쇠질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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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4-02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맘 알 것 같습니다. 같은 경우는 아니겠사오나 전 오랫동안 다리 관절이 안 좋아서 이러고 살아야하나 좀 우울했는데 요며칠 전부터 스트레칭 효과를 보는지 정말 오랜만에 내 다리로 걷는 기분입니다. 저한테도 이런 때가 오다닛! 그러니 물감님은 어떠시겠습니까? ㅎㅎ
홍대화 거로 오래 전에 읽었는데 채수동 것도 좋다고 해서 사 놓고 읽지는 않고 있습니다. 저란 인간은 참...ㅠ
이 번역본은 그냥 눈에만 담이둬야 할 것같습니다.

물감 2024-04-02 16:57   좋아요 1 | URL
저도 교통사고 때문에 몸이 진짜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요, 이 악물고 살을 빼고 근육을 키워놓으니 정말 살맛 납니다! 체력도 급 늘었어요ㅎㅎㅎ 그래서 독서랑 멀어지고 있지만요...

번역본이 많을수록 오히려 고르기가 어렵더라고요. 게다가 싸지도 않으니 더 신중하게 되더라는ㅎㅎ 언젠가는 읽지 않을까요? 계속 눈팅은 해두셔요😎😎😎

페크pek0501 2024-04-16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죄와 벌을 두꺼운 전집으로 30대 초반에 읽었는데 큰 충격을 받았었죠. 전당포 노인 같은 사람을 죽이면 모든 빚이 청산되니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 주는 일이 되는 것이 그럴 듯해 충격, 결국 주인공이 구원을 받는 대상이 매춘부라는 사실에 충격. 신선했어요. 그때만 해도 제가 젊고 순수했는지라 감흥을 느꼈죠. 저에겐 이 책이 재독할 책 리스트에 있어요. 그 두꺼운 분량을 무엇으로 채웠는지 다시 살펴보고 싶어서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물감 2024-04-16 22:33   좋아요 1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완독에 서평까지 오래걸린만큼 보람도 있네요 ㅎㅎ
저는 성경이 모티브인 작품들을 참 좋아하는데요, 그래서 이 작품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요. 물론 서사 자체만으로도 인상적이긴 하구요. 이 책을 포함해 많은 고전들이 젊어서 읽기엔 절반도 흡수하지 못할 듯해요. 그래서 꼭 재독했으면 싶지만 읽어야 할 책들이 넘쳐나므로, 저는 나이들고 읽어서 차라리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자주해요 ㅋㅋㅋ 페크님 재독한다면 요 지만지 버전으로 하세요. 번역이 정말 훌륭합니다!
 
바다와 독약 창비세계문학 28
엔도 슈사쿠 지음, 박유미 옮김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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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활동을 해온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다독가는 아니지만 공백기 없이 활동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몇 차례 얘기했듯이 나님은 쓰기 위해 읽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많고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들 할 텐데 글쎄, 나는 인풋을 꼭 책으로만 집어넣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풋이 압도적으로 많아야 쓸만한 아웃풋이 나오는 건 맞는데, 그 출처가 반드시 책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글쟁이들은 잘 알 텐데, 글이 안 써지는 원인은 사고의 확장이나 발상의 전환이 부족한 탓이 크다. 그러니 다양한 분야의 데이터를 습득하여 유연성과 개방성을 길러야만 한다. 개인적으로는 프레임을 넓히는 것보다 깨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쉽지는 않다.


