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생명 - 양장
류이치 사카모토.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황국영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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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전략)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에도 약간의 재현성은 있지만 제어된 파라미터parameter(전자악기에서 특정한 음을 내기 위해 설정하는 모든 요소를 일컫는 말-옮긴이)를 디지털적으로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않기 때문에 전원을 켠 후 경과한 시간이나 기기의 발열 등 여러 요소에 의해 소리가 바뀌므로 나중에 재현할 수 없는 소리도 상당히 많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고요. -37~38

 

 피시스의 무수한 노이즈에서 두드러지는노이즈를 추출해 그 재현, 반복 가능성을 검증한다. 이 검증을 통과한 노이즈가 모여 보편타당한 로고스를 이룬다. 여기서 피시스는 사실상 노이즈와 같다. 이 책에서 대담을 하는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와 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는, 피시스에서 로고스를 산출하는 이 과정을 현대의 예술과 과학의 공통점으로 본다. 그리고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이 과정을 거슬러서, 노이즈의 원천인 피시스 자체의 역할과 가치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사카모토: 로고스로 설명하지 못하면 뉴에이지New Age(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영적인 운동을 말한다-옮긴이)의 세계가 되어버리니까요. 미국 과학자 중에도 뉴에이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있지만, ‘요즘 그 사람, 뉴에이지가 다 됐던데라는 평가를 듣지 않으려면 로고스적 이해로도 납득할 수 있는 형태를 만들어야 하잖아요. 그들을 이해시키려면 로고스라는 공통 언어를 쓸 수밖에 없죠.

 

후쿠오카: 바로 그거예요. 피시스와 로고스의 대립에서 느닷없이 피시스 쪽으로 가버리면, 뭐랄까, 오컬트적으로 접근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리니까요. 세계는 항상 진동하고 있다는 식의 뉴에이지스러운느낌은 지양하고 싶어요. -119~120

 

 물론 로고스 너머, 로고스가 배제한 맥락을 재조명하는 관점 자체는 더 이상 새롭거나 놀랍지 않다. 어쩌면 다시금 로고스 자체의 교조적의의를 강조하는 훈계가 이보다는 좀 더 새롭거나 놀라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두 대담자 사카모토와 후쿠오카도 강하게 의식한 듯하다. 피시스를 예술과 과학의 영역으로 포섭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고스의 문법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둘의 공감대가 그 반증이다. 이 책의 중요한 의의도 바로 이 공감대, 보다 핵심적인 공통점에 있다. 이들이 단지 피시스를 온전히 포착,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 피시스의 포착과 제시는 창작자, 연구자 본인의 자기만족에 그칠 가능성이 재현, 반복, 검증을 요구하는 로고스에 비해 월등히 크다는 사실을 절감했음을 여기서 확인한다.

 

 단지 로고스가 자의적, 권위적으로 배제했다는 이유만으로는, 굳이 피시스를 초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미 로고스의 길에서 대성했음에도 피시스의 의미를 발견한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새 길을 찾기까지 회의하는 사람은 많아도, 새 길을 찾고 나서도 회의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을 일종의 자존심 문제로 생각할 정도로, 인간 대다수의 자존감이 부실하다는 반증일지 모른다. 아무튼 다시금 피시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통찰하며,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의 의견이 만나는 장면만으로도 이 책은 꽤 인상적이다.

 

 로고스를 극복하거나 압도할 피시스의 계시나 신조信條를 기대했다면, 이런 유보적인 태도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로고스가 배제된 뉴에이지의 세계를 지향하거나 그렇다고 인정하지는 않지만 로고스를 배제할 수만 있다면 감수할 사람들 말이다. 사카모토와 후쿠오카는 이런 사람들을 이해시키느니 로고스의 사람들에게 피시스를 전하는 쪽은 택했다. 그러므로 이중으로 고독하고 곤란했을 것이다. 친구가 될 뻔한 사람은 떠났는데, 친구가 될 사람은 오지 않는 길을 간 셈이다. 그 와중에 만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소중한 것은 당연하다.

 

사카모토: 깨부순다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도자기를 빚어서 이것이 제 앨범입니다. 수령 후 부숴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동봉한 다음, 부술 때 발생한 소리를 저의 음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곤 해요. 그걸 위해 직접 흙을 찾는 여정을 떠나도 좋겠다고 생각하고요. -44

 

 이 책은 논리의 한계를 통찰했을지언정, 그것이 영성靈性으로 비약하기를 원하지 않은 두 사람의 대화다. 논리를 믿는 사람도 영성을 찾는 사람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은 이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어쩌면 그렇게 누구도 만족하지 않는 까닭에 더더욱, 논리로써 우연을 아우르는, 그 희미하며 정묘精妙한 지점을 추구했을 뿐이다. 누군가가 만족하거나 하지 못하는 것은 애초에 중요할 수 없는 문제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보낸 도자기를 깨부수며 그의 소리를 기꺼이 듣고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 만큼, 이런 이야기만 듣고도 허세라며 싫어할 사람은 있다. 피아노를 자연으로 돌려보내듯, 흙에서 음악을 길어내려면 더 많은 소음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소음을 들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그런 소음이 더 늘어나더라도 그런 것 따위는 더더욱 아랑곳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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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는 나중에 조사하면 된다. 흉기만 찾아내면 사건은 끝난다. 즉 흉기를 찾아내지 못하면 사건은 끝나지 않는다. 미즈노 다다시의 자백을 받아 낼 수 있다면 상관없지만 지금 미즈노는 의식도 없고 취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신문을 위해 며칠 기다렸는데 용의자가 부인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낭떠러지 밑) - P17

