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0
뮤리얼 스파크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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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살면서 영향력 좀 있다 싶은 인물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이들은 잘나가는 연예인 같은 파급력을 지녔다기 보다 주변인들의 호감을 사는 매력이 타고났다고 생각된다. 그게 선천적 본능일지, 후천적인 기교일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 열에 아홉은 무장해제되어 그 매력에 흡수돼버린다. 의심병 환자인 나님의 눈으로 쭉 살펴본 바 선한 영향력은 잘 없었고, 환심을 사는 일의 이면에서 불순한 의도만 여러 번 포착되었다. 이들은 상대의 니즈를 기가 막히게 파악하여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만능 재주꾼이다. 하여 어느 소속과 집단이든지 이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꼭 있는데, 잘 보면 하나같이 자기 검열이 안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생충한테 조종당하는 곤충과 다름없는 이 무리들은, 혹여 리더의 불순한 의도를 눈치채더라도 뭘 어쩌지 못한다.


여하간 절대 건강할 수가 없는 이런 주종 관계를 담백하게 풀어쓴 스코틀랜드 작품을 소개한다. 여학교 초등부 선생인 브로디와 간택 받은 6인의 제자들 이야기이다. 학교는 별난 교육방식을 고수하는 브로디를 이단아 취급하는 반면, 학급생들은 그녀의 스타일을 전심으로 지지해 주었다. 브로디 선생은 간단히 정의 내릴 수 없는 비범한 인물이었는데 뭐라 할까, 자만과 교양과 기품의 교집합에 위치해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똑 부러진 데다 눈치도 100단인 브로디의 제자 중 한 명인 샌디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6인의 제자가 어떤 기준으로 발탁된 건지 모르지만 브로디의 특별 교육으로 또래들보다 총명하고 재능 있는 모습을 갖춰나간다. 그 가르침에 뿌리내린 6인은 서서히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는데, 신기하게도 모두 다 브로디의 예견대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자신의 전성기니까 그것이 당연하다는 브로디 선생. 그처럼 전지전능한 브로디는 훗날 잘 키운 제자 중 하나에게 배신을 당하고 학교를 퇴임하게 된다. 설마 그녀가 호랭이 새끼를 키웠던 걸까. 브로디의 전성기를 끝내버린 X는 대체 누구였을까.


6인의 제자는 자아가 선명해진 뒤에도 브로디 안에서 한뜻을 품고 나아간다. 여태 막연히 맹신했던 제자들이 브로디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그녀의 남자 문제였다. 브로디는 과거의 연인 H와의 일들을, 세계사나 미술사의 한 장면들과 교묘히 섞어가며 들려주곤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영광을 높이고자 ‘내 사람‘을 땔감으로 갖다 쓰다니, 영 아니 될 일이었다. 이건 뭐 지나간 일이니까 그렇다 치고, 현재 브로디는 음악쌤, 미술쌤과의 어중간한 삼각관계 중이다. 말로는 연애할 생각이 없다지만 그들의 뮤즈는 되고 싶었던지, 두 남자의 집을 바삐 드나드는 브로디의 이중생활이 제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그래 이왕 들킨 거, 브로디는 제자를 하나둘씩 파견하여 두 남자의 마음을 떠보게 한다. 결국 음악쌤은 탈락하고, 미술쌤은 돌아가며 찾아오는 6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낸다. 각 모델마다 브로디의 얼굴을 하고 있어, 이건 뭐 대놓고 플러팅하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정작 그녀는 점찍어둔 제자를 그의 애인으로 꽂아 넣을 심산이었다. 이 역시도 브로디 자신의 전성기를 증명해 줄 또 다른 땔감에 불과했고, 그녀에게 저항이라도 하듯 X가 미술쌤의 애인 역을 차지해버린다. 대체 어쩌다 이 끈끈한 브로디 그룹에 균열이 생겼을까.


제자 중 유일하게 통찰력을 가진 X는 브로디 선생의 정치 성향을 꿰뚫어 보았다. 브로디는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지지하는 파시스트였고, 그 사상을 본인만의 교육 방식에 녹여서 학급을 지도한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물든 아이들은 각자의 미래가 그녀의 뜻대로 된 결과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게 다 브로디의 전성기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줄기차게 심어둔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내 사람을 다루는 방식‘으로 인해 브로디가 어떤 물밑작업을 해왔는지를 알 수 있었고, 뒤늦게라도 그녀의 만행을 멈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을 은폐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뒤에도 브로디와 제자들은 여전히 잘 만나고 지냈다. 어째서 X는 배신하고도 모르쇠 하며 브로디와 계속 어울렸을까. 그건 아마도 브로디에게 내렸던 뿌리 때문이지 싶다. 가지나 줄기는 잘라낼 수 있어도 뿌리는 뽑지 못하는, 이것이야말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의 무서움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화제의 인물을 만난다면 침 흘리고만 있을 게 아니라 그의 물밑작업을 눈여겨봐야 한다. 굴뚝에 연기가 나려면 땔감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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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2-25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6인의 제자도 키우고 삼각관계도 하고 진짜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군요~!! 근데 이거 가스라이팅 아닌가요? ㅋㅋ

저도 이 책 읽었었는데 막 좋지는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좀 구성이 특이했었던거 같은데...

물감 2024-02-25 21:52   좋아요 1 | URL
그쵸 사실상 가스라이팅인데, 막 브로디의 일방통행 보다는 스승제자간에 꿩 먹고 알 먹는 느낌이라 가스라이팅 표현을 쓰고 싶진 않았어요. 결과적으로는 선생보다 교주에 더 가까웠으니 그게 그걸지도요ㅋㅋ

저도 계속 별 셋이었는데요, 저자의 빌드업이 독특한 구성으로 한땀한땀 짜여졌음을 느끼고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 이 작가는 천재구나 싶더라니까요. 언젠가 다시 재독하신다면 브로디의 불순한 의도를 어떻게 연출했는지에 집중해보셔요. 고것 참 맛납니다!

coolcat329 2024-02-26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관심있는 책이었는데 물감님 글이 재밌어 꼭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여담이지만 저는 유난히 잘해주는 사람을 경계합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이런 사람들의 돌변을 경험하고 놀랐거든요. 이런 친절에는 물감님 말씀대로 대체로 불순한 의도가 있더라구요.

오늘 날씨가 화창하니 좋습니다. 굿데이!

물감 2024-02-26 21:00   좋아요 0 | URL
저도저도요! 그 경험 덕분에 사람 보는 눈이 생겼으니 다행이라 생각해야죠 뭐.

날씨는 좋았는데 업무가 너무 많아서 정신없이 지나갔네요ㅋㅋ 쿨캣님도 좋은 하루 보내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