한편 꾸준하게 쓰는 데도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 분들을 자주 본다. 욕심도 있고 진정성도 느껴지는데 발전이 없는 분들을 보노라면 딱한 마음이 든다. 대개 이런 분들은 평범한 걸 선호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하는 흔한 문장과 표현을 못 버린다는 게 특징이다. 단지 쓴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모를까, 나름 글쓰기에 진심인데도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하니 이 얼마나 속상한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근육통이 싫어서 힘들지 않을 만큼만 훈련하는 선수한테 무엇을 기대하겠느냐고. 따라서 모든 글쟁이들은 평범함을 거부하고 좀 더 치열하게 써야 한다. 남들이 자신의 글에 ‘기대감‘을 갖고 클릭하게끔 만들어줘야 한다. 그리하여 기계적으로 좋아요를 받기 보다, 즐겁고 유익하게 느껴져서 좋아요를 받는 글과 문장이 되어야 한다. 나 역시 그렇게 되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며, 당신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참 오랜만에 일본 고전문학을 읽었다. 나쓰메 소세키, 마쓰모토 세이초, 다자이 오사무 등등 옛 일본의 문학 감성들은 영 안 맞아서 손 뗀지도 한참 됐다. 대체로 건조한 문체인데다 지루한 문장 구사가 많은 탓이었다. 아니면 스토리텔링에 높낮이가 없다거나. 그냥 한 번 더 속아주자는 마음으로 고른 <바다와 독약>은 전혀 예상 못 한 잭팟이었지 뭔가. ‘신‘에 대해 일평생 연구했다던데, 생각보다 종교의 색채가 짙지 않았고, 내적 고통을 넘어선듯한 저자의 아웃풋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이처럼 한 주제에 천착하는 작가들은 완성도와 작품성 그리고 대중성까지, 세 마리 토끼를 잡는 경우가 많은데, 잘 생각해 보니 이들만큼 치열하게 쓰는 타입도 없는 듯하다. 이와 같은 자세가 아니라면 1만 시간의 법칙조차 말짱 도루묵일 것이다. 그러므로 평범함에 익숙해지지 말자.


<바다와 독약>은 생체해부실험을 한 의료진의 민낯을 다루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경, 공습이 빗발치는 한 도시의 대학병원에는 매일같이 응급환자들이 실려온다. 진료 한 번 못 받고 죽어가는 환자들과, 감정이 거세된 직원들 사이에서 혼자 괴로워하는 스구로 의사. 동기의 말대로 의사에게 감정놀음은 한낱 사치일지 모른다. 더구나 지금은 전시상황이지 않은가. 결국 될 대로 돼라였지만 비인간적인 의료진의 만행은 참으로 못 봐줄 지경이었다. 수술 도중에 죽은 환자를, 수술 성공 후에 죽은 것으로 위장한 것도 그렇고, 공습으로 죽을 바에야 실험체로써 사회에 공헌하는 편이 더 낫다는 말들도 가증스러웠다. 그 와중에 윗사람들은 의학부장 선거를 생각하느라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 환자들의 목숨보다 중요한 밥그릇 싸움이라니. 그러나 이것이 의료계의 현주소였고, 한배를 탄 스구로 또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속의 무수한 적신호들을 외면한 채로.


2부에서는 한 간호사의 수기가 나온다. 중국인 남편에게 버림받고 간호사로 복귀한 그녀는, 종종 병원을 들리는 부장 의사의 백인 아내를 보게 된다. 간호사 출신의 사모님은 이것저것 환자들을 챙겨주곤 했는데, 정작 그 수고와 배려가 모두를 불편케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반대로 이 천사표 사모님의 남편은 환자를 위하기는커녕 죽든지 말든지 선거만 생각하는 냉혈한이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성질의 두 사람을 한 세트로 묶어놓다니, 이것 또한 신의 장난질일까. 만약 신이 존재치 않는다면 이런 아이러니를 대체 무슨 수로 설명한단 말인가.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늘 변함없이 나를 지켜보는 저 검푸른 바다. 어쩌면 신은 그곳에 서서 우리를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은 스구로의 동기인 T가 쓴 수기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들의 점수를 따내는 일에만 움직여왔다. 계산된 행동 하에 결과만 괜찮다면 비양심적, 비도덕적일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러다 자신의 ‘척‘을 발견한 전학생의 비소에 그만 무너져버린다. 전학생이 이사가고 본 캐릭터로 돌아온 T는, 아무렇지도 않던 계산된 행동들에 허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내용은 일본인에게 결여된 ‘죄책감‘을 꼬집어주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해설에서도 얘기한 바, ‘죄의 문화‘를 지닌 서양인이 죄의식에 따라 행동하는 반면에, ‘수치의 문화‘를 지닌 일본인은 발각되지 않은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슈사쿠는 일본인의 결함이 신의 부재로 생겨난 것처럼 보고 있다. 그러니까, 신의 손길을 뿌리친 민족의 당연한 결과라는 얘기다. 아무튼 종교를 떠나서 욕먹을 각오로 자국민을 디스 한 저자에게 삼삼칠 기립 박수를 보낸다.