형사들 사이에서 자그마한 안도의 한숨이 퍼져 나갔다. 무모한 백컨트리를 시도했다가 조난 사고를 낸 조난자에게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무엇보다 다행이라는 마음이 솟아오르는 법이다.
분위기를 다잡듯 오다가 말했다.
"가쓰라, 계속해." (낭떠러지 밑) - P24

"앗, 잠깐......."
누카다의 안색이 변했다.
동시에 무라타도 개운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무라타도 스스로 키워 온 조사 절차와 기술이 있는데, 상사인 가쓰라가 따라와서 무라타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아슬아슬한 질문을 한다. 수사반에서 둘째가는 실력자라는 무라타의 자부심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방식이다. (낭떠러지 밑) - P28

업무 영역이 아니라고 눈을 감기에는 인간의 목숨은 너무 무겁다. (낭떠러지 밑) - P34

‘노파심에 말해 두지만 이건 잠정 의견이야. 감정서는 나중에 보내겠네. ……물론 결과가 크게 바뀔 리는 없지만. 메모할 준비는 되었나?"
"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쓰라는 통화 녹음 기능을 켰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종이 다발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낭떠러지 밑) - P34

"다시 말해 흉기는 현장에 있었지만 그것이 흉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경우는 부정할 수 있다."
혼자뿐인 회의실에서 가쓰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맛있는 차다. 도네 경찰서에는 차를 맛있게 끓이는 경찰관이 있는 모양이다. (낭떠러지 밑) - P47

현경 수사1과 가쓰라 팀 형사들은 상사가 밤사이 자기들을 제치고 사건을 해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가쓰라를 좋은 상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쓰라의 수사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낭떠러지 밑) - P58

형사가 빠른 걸음으로 물러나자 가쓰라는 빳빳하게 다린 셔츠로 갈아입었다. 넥타이도 고쳐 매고 재킷을 걸치고 휴게실을 나섰다.
창밖을 보니 반달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달빛이 밝혀 주는 하늘은 구름이 적었다. 날씨는 감식 효율을 크게 좌우한다. 사건 발생 소식이 들어오면 먼저 하늘을 보는 것이 가쓰라의 습관이었다. (졸음) - P64

임의수사에는 한계가 있다. 강도치상 사건의 수사본부로서는 다구마를 체포해 조사하고 싶지만 전과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당연히 체포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는 무릇 발생해서는 안 될 불행한 일이지만 일어난 이상 수사본부에는 절호의 기회다. 형사가 말했다.
"위험운전치상죄입니까?" (졸음) - P70

경찰관은 담당 사안이 늘어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가 담당해야 할 사안을 다른 부서에 빼앗기는 것은 그 이상으로 싫어한다. (졸음) - P73

가쓰라는 현장을 확인해 문제를 파악하고 방침을 정해 명령을 내렸다. (졸음) - P74

가쓰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힐끔 보았다. 도착을 기다리는 자료 중 방법 카메라 데이터는 들어왔지만 감식 보고서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당장 할 일은 없다.
"나도 입회한다. 기다려."
‘......알겠습니다.‘
전화 너머에서 무라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상사가 진술 청취에 입회하면 형사는 일하기 거북해진다. 그것을 알면서도 가쓰라는 부하가 사람을 만날 때 가급적 입회한다.
사람의 표정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인간상을 대략적으로 파악한 다음, 가쓰라는 그 모든 것을 의심한다. (졸음) - P87

히라이 병원은 경찰서에서 겨우 100미터 남짓한 거리였다. 걸어가도 되는 거리였지만 가쓰라는 관할서 형사에게 명령해 차를 몰도록 했다. 무언가 긴급사태가 발생했을 때 가까운 곳에 차가 없는 사태는 피해야 한다. (졸음) - P87

반대편 차선을 지나간 차량이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을 일일이 기억하기는 어렵다.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미행이라는 작업 중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 해도 오카모토의 승용차가 지나간 것을 기억하지 못한 형사들이 앞으로 이번 수사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을 일은 없을 것이다. (졸음) - P96

과장까지 승진한 니토베는 부하들이 자신에게 충실하기를 요구한다. 달리 말하면 니토베는 예스맨만 곁에 두기 좋아하고, 중심으로 하는 진언보다 노골적인 아침과 추종을 좋아했다. 경찰이라는 상명하복 조직에서 윗사람이 까마귀는 하얗다고 하면 아랫사람은 맞는 말씀이옵니다, 하고 따르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니토베의 부하 중에 그의 안색을 살피는 형사는 거의 없다. 니토베 스스로가 자기 기분이나 맞추는 형사와 유능한 형사를 비교해 보고 후자만 수사1과로 데려오기 때문이다. 어딘가 한 명쯤, 심복으로 삼을 만한 유능한 형사가 없는지 간절히 바라면서 니토베는 결국 자기 뜻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실력주의 집단을 조직해 왔다. 때문에 나토베는 부하들을 대할 때 늘 심기가 불편하다. (졸음) - P110

