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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ㅣ 페이지터너스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빛소굴 / 2023년 2월
평점 :
어제도 그 소릴 들었다. 넌 대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확실히 남들 눈에는 내 인생이 핵노잼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전에도 말했듯 나님은 유니콘이니깐. 이제는 해명하기도 귀찮아 그냥 오해하게 놔두지만 나도 뭐 할거 다 하면서 살고는 있다. 물론 집을 잠만 자는 곳으로 대했던 10대나 20대 때에 비하면 텐션이 확 죽은 것도 사실이다. 하기사 누군들 안 그럴까. 혼자서는 주로 독서랑 홈트밖에 안 하지만 이런 일상도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지나간 청춘이 온통 마음고생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의 고요하고 태평한 나날들이 내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그럼에도 간혹 한 번씩 향수에 젖을 때면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던 어느 순간으로 날아가곤 하는데, 그때가 그립다기 보다 추억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아이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애늙은이였는데 이제는 그냥 늙은이가 다 됐다.
<뜨거운 피>는 지금의 나님과 비슷한 느낌으로 살아가는 중년이 등장한다. 실비오는 청춘을 홀라당 날려먹고 겨우 정신을 차린 본투비 탕아였다. 인적 없는 숲속에 거주하는 그는 이제야 자리 잡은 생활과 안정에 만족하는 중이다. 그의 친애하는 여사촌의 딸이 어느새 다 커서 시집을 가더니, 자기들은 완벽한 부부의 표본인 부모님처럼 살 거라나 뭐라나.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딸의 남편이 강물에 빠져 죽는 사건으로 온 동네가 떠들썩해진다. 이후 남편을 죽인 자가 딸의 외도남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또 한 번 난리가 난다. 조카의 외도를 알고 있었던 실비오는, 비탄에 빠져있는 조카를 나무라며 이제라도 현명하게 행동하길 경고해 준다. 그건 마치 젊었을 적에 피가 끓는 대로 살았다가 후회하게 된 자신의 과거였다. 실비오 역시 열정에만 의존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때의 자신의 선택과 경험들이 헛되다곤 생각지 않으나, 누가 봐도 정답은 아닌 그 길을 조카가 걷고 있었으니 심란할 만도 했을 게다. 그러나 실비오의 마음이 혼잡한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잠깐이지만 뜨겁게 타올랐던 여사촌과의 지나간 불장난이 떠올라서였다.
사촌에 대한 여러 번의 언급이, 주인공과 보통 관계는 아닐 거란 느낌이기는 했다. 역시나 둘은 한때 뜨거웠던 사이였으나 금방 관계를 정리하고 각자에게로 돌아갔다. 이들의 연애는 절대 잊지 못할 어느 흔적을 남겼는데, 모순되게도 잊고 있었던 그 흔적이 자신들의 발목을 붙잡는 비상사태가 발생한다. 먼저 사촌은 실비오와의 만남을 일종의 죄지음으로 여겼고, 이별한 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여 쭉 행복하게 살아왔다. 자기 삶에 200% 충실했던 탓일까. 실비오가 연인이었던 것도 잊고 친근하게 대했던 것과, 둘만의 그 흔적까지도 처음 알았다는 듯한 반응 등등, 온통 망각하며 살아온 그녀의 생애는 온통 거짓 투성이였다. 피가 뜨겁던 시절들을 죄다 부정하고 헛것으로 여기는 사촌과, 그런 엄마를 동경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딸을 보며 쓴맛을 느끼는 주인공.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듯 누구에게나 과거와 비밀은 존재하고, 더는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헌데 그릇된 선택이었다 해서 부러 망각하고 자신을 부정해버린다면, 짜여진 각본 속에서 주어진 연기만 해야 하는 배역의 모습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그런 그녀를 사랑한 자신은 또 뭐가 되냔 말이다.
뒷부분은 사촌에 대한 실비오의 몰아치는 감정들로 도배된다. 내내 저텐션이었던 그가 이렇게 열을 올리는 건, 소중했던 추억이 짓밟히고 난도질당해서가 아닐까 한다. 실비오는 확신했었다. 그녀가 눈부시게 찬란했던, 살아있던 순간은 우리의 그때뿐이었다는 걸.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속이고 거짓된 연기자의 생애로 달아나버렸다. 그렇게 식어버린 순수의 열기는, 이제 냉소를 머금을 때에만 타오르게 되었으니 이런 것도 블랙코미디라 해야 할까. 나름 인생에 굴곡이 많았던 1인으로써,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여러 번 실감하고 있다. 깊게 패인 마음의 상처들이 낫는 과정에는, 내 감정에 얼마만큼 진실되고 솔직한지에 따라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뻔한 훈수처럼 들리겠지만 자기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회피하고 망각하며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습관을 가져보도록 하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