이제 다 끝났으니 조금만 더 참아주시라. 대망의 3부에서는 미군 포로들을 데려다가 생체해부실험에 들어간다. 그리고 스구로는 어영부영 참여했다가 뒤에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한다. 이 실험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닌, 생명이 언제쯤 끊어지는가를 알아내는 게 목적이었다. 말 그대로 의학 발전에 공헌하는 일일 진대, 저 바깥양반들은 수술 장면을 보면서 왜 낄낄대고 있는 걸까. 무언가 한참 잘못됨을 느꼈지만 그래봐야 자신도 저 무리 중 하나란 사실에는 변함없었다. 혹여 피해 갈 수 없다면 차라리 동기처럼 기회를 잡고 라인 타는 게 맞을 수도 있다. 허나 이런 생각의 결과가 오늘날의 일본을 만든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생각해 보라. 지금도 일본은 과거의 만행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모든 바탕에는 나만 좋으면 장땡이라는 사고가 깔려 있는데, 이것마저도 일본을 따라가는 한국 사회의 앞날이 걱정되기는 한다. 아무튼 잘 읽었고, 슈사쿠의 작품들은 좀 더 둘러볼 생각이다. 것보다 의사 파업이 한창인 때에 읽어서 그런가, 기분 참 멜랑꼴리 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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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3-03 2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평가 10년의 물감님 대단합니다~!! 글을 잘 쓰시는 비법이 있으시군요~!!
전 그냥 책이나 읽는걸로 해야겠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그저 사랑입니다 ㅋ 이 책에서 나오는 생체실험 내용 때문에 읽기 힘들더라구요...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감 2024-03-04 10:41   좋아요 1 | URL
저도 초반에는 10줄도 안쓰던 사람이었는데ㅋㅋㅋ제가 이렇게 글쓰기를 좋아하게 될 줄 정말 몰랐어요. 그래봐야 서평에 한해서지만요 ㅋㅋ

한 때 서재에서 슈사쿠 붐이 일었었죠? 왜 열광했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느낌있는 작가네요. 근데 이 책은 난이도가 낮은 편이라던데요ㅋㅋㅋ 다른 책들도 궁금해집니다.

은오 2024-03-04 20: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이랑 저도 취향 은근 다르군요. ㅋㅋㅋㅋㅋ 물감님이 다자이오사무랑 소세키 감성 안좋아하시는거 처음 알았읍니다. 저는 최근에 다자이오사무 사양 좋게 읽었고 인간실격은 다시 읽어도 좋더라고요. 소세키 마음도 좋았어서 다른 작품들 읽어보려고 드릉드릉 ㅋㅋㅋ
그리고 10년 대단하시네요. 말이 10년이지 진짜 저도 속으로 박수..🫢🥹 쓰기 위해 읽으긴다는 것도 신기하고요. 전 읽는게 너무 재밌어서 읽기만하고싶어요!!ㅠㅋㅋㅋㅋㅋ

물감 2024-03-05 15:10   좋아요 1 | URL
은오 님 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취향이 겹치지 않을걸요ㅋㅋㅋㅋ 이곳 분들은 다들 교양있고 점잖으셔서 저 혼자 좀 튀어보일 때가 많아요. 그냥 돌연변이인갑다 하세요 ㅋㅋㅋ
읽기만 하는 것도 당연 좋죠. 글쓰기는 안 해도 되지만 독서를 안 하는 건 죄악입니다 ㅋㅋㅋ 그리고 10년 그까이거 별거 없어요.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걸 즐기다보니 여기까지 온거죠 뭐. 저보다 오래된 고인물이 이곳에 얼마나 많습니까 하하하.
은오 님의 재능을 알지만, 저는 은오 님한테 글 쓰라고 압박하지 않을 거에요. 자기가 원해서 하지 않으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지금처럼 열독하고 댓글러로 지내셔도 충분합니다 ㅋㅋㅋㅋㅋ