"목격 중언이 나왔다고 들었네. 몇 건인가?"
"네 건입니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니토베가 순간 침묵했다. 니토베 또한 실력으로 승진을 거듭한 경찰관이다. 심야 3시에 발생한 교통사고에 네 건의 목격 증언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운이 좋았다고 기뻐하지는 않는다. (졸음) - P111

폭력이나 다름없는 졸음이 가쓰라를 덮쳤다. 미간을 힘껏 문지르며 겨우 졸음을 몰아냈을 때, 가쓰라는 자신이 질문의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가……." (졸음) - P122

그렇다. 시체는 나올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누군지는 몰라도, 어째서 시체를 토막 냈을까?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하면, 설령 모든 부위를 찾아내고 피의자를 알아내도 이 사건의 진상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가쓰라는 결국 모든 것은 이 ‘어째서‘로 귀결될 것이라고 예감했다. (목숨 빚) - P138

가쓰라는 문득 자기가 아직 신참 형사였던 시절을 떠올렸다. 형사과에서는 위화감은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훈련받았다. 그 시절, 일반 기업에 평생 몸담았던 71세 남성이 정년 후에 경비원으로 일을 한다면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어 금전이 필요한 건지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리라. 지금 가쓰라는 딱히 뒷조사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연물) - P236

"나(오다 지도관)도 윗선도 자네(가쓰라 반장) 팀의 검거율은 높이 사고 있네. 하지만 가쓰라 팀은 너무 자네의 원맨팀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어. 자네의 수사 수법은 독특해. 어디까지나 규범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면서 마지막 한 걸음을 혼자 훌쩍 뛰어넘는다. 그건 아마도 배우고 싶다고 배울 수 있는 수법이 아닐 테지. 자네도 언제까지고 현경 본부 반장으로 머물 수는 없어. 부하들이 실력을 쌓지 않으면 현경의 수사력은 저하된다." (가연물) - P242

텔레비전 같은 언론 보도에서 사건 수사에 직접 도움이 되는 정보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언론 보도의 주된 정보원은 경찰 발표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형사들은 텔레비전을 켜고 신문을 읽는다. 자기가 맡은 사건이 세상의 이목을 끄는 것을 보며 기운을 얻는 면도 없잖아 있지만 수사와 거리가 먼 정보, 가령 사건에 대한 행정 지원이나 대응, 검찰의 의향, 피해자의 동향 등은 언론 보도로 처음 알게 되는 사실도 많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언론 보도를 통해 수사 진척 상황이 범인에게 전달된다는 점이다. 어디까지가 보도된 정보이고, 어디부터가 범인과 경찰밖에 모르는 정보인지, 그 경계를 세심하게 파악하려면 역시 형사들도 언론 보도를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가연물) - P244

가쓰라는 사건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다. 추궁하면 오노하라는 십중팔구 자백하리라. 하지만 가쓰라는 ‘십중팔구‘로 도박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수사는 어차피 사람의 소행, 완벽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딘가 운명적인 틈이 벌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머리카락 한 오라기의 차이라도 완벽에 다가설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가연물) - P250

아마도. 가쓰라는 생각했다. 동기가 핵심이다.
평소 수사할 때 가쓰라는 동기를 중시하지 않는다. 동기는 결국 ‘욕망‘이라는 한마디로 귀결된다. 보통 사람들의 욕망은 뻔해서, 그 대부분이 금전 욕구와 성욕, 화풀이로 집약된다. 하지만 그 세 가지로 설명되지 않는 욕망도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지혜를 쏟아부어도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믿고 수사하면 미로에 빠져든다. 그렇기 때문에 가쓰라는 평소 동기를 중시하지 않는다. (가연물) - P250

춘메이의 진술은 막힘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상대가 대답할 내용을 미리 준비해 두었거나, 상대의 두뇌 회전이 빠른 경우에 자연스러운 진술을 얻을 수 있다. 가쓰라는 이번에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파스타 조리법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을 춘메이가 사전에 알았을 리 없다. (진짜인가) - P310

시다 하루타는 사건 다음 달, 이세사키 시립 도네가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사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듯이 씩씩하게 지내는 것 같다는 소식을 훗날 이무라가 가쓰라에게 전해 주었다. (진짜인가)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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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씨와의 만남은 어느 날엔 우박이 내리는 뉴욕의 오래된 레스토랑에서, 또 어느 날엔 안개에 휩싸인 오슬로의 호텔 라운지에서, 때로는 도쿄의 바에서 이래저래 20년 가까이 이어져왔습니다. 배경이 전혀 다른 우리 두 사람의 대화는 앞에서 사카모토 씨가 말씀하셨듯, 신기하게도 매번 같은 지점에 도달하더군요. 바로 피시스와 로고스의 상극. 그것은 두 사람의 인식의 여정(‘세상을 어떻게 써내려갈 것인가‘라는 물음)이 비슷한 궤적을 그려왔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후쿠오카 신이치) - P11

