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독약 창비세계문학 28
엔도 슈사쿠 지음, 박유미 옮김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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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활동을 해온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다독가는 아니지만 공백기 없이 활동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몇 차례 얘기했듯이 나님은 쓰기 위해 읽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많고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들 할 텐데 글쎄, 나는 인풋을 꼭 책으로만 집어넣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풋이 압도적으로 많아야 쓸만한 아웃풋이 나오는 건 맞는데, 그 출처가 반드시 책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글쟁이들은 잘 알 텐데, 글이 안 써지는 원인은 사고의 확장이나 발상의 전환이 부족한 탓이 크다. 그러니 다양한 분야의 데이터를 습득하여 유연성과 개방성을 길러야만 한다. 개인적으로는 프레임을 넓히는 것보다 깨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쉽지는 않다.


한편 꾸준하게 쓰는 데도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 분들을 자주 본다. 욕심도 있고 진정성도 느껴지는데 발전이 없는 분들을 보노라면 딱한 마음이 든다. 대개 이런 분들은 평범한 걸 선호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하는 흔한 문장과 표현을 못 버린다는 게 특징이다. 단지 쓴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모를까, 나름 글쓰기에 진심인데도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하니 이 얼마나 속상한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근육통이 싫어서 힘들지 않을 만큼만 훈련하는 선수한테 무엇을 기대하겠느냐고. 따라서 모든 글쟁이들은 평범함을 거부하고 좀 더 치열하게 써야 한다. 남들이 자신의 글에 ‘기대감‘을 갖고 클릭하게끔 만들어줘야 한다. 그리하여 기계적으로 좋아요를 받기 보다, 즐겁고 유익하게 느껴져서 좋아요를 받는 글과 문장이 되어야 한다. 나 역시 그렇게 되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며, 당신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참 오랜만에 일본 고전문학을 읽었다. 나쓰메 소세키, 마쓰모토 세이초, 다자이 오사무 등등 옛 일본의 문학 감성들은 영 안 맞아서 손 뗀지도 한참 됐다. 대체로 건조한 문체인데다 지루한 문장 구사가 많은 탓이었다. 아니면 스토리텔링에 높낮이가 없다거나. 그냥 한 번 더 속아주자는 마음으로 고른 <바다와 독약>은 전혀 예상 못 한 잭팟이었지 뭔가. ‘신‘에 대해 일평생 연구했다던데, 생각보다 종교의 색채가 짙지 않았고, 내적 고통을 넘어선듯한 저자의 아웃풋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이처럼 한 주제에 천착하는 작가들은 완성도와 작품성 그리고 대중성까지, 세 마리 토끼를 잡는 경우가 많은데, 잘 생각해 보니 이들만큼 치열하게 쓰는 타입도 없는 듯하다. 이와 같은 자세가 아니라면 1만 시간의 법칙조차 말짱 도루묵일 것이다. 그러므로 평범함에 익숙해지지 말자.


<바다와 독약>은 생체해부실험을 한 의료진의 민낯을 다루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경, 공습이 빗발치는 한 도시의 대학병원에는 매일같이 응급환자들이 실려온다. 진료 한 번 못 받고 죽어가는 환자들과, 감정이 거세된 직원들 사이에서 혼자 괴로워하는 스구로 의사. 동기의 말대로 의사에게 감정놀음은 한낱 사치일지 모른다. 더구나 지금은 전시상황이지 않은가. 결국 될 대로 돼라였지만 비인간적인 의료진의 만행은 참으로 못 봐줄 지경이었다. 수술 도중에 죽은 환자를, 수술 성공 후에 죽은 것으로 위장한 것도 그렇고, 공습으로 죽을 바에야 실험체로써 사회에 공헌하는 편이 더 낫다는 말들도 가증스러웠다. 그 와중에 윗사람들은 의학부장 선거를 생각하느라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 환자들의 목숨보다 중요한 밥그릇 싸움이라니. 그러나 이것이 의료계의 현주소였고, 한배를 탄 스구로 또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속의 무수한 적신호들을 외면한 채로.


2부에서는 한 간호사의 수기가 나온다. 중국인 남편에게 버림받고 간호사로 복귀한 그녀는, 종종 병원을 들리는 부장 의사의 백인 아내를 보게 된다. 간호사 출신의 사모님은 이것저것 환자들을 챙겨주곤 했는데, 정작 그 수고와 배려가 모두를 불편케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반대로 이 천사표 사모님의 남편은 환자를 위하기는커녕 죽든지 말든지 선거만 생각하는 냉혈한이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성질의 두 사람을 한 세트로 묶어놓다니, 이것 또한 신의 장난질일까. 만약 신이 존재치 않는다면 이런 아이러니를 대체 무슨 수로 설명한단 말인가.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늘 변함없이 나를 지켜보는 저 검푸른 바다. 어쩌면 신은 그곳에 서서 우리를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은 스구로의 동기인 T가 쓴 수기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들의 점수를 따내는 일에만 움직여왔다. 계산된 행동 하에 결과만 괜찮다면 비양심적, 비도덕적일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러다 자신의 ‘척‘을 발견한 전학생의 비소에 그만 무너져버린다. 전학생이 이사가고 본 캐릭터로 돌아온 T는, 아무렇지도 않던 계산된 행동들에 허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내용은 일본인에게 결여된 ‘죄책감‘을 꼬집어주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해설에서도 얘기한 바, ‘죄의 문화‘를 지닌 서양인이 죄의식에 따라 행동하는 반면에, ‘수치의 문화‘를 지닌 일본인은 발각되지 않은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슈사쿠는 일본인의 결함이 신의 부재로 생겨난 것처럼 보고 있다. 그러니까, 신의 손길을 뿌리친 민족의 당연한 결과라는 얘기다. 아무튼 종교를 떠나서 욕먹을 각오로 자국민을 디스 한 저자에게 삼삼칠 기립 박수를 보낸다.