페크pek0501 2024-03-19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고 느낀 점 : 좋은 책을 읽으면 서평을 잘 쓴다는 것.
글을 잘 풀어가셨습니다.(감히 내가 평가해도 된다면.)
물감 님이 이렇게 잘 쓰시는 분이었나, 새삼 깨달음.
책도 훌륭하네요. 시점을 달리해서 쓰는 것,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고 흥미롭거든요.
서재 운영 10년 되셨군요. 저는 15년째예요. 제가 선배임. 하하~~

물감 2024-03-19 20:35   좋아요 1 | URL
글을 올렸으면 칭찬이든 비난이든 달게 받아들여야죠. 감히 되고 안되고가 어딨나요ㅋㅋ 말씀대로 좋은 책을 만나야 좋은 글이 나오더라고요. 평소 품고있던 생각과의 교집합이 클수록 풍성한 글이 만들어지는데, 이 재미 또한 글쟁이들만 아는 것이겠죠😀 그나저나 페크님도 오래 계셨네요. 이런 선배님들이 있어주셔서 저도 실력이 늘은 거겠죠? 언제나 건필하시길요🤩
 
파문
필립 지앙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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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지앙과는 이번이 첫 만남인데 영 좋은 인상이 못되었다. 독자들의 찬사와 출판사의 소개 글에 또 속았다. 예전 같았으면 눈 뒤집혀서 팩폭하고 까대기 바빴을 텐데, 이제는 기력도 없고 시간도 아깝고 해서 혹평은 잘 안 하게 된다. 물론 비평도 좋지만 매번 삐딱한 눈으로 작품을 대하기도 썩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나 <파문>은 좋게좋게 넘어가 줄 수 없는 수준이어서, 오랜만에 전투 모드가 되어 잘근잘근 씹어보겠다.


50대의 문학 교수인 마르크. 원나잇 파트너가 다음날 죽어있자, 자신만 아는 산속 동굴 속에 시신을 유기하는 것으로 서막을 연다.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가 눈에 훤했으나, 내 예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진행되어 대략 낭패였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고, 실종된 학생(파트너)에 대한 내용도 쏙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이야기는 학과장과의 신경전과, 친누나의 들들 볶음, 그리고 파트너의 계모와 눈 맞음, 이 세 가지 내용으로 굴러간다. 마르크는 학과장의 계속된 경고에도 교칙을 어기며 학생 및 학부모와 몸을 섞어댄다. 그는 섹스만큼이나 작법을 중요시하고 있는데, 통제 안되는 수컷 짐승이 그런 말 해봤자 와닿지도 않고 말이다. 여튼 살인 용의자로 몰린다거나, 추문으로 학교서 쫓겨나게 되는 전개를 바랐는데 그냥 섹스 신으로 질질 끌다가 끝나버렸다. 어이 상실.


범죄현장이 된 동굴은, 자신을 구해준 누나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로써, 아직도 시스터 콤플렉스에 매인 마르크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온다. 정말 그게 다여서 실망스러웠다. 이어서 죽은 학생을 수소문하던 경찰도 결국 죽어, 마르크가 동굴에 또 집어넣는다. 헌데 두 사람이 대화하다가 다음 장에서 갑자기 죽어있는데 이 무슨 황당함인가. 파트너도 그렇고 경찰의 죽음도 그렇고, 저자는 가장 중요한 장면을 죄다 생략하고 있다. 이런 의도적인 장치가 몇 번 더 반복되는데, 그렇게 싹둑 잘라내니까 맥락이 계속 틀어져 버린다. 때문에 번역자도 고생 좀 했나 보더라. 난 이처럼 독자한테 습관적으로 떠넘기는, 무책임하고 불친절한 스타일을 아주 경멸한다. 사실 작가보다도 무조건 오냐오냐해주는 독자들이 더 문제지.