저는 원래 파브르와 닥터 두리틀(소설 《닥터 두리틀Doctor Dolittle》의 주인공으로, 동물과 말하는 능력을 지녔다-옮긴이)을 동경해 피시스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고, 피시스의 정묘함에 자극을 받아 생물학자를 꿈꾸었음에도 언제부터인가 실험용 동물을 죽이고, 세포를 짓뭉개고, 유전자를 조작하는에 매진해왔습니다. 조작적으로 생명을 다루고 요소환원주의要素還元主義(사물을 요소로 분해하면 그 각각의 요소가 단순한 원리로 작동할 것이라 간주하고, 이를 따지면 무엇이든 밝혀낼 수 있다고 여기는 사고법-옮긴이)적으로 생명을 분석했죠. 생물生物학이 아닌 사물死物학을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게놈은 매핑되고 유전자에는 등급이 매겨져 모든 것이 정보로서 데이터베이스화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생명을 완전히 로고스화한 것이죠. - P1112

그럼 사카모토 씨의 궤적은 어땠을까요. 그는 예술대학교에서 정밀한 음악 이론을 익힌 작곡가로서 전자음악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음표를 알고리즘으로 만들고 소리를 완전히 디지털화했죠. 한마디로, 음악의 로고스화에 성공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팝 음악을 작곡하고 영화 음악으로 아카데미상을 거머쥐며 선율이 돋보이는 멜랑콜릭한 다수의 명곡을 탄생시켰고요. 그 후 자기 모방을 경계하면서 유리와 금속의 노이즈를 모으고 마른 나뭇잎에서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일회성의 안개 속에서 불협화음과 어긋남을 표현하는 비동조非同調 음악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아마도 로고스가(즉, 우리의 뇌가) 기술하는 세상이 피시스를 왜곡하여 피시스의 희미한 떨림을 사상捨象(유의해야 할 현상적 특징 외의 다른 성질을 버리는 일-옮긴이)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로고스의 정상에 올라본 자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었을 겁니다. (후쿠오카 신이치) - P1213

사카모토: (전략) 바꿔 말하면,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기보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그저 걷는 걸 즐기는 감각이에요. 제가 만든 음악에도 이런 면이 반영되어 있겠죠. 조각가가 점토를 빚고 돌을 깎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발견한 수많은 소재를 ‘이거 괜찮은데‘ 하는 느낌으로 만지다보면 뭔지 모를 무언가가 만들어질 뿐입니다.
성격이 이토록 다른데도 후쿠오카 씨와의 대화가 늘 흥미로운 이유는 역시 말씀하신 것처럼 큰 의문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것이 서로에게 상당히 중요한, 본질적인 부분일 때가 많고요. - P21

사카모토: ‘내부주법內部奏法‘ 말씀이시죠?
얼마 전, 피아노가 ‘물체もの(‘もの(모노)‘는 물건, 물체, 물질 등 구체적이며 감각적으로 포착되는 대상을 가리키는 일본어 단어인데, 사카모토 류이치는 〈async〉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걸쳐 나타난 돌, 나무, 종이, 파라핀 등 ‘물체もの‘ 그 자체를 작품으로 삼아 인간중심적 사고에서의 ‘대상‘이 아닌 ‘물체‘ 자체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미술 경향 ‘모노하もの派‘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여기서 ‘もの‘는 이러한 관점에서 사용된 단어로 보이며, 이후 같은 관점에서 사용된 ‘もの‘는 작은따옴표를 사용해 ‘물체‘로 옮겼다-옮긴이)‘임을 강하게 인식하면서 음악으로서가 아닌 ‘물체‘로서의 울림을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후략) - P30

사카모토: (전략) 예전에는 피아노를 정밀하게 조율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피아노에게 원래의 자연 상태를 돌려주고 싶다, 피아노가 자연의 ‘물체‘로서 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조율을 안 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음정이 엇나가긴 하지만, 음정이란 것도 인간이 멋대로 만들어낸 개념일 뿐 자연의 소리로서는 딱히 어긋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후략) - P33

사카모토: (전략)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에도 약간의 재현성은 있지만 제어된 파라미터parameter(전자악기에서 특정한 음을 내기 위해 설정하는 모든 요소를 일컫는 말-옮긴이)를 디지털적으로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않기 때문에 전원을 켠 후 경과한 시간이나 기기의 발열 등 여러 요소에 의해 소리가 바뀌므로 나중에 재현할 수 없는 소리도 상당히 많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고요. - P3738

후쿠오카: (전략) 제가 무척 인상 깊었던 것은 〈async〉를 완성했을 때 사카모토 씨가 ‘아무한테도 들려주고 싶지 않다, 나만 듣고 싶다‘라고 생각했다는 점이에요. 언뜻 자기애적 발언으로 들릴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요컨대, 일회성을 지닌 음악 혹은 소리더라도 복제해 모두와 공유하는 단계에서 복제된 동일성에 묶여버리니까요. 사카모토 씨는 그렇게 되지 않은 상태의, 일회성에 한정된 〈async〉의 음악을 더 아껴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사카모토: 예리하시네요.
지금까지 많은 앨범을 만들어왔지만 〈async〉를 완성했을 때 처음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음악을 만드는 근본적인 목적은 많은 분이 들어주는 것, 혹은 CD 같은 복제물이 널리 알려지는 것인데 말이죠. 그래서 스스로도 신기했습니다.
앞서 들었던 비유를 쓰자면 지도도 없이,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async〉의 음악을 만드는 동안 ‘산에 오르는 일‘을 ‘어떻게 마무리 짓는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붓을 내려놓을 때‘를 무심코 놓쳐버리고 쓸데없는 덧칠을 하게 될까 봐 굉장히 두려웠거든요. 그래서 ‘지금인가? 지금 아닐까?‘ 하고 붓을 내려놓는 타이밍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앨범을 만들었는데, 이 또한 일회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 않나 싶어요. - P4142