이제 다 끝났으니 조금만 더 참아주시라. 대망의 3부에서는 미군 포로들을 데려다가 생체해부실험에 들어간다. 그리고 스구로는 어영부영 참여했다가 뒤에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한다. 이 실험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닌, 생명이 언제쯤 끊어지는가를 알아내는 게 목적이었다. 말 그대로 의학 발전에 공헌하는 일일 진대, 저 바깥양반들은 수술 장면을 보면서 왜 낄낄대고 있는 걸까. 무언가 한참 잘못됨을 느꼈지만 그래봐야 자신도 저 무리 중 하나란 사실에는 변함없었다. 혹여 피해 갈 수 없다면 차라리 동기처럼 기회를 잡고 라인 타는 게 맞을 수도 있다. 허나 이런 생각의 결과가 오늘날의 일본을 만든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생각해 보라. 지금도 일본은 과거의 만행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모든 바탕에는 나만 좋으면 장땡이라는 사고가 깔려 있는데, 이것마저도 일본을 따라가는 한국 사회의 앞날이 걱정되기는 한다. 아무튼 잘 읽었고, 슈사쿠의 작품들은 좀 더 둘러볼 생각이다. 것보다 의사 파업이 한창인 때에 읽어서 그런가, 기분 참 멜랑꼴리 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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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3-03 2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평가 10년의 물감님 대단합니다~!! 글을 잘 쓰시는 비법이 있으시군요~!!
전 그냥 책이나 읽는걸로 해야겠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그저 사랑입니다 ㅋ 이 책에서 나오는 생체실험 내용 때문에 읽기 힘들더라구요...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감 2024-03-04 10:41   좋아요 1 | URL
저도 초반에는 10줄도 안쓰던 사람이었는데ㅋㅋㅋ제가 이렇게 글쓰기를 좋아하게 될 줄 정말 몰랐어요. 그래봐야 서평에 한해서지만요 ㅋㅋ

한 때 서재에서 슈사쿠 붐이 일었었죠? 왜 열광했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느낌있는 작가네요. 근데 이 책은 난이도가 낮은 편이라던데요ㅋㅋㅋ 다른 책들도 궁금해집니다.

은오 2024-03-04 20: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이랑 저도 취향 은근 다르군요. ㅋㅋㅋㅋㅋ 물감님이 다자이오사무랑 소세키 감성 안좋아하시는거 처음 알았읍니다. 저는 최근에 다자이오사무 사양 좋게 읽었고 인간실격은 다시 읽어도 좋더라고요. 소세키 마음도 좋았어서 다른 작품들 읽어보려고 드릉드릉 ㅋㅋㅋ
그리고 10년 대단하시네요. 말이 10년이지 진짜 저도 속으로 박수..🫢🥹 쓰기 위해 읽으긴다는 것도 신기하고요. 전 읽는게 너무 재밌어서 읽기만하고싶어요!!ㅠㅋㅋㅋㅋㅋ

물감 2024-03-05 15:10   좋아요 1 | URL
은오 님 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취향이 겹치지 않을걸요ㅋㅋㅋㅋ 이곳 분들은 다들 교양있고 점잖으셔서 저 혼자 좀 튀어보일 때가 많아요. 그냥 돌연변이인갑다 하세요 ㅋㅋㅋ
읽기만 하는 것도 당연 좋죠. 글쓰기는 안 해도 되지만 독서를 안 하는 건 죄악입니다 ㅋㅋㅋ 그리고 10년 그까이거 별거 없어요.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걸 즐기다보니 여기까지 온거죠 뭐. 저보다 오래된 고인물이 이곳에 얼마나 많습니까 하하하.
은오 님의 재능을 알지만, 저는 은오 님한테 글 쓰라고 압박하지 않을 거에요. 자기가 원해서 하지 않으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지금처럼 열독하고 댓글러로 지내셔도 충분합니다 ㅋㅋㅋㅋㅋ

페크pek0501 2024-03-19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고 느낀 점 : 좋은 책을 읽으면 서평을 잘 쓴다는 것.
글을 잘 풀어가셨습니다.(감히 내가 평가해도 된다면.)
물감 님이 이렇게 잘 쓰시는 분이었나, 새삼 깨달음.
책도 훌륭하네요. 시점을 달리해서 쓰는 것,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고 흥미롭거든요.
서재 운영 10년 되셨군요. 저는 15년째예요. 제가 선배임. 하하~~

물감 2024-03-19 20:35   좋아요 1 | URL
글을 올렸으면 칭찬이든 비난이든 달게 받아들여야죠. 감히 되고 안되고가 어딨나요ㅋㅋ 말씀대로 좋은 책을 만나야 좋은 글이 나오더라고요. 평소 품고있던 생각과의 교집합이 클수록 풍성한 글이 만들어지는데, 이 재미 또한 글쟁이들만 아는 것이겠죠😀 그나저나 페크님도 오래 계셨네요. 이런 선배님들이 있어주셔서 저도 실력이 늘은 거겠죠? 언제나 건필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