부모의 학대, 포기한 소설가의 꿈, 사랑을 못 느끼는 옴므파탈 등등. 주인공을 끝없이 방황하는 위태로운 캐릭터로 묘사 중인데, 하나같이 진부한 설정뿐이라 영 와닿지가 않는다. 게다가 머릿속은 온통 섹스로 가득 차있어, 방황이고 나발이고 간에 조금도 감정이입이 되질 않는다. 읽는 내내 프랑스판 하루키라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 아무튼 성격이 되게 어중간한 작품이었다. 차라리 범죄 스릴러 쪽으로 밀고 가던가, 아니면 불안한 자신과의 투쟁으로 가던가, 또는 아슬아슬한 스캔들 끝에 추락하는 스토리여도 좋았을 건데. 쯧쯧. 좀 더 쓰고 싶지만 졸려서 안되겠다. 영양가 없는 작품에 이만큼 썼으면 과분하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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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0
뮤리얼 스파크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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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살면서 영향력 좀 있다 싶은 인물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이들은 잘나가는 연예인 같은 파급력을 지녔다기 보다 주변인들의 호감을 사는 매력이 타고났다고 생각된다. 그게 선천적 본능일지, 후천적인 기교일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 열에 아홉은 무장해제되어 그 매력에 흡수돼버린다. 의심병 환자인 나님의 눈으로 쭉 살펴본 바 선한 영향력은 잘 없었고, 환심을 사는 일의 이면에서 불순한 의도만 여러 번 포착되었다. 이들은 상대의 니즈를 기가 막히게 파악하여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만능 재주꾼이다. 하여 어느 소속과 집단이든지 이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꼭 있는데, 잘 보면 하나같이 자기 검열이 안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생충한테 조종당하는 곤충과 다름없는 이 무리들은, 혹여 리더의 불순한 의도를 눈치채더라도 뭘 어쩌지 못한다.


여하간 절대 건강할 수가 없는 이런 주종 관계를 담백하게 풀어쓴 스코틀랜드 작품을 소개한다. 여학교 초등부 선생인 브로디와 간택 받은 6인의 제자들 이야기이다. 학교는 별난 교육방식을 고수하는 브로디를 이단아 취급하는 반면, 학급생들은 그녀의 스타일을 전심으로 지지해 주었다. 브로디 선생은 간단히 정의 내릴 수 없는 비범한 인물이었는데 뭐라 할까, 자만과 교양과 기품의 교집합에 위치해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똑 부러진 데다 눈치도 100단인 브로디의 제자 중 한 명인 샌디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6인의 제자가 어떤 기준으로 발탁된 건지 모르지만 브로디의 특별 교육으로 또래들보다 총명하고 재능 있는 모습을 갖춰나간다. 그 가르침에 뿌리내린 6인은 서서히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는데, 신기하게도 모두 다 브로디의 예견대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자신의 전성기니까 그것이 당연하다는 브로디 선생. 그처럼 전지전능한 브로디는 훗날 잘 키운 제자 중 하나에게 배신을 당하고 학교를 퇴임하게 된다. 설마 그녀가 호랭이 새끼를 키웠던 걸까. 브로디의 전성기를 끝내버린 X는 대체 누구였을까.


6인의 제자는 자아가 선명해진 뒤에도 브로디 안에서 한뜻을 품고 나아간다. 여태 막연히 맹신했던 제자들이 브로디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그녀의 남자 문제였다. 브로디는 과거의 연인 H와의 일들을, 세계사나 미술사의 한 장면들과 교묘히 섞어가며 들려주곤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영광을 높이고자 ‘내 사람‘을 땔감으로 갖다 쓰다니, 영 아니 될 일이었다. 이건 뭐 지나간 일이니까 그렇다 치고, 현재 브로디는 음악쌤, 미술쌤과의 어중간한 삼각관계 중이다. 말로는 연애할 생각이 없다지만 그들의 뮤즈는 되고 싶었던지, 두 남자의 집을 바삐 드나드는 브로디의 이중생활이 제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그래 이왕 들킨 거, 브로디는 제자를 하나둘씩 파견하여 두 남자의 마음을 떠보게 한다. 결국 음악쌤은 탈락하고, 미술쌤은 돌아가며 찾아오는 6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낸다. 각 모델마다 브로디의 얼굴을 하고 있어, 이건 뭐 대놓고 플러팅하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정작 그녀는 점찍어둔 제자를 그의 애인으로 꽂아 넣을 심산이었다. 이 역시도 브로디 자신의 전성기를 증명해 줄 또 다른 땔감에 불과했고, 그녀에게 저항이라도 하듯 X가 미술쌤의 애인 역을 차지해버린다. 대체 어쩌다 이 끈끈한 브로디 그룹에 균열이 생겼을까.