사카모토: 깨부순다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도자기를 빚어서 ‘이것이 제 앨범입니다. 수령 후 부숴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동봉한 다음, 부술 때 발생한 소리를 저의 음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곤 해요. 그걸 위해 직접 흙을 찾는 여정을 떠나도 좋겠다고 생각하고요. - P44

후쿠오카: (전략) 그러나 인간의 뇌는 그 노이즈 중 두드러지는 포인트, 즉 시그널을 묶어 별자리를 검출해내는데, 이것이 바로 과학이 하는 일이죠. 본래 노이즈로 존재하는 자연에서 어떤 종류의 로고스를 끄집어낸다는 면에서 무척 인공적인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는 이 점을 늘 자각하고 있어야 하는데, 무심코 이를 망각하고 시그널이 진짜라고 믿어버리곤 합니다. 인간의 지知의 역사, 특히 근대과학사는 본디 무작위적이며 노이즈투성이인, 일회성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재현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법칙을 추려내고, 이 법칙을 통해 논할 수 있는 것만이 과학이며 세상을 나아지게 만드는 과학의 진보라고 약속해왔어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그널을 추려내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노이즈들이 존재하죠. - P47

사카모토: (전략) 노이즈를 배제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피라미드가 좋은 예인데, 인간은 아름다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육체가 혹사당한다 해도 그 사실을 감추려 하잖아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아인슈타인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만, 여전히 사람들은 노이즈 없는 심플한 아름다움을 좋아하죠. 울퉁불퉁하지 않고 반들반들할수록 찬양과 감탄을 불러일으키고, 건축도 곧은 것이 아름답다고 평가됩니다. - P5152

사카모토: (전략) 과학 역시 ‘지‘와 노이즈를 포함한 총체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할 수 없다면 본질적인 진리에는 도달할 수 없을 거예요. - P55

사카모토: (전략) 앨범에 담는 음악은 어느 지점에서 끝나야겠지만, 시작과 끝이 있는 하나의 시간이 아니라 복수의 시간이 동시에 진행되어 영원히 ‘반복‘이 일어날 수 없는 음악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기도 하고요. - P60

사카모토: 나 자신이 자연이라는 걸 깨닫고 난 후부터는 항상 그 사실을 의식하게 됐어요. ‘내 신체는 자연물이라 통제할 수 없다. 매일 변화하는 것이 당연하며 감기도 걸리고, 병도 걸리고, 태어났으니 죽을 테고, 이윽고 붕괴할 것이다.‘와 같은 생각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엔트로피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 아닌가요? - P9091

사카모토: 로고스로 설명하지 못하면 뉴에이지New Age(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영적인 운동을 말한다-옮긴이)의 세계가 되어버리니까요. 미국 과학자 중에도 뉴에이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있지만, ‘요즘 그 사람, 뉴에이지가 다 됐던데‘라는 평가를 듣지 않으려면 로고스적 이해로도 납득할 수 있는 형태를 만들어야 하잖아요. 그들을 이해시키려면 로고스라는 공통 언어를 쓸 수밖에 없죠.

후쿠오카: 바로 그거예요. 피시스와 로고스의 대립에서 느닷없이 피시스 쪽으로 가버리면, 뭐랄까, 오컬트적으로 접근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리니까요. 세계는 항상 진동하고 있다는 식의 ‘뉴에이지스러운‘ 느낌은 지양하고 싶어요. - P119120

사카모토: 그 발견이야말로 굉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에도 시대(1603~1868년-옮긴이)에 미우라 바이엔이라는 사상가가 있었는데, ‘고목에 꽃이 피는 것보다 살아 있는 나무에 꽃이 핀다는 사실에 놀랄지어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나무에 꽃이 피는 자연의 섭리야말로 진정 경이로운 것이란 뜻인데, 바꿔 말하면 ‘당연해 보이는 일들이 얼마나 기적적인가‘라는 얘기죠. 후쿠오카 씨가 실험을 통해 느낀 바와 완벽히 일치하는 것 같아요.
이런 인식은 ‘생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라는 바울의 말과도 연결됩니다. 바울로의 논리는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로 귀결되지만, 결국 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할 정도의 기적이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이런 기적 같은 자연의 섭리가 없었다면, 과연 생명이 이 엄청난 격랑 속에서 38억 년이라는 시간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요. - P139

사카모토: 비유를 해보자면 지금 설명하신 것처럼 원이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 자체는 물질세계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로, 항상 일어나고 있죠. 그러다 어느 순간 결함이 생기고 나아가 분해 쪽이 근소하게 많아지는 가장 좋은 균형에 도달합니다. 이 우주 안에도 그런 도달의 순간이 분명 존재할 거예요.

