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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새겨진 소녀 ㅣ 스토리콜렉터 44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평점 :
안드레아스 그루버는 작년인가 재작년에 국내에서 반짝 떴다가 이제는 시들시들해진 작가다. 솔직히 1편인 ‘새카만 머리의 금발 소년‘이 실망스러워서 그만 읽어도 되겠다 싶었는데, 이미 구매한 책이라 그냥 읽어봤다. 그리고 역시는 역시나였다. 책 뒤표지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의 이야기‘라고 적힌 한 줄 평을 보고 그저 웃었다. 나는 숨 쉬는 게 여유롭다 못해 하품도 나오더만. 그리고 역시나 유머 없는 퍽퍽한 닭 가슴살 같은 독일 소설... 정말 재미없기라도 하면 중단했을 텐데 그 정도는 또 아니어서 어중간한 상태로 끝까지 읽긴 했다. 보통 뭐라도 남기고 싶어서 리뷰를 꼭 쓰는데, 지금 내가 뭘 남기고 있는 건지 모르겠음. 역시 독일 소설이야. 차라리 케케묵은 프랑스 소설이 나랑 더 잘 맞을 듯. 집에 독일 소설이 더 남아있던가? 제발 이것으로 독일문학은 끝이기를.
크게 두 가지 내용이 교차된다. 검사가 문신 소녀를 발견 후 범인을 조사하는 것과, 자비네가 슈나이더의 제자가 되어 구남친을 다치게 한 미제 사건을 재조사하면서 범인을 찾는 것. 이렇게 적고 보니 되게 간단한 내용 같지만 읽어보면 곁가지가 많아 시선이 분산되고 정신은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 솔직히 내가 제대로 몰입하지 못했다. 먼저 1권에 등장했던 자비네는 이전 살인사건 후로 연방범죄수사국 아카데미에 입학 후 천재 프로파일러 마르틴 슈나이더의 학생이 된다. 그녀는 연방수사관인 구남친이 머리에 총 맞고 중환자가 된 소식을 듣고 직접 범인을 잡으러 방방곡곡 쏘다닌다. 한편 오스트리아에서 실종된 소녀가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의 그림 문신이 등에 새겨진 채로 발견된다. 이 사건의 담당 검사는 문신 소녀의 범인과, 독일에서 자비네가 쫓는 범인이 한 패임을 알게 되어 슈나이더 팀과 합세를 한다. 그리고 밝혀지는 배신과 음모로 죽음에 점점 다가서는 슈나이더, 그리고 자비네...
많은 작가들이 범죄소설에서 악역을 정할 때 타 작품의 캐릭터와 겹치지 않게 하려고 고민할 것이다. 이미 다양한 컨셉의 빌런들이 있어, 겹치지 않게 한 것만으로도 잘한 건데 솔직히 이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독립적인 컨셉도 있어야 하고 지능적인 플레이도 보여줘야 하고 통틀어서 신선함까지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요즘 독자들은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 악역은 합격을 주고 싶었는데, 내내 범인이 나오질 않아서 칭찬이고 비판이고 할 게 없었다. 좀 뻔하긴 해도 문신 피해를 입은 소년소녀들이 차례차례 등장하면서 수사팀이 애를 먹는 그런 플롯을 보고 싶었다. 그것과 전혀 다르게 여러 번 비틀어놓고 살도 덕지덕지 붙여서 과유불급이 돼버렸다. 작가의 또 다른 시리즈인 ‘풀라스키 형사 시리즈‘에서도 모든 직업군의 인물을 총동원 시켜서 욕심이 과하다고 평을 남겼었는데, 이제 보니 작가가 원래 이런 성격이군. 다다익선이 무조건 좋은 게 아닙니다요.
원래 시리즈 소설은 본 권의 메인 사건도 중요하지만 다음 권과 이어질 연결고리가 재미있어야 계속 읽게 된다. 그런데 이 시리즈는 그다지 차기작을 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제로다. 일단 주인공부터가 매력이 없다. 요즘 표현으로 ‘츤데레‘ 캐릭터인데 이제는 진부한 설정인데다 너무 막무가내 스타일이라 그에게는 희로애락을 보기 어렵다. 언젠가는 그 사나움이 온순해질 때가 오겠지만 버럭 시절에도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중간마다 설명이 나오던가. 범죄소설의 주인공들은 보통 핸디캡이나 트라우마가 있는데 그것들이 주인공을 입체적으로 만들어주긴 하나 과하면 오히려 독이 된다. 슈나이더가 마리화나에 의지하고 광적으로 범죄 심리에 집착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자신의 천재성과 다른 일반인들을 이해하지 않고 막 그냥 갈아 마셔댄다. 그런 모습을 보다 보면 슈나이더가 등장인물들을 혼내는 게 아니라 꼭 독자를 꾸짖는 것만 같아서 점점 불쾌해진다. 슈나이더도 별로지만 자비네는 더 별로다. 이제 그녀는 슈나이더의 전문 파트너로 활약할 것이기에 더 많은 분량을 보게 될 텐데, 이 작품처럼 슈나이더보다 더한 저돌적인 성격을 보여줄 거라면 짜증 나서 못 읽을 듯. 이런게 바로 독일 갬성입니까?
위에서 말했듯이 시선이 심하게 분산된 작품이다. 여러 개의 미제 사건도 다루면서 문신 소녀의 죽은 엄마 사건도 엮여있고 소녀의 납치범도 찾아야 하고. 그런데 작가가 이 많은 사건들을 하나로 묶기 때문에 일반 범죄소설보다 더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 책은 꼭 메모해가면서 추리하시길 바란다. 유독 독일 소설이 영미소설과 달리 느껴지는 건 스토리나 필력의 문제가 아니라 글을 쓰는 방식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잘 보면 독일 스릴러 작가들은 매우 스트레이트한 문장을 즐겨 쓴다. 그러다 보니 방향을 전환하거나 분위기를 환기시킬 때 어딘가 매끄럽지 못하고 갑자기 점프하는 느낌을 받는다. A에서 B와 C로 이어지고 D로 연결되기 보다, A가 끝나면 D를 말했다가 F가 나오는, 어딘가 빼먹은 듯한 기분이랄까. 플롯 구성이 불규칙하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문단과 문단 속에서 이래버리니, 독자가 느끼기엔 그냥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독일 문학도, 안드레아스 그루버도 이제 안녕이다. 세 권이나 읽었으니까 이만하면 됐지 안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