제자 중 유일하게 통찰력을 가진 X는 브로디 선생의 정치 성향을 꿰뚫어 보았다. 브로디는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지지하는 파시스트였고, 그 사상을 본인만의 교육 방식에 녹여서 학급을 지도한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물든 아이들은 각자의 미래가 그녀의 뜻대로 된 결과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게 다 브로디의 전성기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줄기차게 심어둔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내 사람을 다루는 방식‘으로 인해 브로디가 어떤 물밑작업을 해왔는지를 알 수 있었고, 뒤늦게라도 그녀의 만행을 멈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을 은폐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뒤에도 브로디와 제자들은 여전히 잘 만나고 지냈다. 어째서 X는 배신하고도 모르쇠 하며 브로디와 계속 어울렸을까. 그건 아마도 브로디에게 내렸던 뿌리 때문이지 싶다. 가지나 줄기는 잘라낼 수 있어도 뿌리는 뽑지 못하는, 이것이야말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의 무서움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화제의 인물을 만난다면 침 흘리고만 있을 게 아니라 그의 물밑작업을 눈여겨봐야 한다. 굴뚝에 연기가 나려면 땔감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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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2-25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6인의 제자도 키우고 삼각관계도 하고 진짜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군요~!! 근데 이거 가스라이팅 아닌가요? ㅋㅋ

저도 이 책 읽었었는데 막 좋지는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좀 구성이 특이했었던거 같은데...

물감 2024-02-25 21:52   좋아요 1 | URL
그쵸 사실상 가스라이팅인데, 막 브로디의 일방통행 보다는 스승제자간에 꿩 먹고 알 먹는 느낌이라 가스라이팅 표현을 쓰고 싶진 않았어요. 결과적으로는 선생보다 교주에 더 가까웠으니 그게 그걸지도요ㅋㅋ

저도 계속 별 셋이었는데요, 저자의 빌드업이 독특한 구성으로 한땀한땀 짜여졌음을 느끼고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 이 작가는 천재구나 싶더라니까요. 언젠가 다시 재독하신다면 브로디의 불순한 의도를 어떻게 연출했는지에 집중해보셔요. 고것 참 맛납니다!

coolcat329 2024-02-26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관심있는 책이었는데 물감님 글이 재밌어 꼭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여담이지만 저는 유난히 잘해주는 사람을 경계합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이런 사람들의 돌변을 경험하고 놀랐거든요. 이런 친절에는 물감님 말씀대로 대체로 불순한 의도가 있더라구요.

오늘 날씨가 화창하니 좋습니다. 굿데이!

물감 2024-02-26 21:00   좋아요 0 | URL
저도저도요! 그 경험 덕분에 사람 보는 눈이 생겼으니 다행이라 생각해야죠 뭐.

날씨는 좋았는데 업무가 너무 많아서 정신없이 지나갔네요ㅋㅋ 쿨캣님도 좋은 하루 보내셨길 바랍니다😀
 
뜨거운 피 페이지터너스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빛소굴 / 2023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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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그 소릴 들었다. 넌 대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확실히 남들 눈에는 내 인생이 핵노잼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전에도 말했듯 나님은 유니콘이니깐. 이제는 해명하기도 귀찮아 그냥 오해하게 놔두지만 나도 뭐 할거 다 하면서 살고는 있다. 물론 집을 잠만 자는 곳으로 대했던 10대나 20대 때에 비하면 텐션이 확 죽은 것도 사실이다. 하기사 누군들 안 그럴까. 혼자서는 주로 독서랑 홈트밖에 안 하지만 이런 일상도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지나간 청춘이 온통 마음고생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의 고요하고 태평한 나날들이 내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그럼에도 간혹 한 번씩 향수에 젖을 때면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던 어느 순간으로 날아가곤 하는데, 그때가 그립다기 보다 추억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아이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애늙은이였는데 이제는 그냥 늙은이가 다 됐다.