후쿠오카: 말씀대로 태양계의 출발점이 46억 년 정도 전이고, 처음 생명이 등장한 것이 38억 년쯤 전이니까 불과 8억 년밖에 여유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 8억 년 사이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해도, 그런 우연의 균형을 잡아낸 순간이 단 한 번이라도 존재했다는 건 정말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사카모토: 시행착오를 겪는 8억 년 동안에는 생명이 되지 못한 채 그저 물질로 끝나버리는 존재도 무수히 많았을 거예요. 그렇게 계승되지 못한, 이른바 생명 동지들의 흔적이 어딘가에 남아 있으면 좋을 텐데요. - P170171

사카모토: 맞아요. 누군가에게 연주되어 소리가 되지 않는 한, 음악이라 할 수는 없으니까요. 악보라는 건 ‘뉴턴적‘인 절대공간, 절대시간, 균질한 시공간처럼, ‘그 점을 어디에 두든 똑같다, 그저 값이 다를 뿐‘이라는 사고방식을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P175

사카모토: 그렇습니다.
특히 최근 몇 세기 사이, 악보 체계는 보다 복잡해지고 점점 정밀화되고 있어요. 20세기에는 오선지가 너무 조잡하다며 기하학에서나 쓸 법한 모눈종이에 치밀하게 악보를 적어나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죠. 서양음악계에는 애매함이 개입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모든 걸 숫자로 지정하는 악보를 쓴 작곡가도 있고요. 이런 점은 과학과 유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후쿠오카: 그러네요, 과학과 비슷해요.

사카모토: 그렇게 되면 당연히 수학과 비슷한 느낌으로 ‘자신의 소우주를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열정을 쏟게 되죠.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접근으로, 아무리 노력한들 악보가 음악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곡가는 자신이 일종의 신의 관점을 지녔다고 오해하기 십상이라, 그 소우주를 창조하는 일을 최종 목적으로 착각하기도 해요.

후쿠오카: 생명과학 역시 마찬가지예요. 유전자에 적혀 있지 않은 것은 생명현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유전자 만능주의가 횡행하고 있으니까요. - P176177

사카모토: (전략) 악보 만능주의가 옳지 않다고 깨닫게 된 건 어느 훌륭한 연주자가 제가 막 작곡한 신곡을 눈앞에서 연주해준 순간이었습니다. 분명 제가 악보 속에 소우주를 만들어놓았는데, 그녀가 연주를 시작하자 제 머릿속의 그림과는 다른, 더욱 근사한 음악의 우주가 펼쳐지더군요. 그때 ‘아, 그렇구나. 음악이라는 소우주를 만드는 건 작곡가만이 아니었어. 연주자도 똑같이 만들어내고, 때로는 작곡 이상으로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구나‘라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었고 그 이후로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바뀌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이번에는 ‘듣는 사람이 없으면 진정한 음악은 성립하지 않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의 현대음악은 들려주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었달까, 청중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예술가답고 멋지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저도 거기에 꽤 영향을 받았고요. 그런 제가 바뀐 건 ‘듣는다‘는 행위가 음악의 중요한 요소임을 강하게 의식한 이후부터입니다. 비록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음악의 원환圓環이란 악보를 쓰는 사람, 연주하는 사람, 듣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성립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죠. - P180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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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생명의 언어라면 - 수면부터 생체 리듬, 팬데믹, 신약 개발까지, 생명을 해독하는 수리생물학의 세계
김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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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수학 교육에서 미적분의 역할에 대한 논쟁은 종종 들어 왔다. 즉 그리 신선한 주제는 아니다. 학교에서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서 그 무용성을 지적하는 의견이 있다. 그 맞은편에 미적분의 효용이 최근의 과학과 기술 발달에서 얼마나 광범위한지, 대학에 입학해서야 필요한 학과에서 새로 가르치느라 어떤 비효율이 일어나는지 등의 반박도 있다. 이렇게 상이한 입장들은 물론 대학 입시라는 장에서 가장 날카롭게 부딪힌다. 하지만 수학 교육과 미적분의 역할에 관한 더 큰 문제는 대학교와 대학 입시 너머에 있음을 이 책은 선명하게 보여 준다.

 

그렇습니다. 적분은 쉽게 측정할 수 있지만 그다지 관심 없는 속도로부터 궁금하지만 측정할 수는 없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

 

미적분학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30

미분은 속도 변화를 직관적으로 묘사하게 해주고, 이것의 적분은 직관적이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게 해줍니다. -48

 

 이 책의 부제처럼 수면부터 팬데믹까지수리생물학은 인간의 직관이 놓치거나 풀지 못한 생명 현상의 원리를 이해하고 방향을 예측한다. 그 핵심 수단이 본질적으로 계산 기계인 컴퓨터이며 그 컴퓨터의 핵심 언어는 미적분이다. 그리고 컴퓨터와 미적분이 결합해 생명 현상을 번역하는 수리생물학에서 의학, 약학, 생명과학 등의 연관 분야와의 협업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의 미적분은 인간이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계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직관으로 해석할 수 없는 생명 현상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는 수리 언어의 핵심 문법이 미적분이다. 인간의 역할은 생명 현상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도록 미적분으로 묘사하고, 그 컴퓨터가 생명 현상을 해석하는 과정을 운용하는 것이다. 당연히 인간이 미적분을 잘 알아야 하지만, 그 구체적, 세부적 계산까지 인간의 몫은 아니다.

