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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ㅣ 지만지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시리즈 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정아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1월
평점 :
한동안 독서를 게을리했다. 핑계를 대자면 올해 들어서는 독서보다 운동을 더 많이 하고 있어서 그렇다. 나날이 바뀌어가는 몸의 변화를 보는 재미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것이 독서의 재미를 훌쩍 뛰어넘고 있어서 어차피 자주 못 읽을 거면 벽돌책이나 읽자 싶어 고른 게 <죄와 벌>이다. 심사숙고한 끝에 ‘지만지‘에서 나온 번역본으로 골랐는데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어지간해선 번역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편인데, 김정아 역자의 글은 내내 감탄하면서 읽었다. 뭐 그건 그거고, 사실 지금 리뷰쓰기가 너무나도 막막한 상태다. 맨날 야금야금 읽어대서 그런지 메인 스토리만 기억나고, 그밖에 서사들은 부분적으로 떠올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도스토옙스키의 리뷰만큼은 신경 좀 많이 써주자 했었는데 안되겠다. 빠른 포기.
워낙 유명해서 요약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적어보자면, 법대생 R군이 전당포 노파와 동생을 살해하고 도망친 뒤에 평범한 시민인 척한다는 내용이다. 나는 주인공이 쭉 양심의 고통을 받다가 큰 시련을 겪고 개과천선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주인공을 교만한 다크 히어로와 마음만은 따뜻한 츤데레 빌런의 중간지점에 놓아두었다. 그리하여 정신이 왔다 갔다 해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가 탄생된다. 그는 잘못된 사상과 헛된 정의감에 심취하여 본인의 행적을 정당화하기에 바쁘다. 물론 이런저런 고뇌에 빠지긴 했지만 내가 기대했던 선과 악의 대립하고는 모양새가 많이 달라 아쉬웠다. 듣자 하니 성경 속 인물에서 모티브를 따온 터라 어쩔 수 없었겠구나 싶다. 빠른 납득.
노파의 살인 사건이 초반부에 나와버려, 이 많은 분량을 대체 무엇으로 채웠을까가 가장 궁금했다. 근데 어랍쇼, 사건의 후폭풍 장면은 금방 사라지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버리는 게 아닌가? 난 뭔가 살인자의 위태로운 양심고백과 선에 대한 집착 같은 내면의 고군분투를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근데 읽어보면 알겠지만 R군이 구제불능 사이코패스 같은 인물도 아니며, 오히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사회를 생각하는 썩 멀쩡한 청년으로 나온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의 태연함과 고상함이 흡사 물과 기름처럼 느껴졌달까. 딱히 두 자아의 공존까지는 아닌데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이 더 큰 것도 아니었으니, 고것 참 저자의 의도가 아리송송했다. 그러다 제2의 주인공인 소냐가 등장하면서 R군이 누군가의 도약을 위한 촉매제 역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려 1866년 작품이던데 어떻게 이런 구도를 짤 생각을 다 했을까. 그저 놀라운.
가족들을 먹여살리려 매춘부가 된 소녀. 자신의 등골을 뽑아먹는 가족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소냐는, 이 거칠은 러시아 땅에서 홀로 남은 신실한 기독교인이라 하겠다. 술독에 빠진 소냐의 부친이 사고로 죽자, R군은 없는 돈 다 털어서 장례비를 마련해 주고, 이를 계기로 소냐와 가까워지게 된다. 소냐의 남다른 심성을 구원의 빛줄기로 받아들인 R군은 마침내 커밍아웃을 시도한다. 이로써 매춘부가 된 기독교인과 살인한 법대생의 동맹 비스무리한 감정이 생겨나고, 비록 말은 안 했지만 서로가 자신의 유일한 출구임을 인지한다. 그러는 한편, 자신의 허물을 모조리 받아주는 소냐를 보며 ‘이건 또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 소냐를 밀어내고 전처럼 고독한 은둔자로 돌아가 세상을 왕따시키는 주인공. 대체 그녀에게서 뭘 얻겠다는 거냐면서 계속 멘붕과 현타를 반복하는 그의 원맨쇼가 쭉 같은 패턴이라 솔직히 질려버렸다. 이게 다 원고량이 많을수록 돈을 더 벌 수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이해는 한다만, 분량 조절 실패의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R군은 자신이 짊어진 죄의 형벌에서 어떻게든 해방되고 싶어 안절부절이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였고, 자수할 마음을 먹다가도 무너지기 일쑤였다. 이렇듯 그에게도 선한 양심은 남아있었지만 생존본능과 방어기제가 모든 걸 누르고 앞질렀다. 그렇게 자신의 범죄가 인류의 진보를 위한 첫걸음이자 밑거름으로 여겼다. 또한 그는 국가의 혁명을 위해 적들을 죽여나간 나폴레옹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그런 사상에 입각하여 자기가 ‘이(벌레)‘를 제거했다고 생각한다. 죽은 노파가 무슨 사회의 악이라도 된다는 것마냥. 그러나 죄 없고 선한 노파의 동생의 죽음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동생과 친했던 소냐한테라도 사죄해서 해방감을 느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소냐의 심성이 성직자 뺨칠 정도로 거룩하고 정결해서, 이거 잘못 건드렸다간 무신론자인데도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만 같았으니 그냥 발뺌할 수밖에 없는, 참으로 모양 빠지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쯤 되면 결말은 다 정해져있는데 계속해서 겉도는 상황들이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몇 번 더 재독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려나.
두 주인공이 저지른 죄에 대해 말해보자. 해설에서 R군의 죄는 법률·법규를 위반한 ‘Criminal‘이고, 소냐의 죄는 도덕·윤리를 배반한 ‘Sinner‘로 분류했다. 명백히 전자가 더 악랄하다고 할 수 있는데 <죄와 벌>은 후자 쪽에 무게를 두고 있어, 자칫 논란거리가 되기 쉬운 작품이다. 물론 끝에 가서는 R군이 자수하고 시베리아로 가서 수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죗값을 치르는, 나름의 권선징악이 실현되기는 한다. 죄에 빠진 R군이 소냐로 인해 교화되고 거듭나는 이 과정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얻고 구원에 나아감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R군의 죄와 고통을 함께 감당하고 짊어진 소냐는, 인류를 구원하러 나타난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서사가 탄생된 배경에는 도스토옙스키가 실제로 수년간 유배생활을 하였고, 그 기간 동안 읽었던 신약 성경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성격은 <죄와 벌> 전과 후로 나뉜다고 했다. 이전까지도 인간의 심리를 파고들며 삶을 움직이고 결정짓게 하는 요인에 대해 다뤄왔지만, <죄와 벌> 이후부터는 그의 세계관이 현실을 벗어나 영의 세계로 뻗어감을 알 수 있다. 표현 그대로 신들린 듯한 글쓰기가 시작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죄와 벌>에는 두 사람 말고도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글이 길어질까 봐 다른 내용들은 리뷰하지 않았는데, 개인적으로 R군보다 여동생의 혼사 이야기 쪽이 더 흥미로웠다. 아무튼 손가락 가는 대로 끄적거리긴 했는데 영 실망스러운 글이 돼버렸다. 훗날 재독하게 되면 제대로 칼을 간 리뷰를 써봐야겠다. 근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장담은 못 하겠다. 자 그럼 다시 쇠질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