<뜨거운 피>는 지금의 나님과 비슷한 느낌으로 살아가는 중년이 등장한다. 실비오는 청춘을 홀라당 날려먹고 겨우 정신을 차린 본투비 탕아였다. 인적 없는 숲속에 거주하는 그는 이제야 자리 잡은 생활과 안정에 만족하는 중이다. 그의 친애하는 여사촌의 딸이 어느새 다 커서 시집을 가더니, 자기들은 완벽한 부부의 표본인 부모님처럼 살 거라나 뭐라나.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딸의 남편이 강물에 빠져 죽는 사건으로 온 동네가 떠들썩해진다. 이후 남편을 죽인 자가 딸의 외도남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또 한 번 난리가 난다. 조카의 외도를 알고 있었던 실비오는, 비탄에 빠져있는 조카를 나무라며 이제라도 현명하게 행동하길 경고해 준다. 그건 마치 젊었을 적에 피가 끓는 대로 살았다가 후회하게 된 자신의 과거였다. 실비오 역시 열정에만 의존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때의 자신의 선택과 경험들이 헛되다곤 생각지 않으나, 누가 봐도 정답은 아닌 그 길을 조카가 걷고 있었으니 심란할 만도 했을 게다. 그러나 실비오의 마음이 혼잡한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잠깐이지만 뜨겁게 타올랐던 여사촌과의 지나간 불장난이 떠올라서였다.


사촌에 대한 여러 번의 언급이, 주인공과 보통 관계는 아닐 거란 느낌이기는 했다. 역시나 둘은 한때 뜨거웠던 사이였으나 금방 관계를 정리하고 각자에게로 돌아갔다. 이들의 연애는 절대 잊지 못할 어느 흔적을 남겼는데, 모순되게도 잊고 있었던 그 흔적이 자신들의 발목을 붙잡는 비상사태가 발생한다. 먼저 사촌은 실비오와의 만남을 일종의 죄지음으로 여겼고, 이별한 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여 쭉 행복하게 살아왔다. 자기 삶에 200% 충실했던 탓일까. 실비오가 연인이었던 것도 잊고 친근하게 대했던 것과, 둘만의 그 흔적까지도 처음 알았다는 듯한 반응 등등, 온통 망각하며 살아온 그녀의 생애는 온통 거짓 투성이였다. 피가 뜨겁던 시절들을 죄다 부정하고 헛것으로 여기는 사촌과, 그런 엄마를 동경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딸을 보며 쓴맛을 느끼는 주인공.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듯 누구에게나 과거와 비밀은 존재하고, 더는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헌데 그릇된 선택이었다 해서 부러 망각하고 자신을 부정해버린다면, 짜여진 각본 속에서 주어진 연기만 해야 하는 배역의 모습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그런 그녀를 사랑한 자신은 또 뭐가 되냔 말이다.


뒷부분은 사촌에 대한 실비오의 몰아치는 감정들로 도배된다. 내내 저텐션이었던 그가 이렇게 열을 올리는 건, 소중했던 추억이 짓밟히고 난도질당해서가 아닐까 한다. 실비오는 확신했었다. 그녀가 눈부시게 찬란했던, 살아있던 순간은 우리의 그때뿐이었다는 걸.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속이고 거짓된 연기자의 생애로 달아나버렸다. 그렇게 식어버린 순수의 열기는, 이제 냉소를 머금을 때에만 타오르게 되었으니 이런 것도 블랙코미디라 해야 할까. 나름 인생에 굴곡이 많았던 1인으로써,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여러 번 실감하고 있다. 깊게 패인 마음의 상처들이 낫는 과정에는, 내 감정에 얼마만큼 진실되고 솔직한지에 따라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뻔한 훈수처럼 들리겠지만 자기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회피하고 망각하며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습관을 가져보도록 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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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2-22 1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외국은 사촌끼리 결혼을 할 수 있는데 왜 이별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뜨거웠던 만큼 그 사랑을 잘 지켜야 했던 건 아닌가 생각되어요.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사랑이 뜨거웠다고 해서 반드시 결혼 생활을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에요. 결혼은 어쩌면 사랑이란 감정보다 인간성과 셩격이 더 중요한 변수가 될지 몰라요.(사람에 따라서는요)
무난한 성격이 결혼 생활에 유리한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것, 이에요. 또 서로에 대한 존중.
물론 저도 다 아는 건 아니고 여태까지 살아온 시간으로 안 것이니 앞으로 더 살아 보면 더 알게 될 것이 있을 거예요. 잘 읽고 갑니다.^^