 

이번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기존의 치료 체계를 여러 관점에서 더 정밀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치료 시간의 관점에서, 그리고 성별의 관점에서 질병을 바라볼 때 비로소 더욱 효과적인 치료도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특히, 시간이라는 차원을 추가해 약의 효과를 예상하려면 시간에 따른 변화를 예측하는 미분방정식 기반의 수리 모델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132

이렇게 계산 결과를 보면 납득이 가지만, 이 결과를 보기 전까지 정상세포와 감염 세포의 수가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컴퓨터를 이용하기 전에는 우리가 직관을 이용해 얻은 결과들이 언뜻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우리의 직관에 잘 와닿지 않더라도 정상 세포와 감염 세포의 수가 오르락내리락하며 서로 공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시스템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이보다 훨씬 복잡한 실제 생명 시스템을 인간의 직관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불가능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결론을 내릴 가능성도 높습니다. -53~54

 

 생명 현상은 생명체의 평생부터 하루하루의 생존까지 시간 척도 간의 편차가 크고, 생명체 내외에서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종류와 그 요인들이 상호 작용하는 양상은 다양하다. 결국 이 모든 조건이 결합한 생명 현상은 인간이 한번에 하나로 꿰어서 직관적으로 예측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영역이다. 애초에 인간의 인지 능력은 이런 수준의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하는 상황까지는 상정하지 않고 진화했다. 이제야 급하게 필요해졌지만 준비되지 않은 역량이다. 생명 현상을 미적분으로 묘사하는 수리생물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이 복잡한 주제를 정확히 분석할 수 있어서인 동시에, 인간의 인지적 특성이 이 주제와는 영 상성이 좋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인간이 생명 현상의 방정식을 포괄적으로 구성하는 측면과 그 미적분을 토대로 컴퓨터가 생명 현상을 구체적으로 계산해석하는 측면은 구분될 수밖에 없다. 미적분의 역할과 효용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것과 그 계산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완전히 같은 의미도 아니다.

 

 따라서 미적분의 계산 원리를 교육하고 숙지하며, 미적분 계산 능력을 제고하는 것만이 미적분의 유일한 의무 교육 방식은 아니다. 그것이 정량적 평가와 대학 입시를 전제한 가장 효율적, 일반적인 미적분 교육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미적분이 필수적인 의무 교육 과정에 편성되어야 할 이유를 보여 주지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교육 방식은 내가 겪었거나 생각하는 그것과 다를 듯하다. 미적분은 생명 현상을 번역하는 수리 언어, 수식의 핵심 문법이지만 연구 주제가 아닌 연구 도구다. 인간이 미적분이라는 도구 자체가 될 필요는 없는 셈이다. 그래서 더더욱 모두가 미적분을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할지라도, 가급적 많은 사람이 미적분의 역할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남에게도 말할 수는 있어야 한다. 미적분이 의무 교육의 필수 요소가 되어야 한다면 바로 그래서다.

 

융합 연구를 자주 하는 만큼, 강연이 끝날 때마다 자주 받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녀를 어떻게 하면 융합 연구자로 키울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저의 대답은 늘 똑같습니다. 융합 연구자의 두 가지 특성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첫 번째 특성은 대화를 유쾌하게 이어가는 것입니다. 운이 좋게도, 저는 지난 10여 년간 의학, 약학, 생명과학 분야 연구자들 수십 명과 협력해 융합 연구에서 여러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실패한 공동 연구도 있었지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융합 연구를 함께 성공적으로 끝맺은 이들은 모두 유쾌한 대화 상대였습니다. (중략)
두 번째 특성은 자신이 아는 것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잘 설명하는 것입니다. 융합 연구는 서로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여 동일한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219~220쪽


 결국 이 책은 미적분을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수학자의 글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막연하거나 단호한 당위의 영역과 무관하다. 뿐만 아니라 저자 본인의 구체적이며 유연한 융합 연구, 협업의 성과를 미적분의 가치와 효용으로 연결하는 까닭에 설득력이 더욱 높다. 수학교육으로 학부를 시작한 저자가 최근 각광받는 수리생물학자가 되기까지의 과정, 의학약학면역학 등 수학적 접근이 낯선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해 연구한 경험들, 생명과학의 오랜 난제 앞에서 수학자로서 겪은 시행착오까지 간결하면서도 진솔하게 풀어내서 더욱 흥미로웠다. 앞으로도 저자에게 이렇게 대중적인 저술까지 할 수 있는 환승 시간들이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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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할아버지가 오래 알고 지내던 손님이 다도실을 리뉴얼하는데 문고리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잘은 모르나 손님의 어머님이 다도 선생님인데 희수 기념으로 개장하는 것이라 축하의 의미를 담은 디자인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단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형이 "거북이 문고리가 좋겠네" 하고 중얼거렸다.
당시 형은 아직 여덟 살 정도였는데 창고 안에 있는 부품 전부를 놓아둔 장소까지 달달 외웠다.
깜짝 놀란 할아버지가 형과 함께 창고를 보러 가서 형이 꺼낸 문고리를 보고 또 놀랐다고 한다. 오래된 물건이지만 상태도 좋고 거북이 등딱지 부분에 손을 잡도록 만들어놓은 디자인도 근사했기 때문이다. 결국 할아버지는 그 문고리를 사용하였다니 그때부터 이미 형은 상당한 심미안을 지녔던 듯하다.
그렇게 그 무렵부터 문고리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는데,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잘은 모르나 교토의 가쓰라리큐(일본 왕족의 별장—옮긴이)에는 ‘달‘을 본뜬 문고리가 많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그 문고리를 느긋하게 손질하고 싶어."
그 장면을 상상하는지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형 모습을 기억한다.
나도 형 일을 돕게 된 이후 그 문고리를 사진집 등을 통해 보았다.
확실히 한자 ‘달 월‘ 자를 본뜬 모양이나 달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모양 등 가쓰라리큐를 위해 특수 제작한 그 문고리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지금이라면 형이 넋을 잃는 것도 이해하지만, 당시 문고리라는 존재는 ‘우리 형은 어쩌면 조금 별난지도 모르겠다‘라고 인식한 계기에 불과하다. - P15.16