물감 2024-02-22 14:40   좋아요 0 | URL
저도 사랑의 크기와 죽이 잘맞는 거는 비례하지 않는다고 봐요. 갈수록 높아지는 이혼률만 봐도 짐작이 가고요. 일방통행의 감정과 존중이 큰 걸림돌이지 않나 싶어요. 여튼 복잡미묘한 사랑의 허리케인은 어느 시대든지 똑같아서 재밌습니다. ㅎㅎ

coolcat329 2024-02-22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재미나겠는데요?
저는 작가의 단편집 <무도회>를 읽어봤는데 참 깔끔하면서도 여운이 오래 남는 작품들이었어요.
뜨거운 사랑의 감정보다는 가치관이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과 결혼하는 게 좋은 거 같아요. 근데 피가 뜨거울 때는 그 어떤 상대든 다 자기와 잘 맞는다고 생각하죠. ㅠ
후회할 때는 너무 늦었죠. ㅎㅎ
참 씁쓸합니다. ㅎㅎ

물감 2024-02-22 16:42   좋아요 0 | URL
요 시리즈(페이지터너스)가 검증된 작품이 많아보입니다. 암거나 골라 읽으셔도 될듯요ㅎㅎ
가치관이나 성향이 맞는 사람이 어쩜 이리도 보기 힘든지요. 그건 오래보아야만 알 수가 있는데, 새로운 만남과 관계는 너무 한시적이에요ㅠㅠ 반대로 괜히 뛰어들었다가 후회하기도 무섭고 참ㅎㅎㅎ

stella.K 2024-02-25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30대 아니신가요?
진짜 나이 들으면 어쩌시려고.ㅎㅎ
근데 전 정말 나이드니까 막 헷갈려요.
생각은 아직 30대 같은데 몸은 그렇지 않으니 뭔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왜 몸이 바뀌어서 내 몸 찾아 3만리 하는 드라마 이해가 간다 싶기도 합니다.
아실랑가? ㅋㅋㅋ

물감 2024-02-25 22:30   좋아요 1 | URL
저물어가는 삼십 대입니다만, 사오십 대가 되어도 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거 같아요. 지금 제 모습이 십대, 이십대하고도 비슷했습니다. 이정도면 진짜 애늙은이 소리 들을만 하지 않나요ㅋㅋㅋㅋ
저도 몸이 계속 나빠져서 올해부터는 독서보다 운동에 시간을 더 쏟고 있어요. 살 빠지고 근육 생기니 삶의 질이 달라지네요. 스텔라님도 운동 많이 하셔요! 그리고 말씀하신 드라마는 모르겠습니다ㅋㅋㅋㅋ

stella.K 2024-02-26 10:07   좋아요 1 | URL
역변 할 수도 있습니다. ㅋㅋ

물감 2024-02-26 16:23   좋아요 1 | URL
우째 대화의 핀트가 안맞는거 같은데요 ㅋㅋㅋ
저는 정신적인 걸 얘기하고,
스텔라님은 육체적인 걸 말씀하시고 ㅋㅋㅋ
육체야 뭐... 알아서 노화되지 않을까요 ㅠㅠ

stella.K 2024-02-26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런가요? 아니 역변이라는 게 꼭 잘 생겼다 못 생겨지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일 수도 있거든요.
아, 모르겠네요. 암튼 뭐 전 나쁜 뜻으로 얘기한 거 아니니까 오해 없으시기 바라요. 😂

물감 2024-02-26 21:02   좋아요 1 | URL
ㅎㅎㅎ오해 안합니다. 스텔라 님의 지속적인 관심 감사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