도자기를 잘 모르는 나도 네즈미시노(1570년대 일본 기후현 미노 지역에서 하얀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를 이르는 말—옮긴이)가 도자기 종류 중 하나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좋은 찻종,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져 경매될 정도의 유래가 있는 찻종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는 물건이 많다는 것도 안다.
‘가마이타치‘는 통통한 네즈미시노 회색 찻종의 이름인 듯하다.
찻종에는 풍류적인 이름이 많다. 그 찻종의 ‘정경‘(구운 색, 표면의 모양, 요철, 겉모양의 인상 등을 빗대 이렇게 말하는 모양이다)을 표현했다고들 하는데 나로서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많다.
"뭐? 이 모양이 학으로 보인다고? 정말로? 으음, 그거 거의 로르샤흐 테스트 아니야? 그 왜 그림을 그린 후 반으로 접은 다음에 펼쳐서 나온 모양을 보고 무엇으로 보이는지 조사하는 정신 분석 같은 거. 손님, 괜찮아? 고민이라도 있어?"
이렇게 묻고 싶어질 때도 있다. - P35

S 선생님은 유명한 젊은 다도 선생님인 모양이다. 고미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그에 관한 에세이도 썼다고 한다.
"선생님이 가마이타치로 몇 번인가 차를 우리셨대. 그러고는 ‘사용감은 아주 좋은데, 어쩐지 심보가 고약한 구석이 있군, 이 찻종‘이라고 말씀하셨어."
흠.
"심보가 고약하다는 게 무슨 의미야?"
"글쎄. 나도 그렇게 되물었는데 선생님도 ‘설명을 잘 못하겠네‘ 하시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뭐라 해야 좋을까. 붙임성 있고 상냥해서 쉽게 친해진 사람인데 다른 곳에서 내 험담을 하는 걸 들었다는 느낌이랄까‘라고 하셨어."
그것이 ‘가마이타치‘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일까. - P38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우리는 언뜻 보기에 평범하게, 하지만 나름대로 꽤 감칠맛 나는 인생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를 테니 떳떳치 못한 심경일 때도 있고 스릴을 느낄 때도 있다. - P97

어디까지나 나는 ‘커피숍에서 치즈케이크를 먹는 것을 좋아한다‘이기에 ‘치즈케이크를 사서 집에서 먹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행동이고 흥미가 없다. - P102.103

카페 문화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서 인구 대비 커피숍이 확연하게 많은 곳과 적은 곳이 있다.
적은 곳도 카페 문화가 없어서가 아니다. 옛날부터 다도가 성행했던 곳에는 자택에 화로가 있어서 차를 끓이는 습관이 있기에 밖에서는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다.
그런가 하면 커피숍이 잔뜩 있어서 휴일에는 가족끼리 단골 커피숍에 가서 브런치를 먹는 곳도 있으니 식문화는 그야말로 흥미롭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곳저곳에서 가게를 방문하는 일은 직업상 이동이 많은 형과 나의 자그마한 즐거움이다. - P104

처음 들어간 가게에서는 역시 블렌드 커피를 주문하는 것이 기본이다. 블렌드는 점주의 취향이 드러나기에 자신의 취향과 맞는지도 알 수 있다. - P107

K 점주가 집 정리를 부탁하고 싶다는 친구를 소개해주고, 끝내는 자기 가게의 폐점 정리도 맡길 정도로 친해지리라고 이때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N마치는 오래된 역참 마을로, 작지만 오랫동안 교통의 요지 중 하나였다. 이런 곳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사람과 물건의 왕래가 잦고 갖가지 물건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 뒤로 고마운 매입처 중 하나가 되었다.
처음으로 우리가 K를 방문한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K 점주에게 연락이 왔다. - P119

나는 타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 P127

이발사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몰랐는데 일본 타일은 정해진 몇 곳에서 거의 다 만들어진다더군."
"네, 메이지 시대(1868~1912년)에 국가가 운영하는 연구소와 공장이 교토에 세워지고, 국가 주도로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원래 요업이 성행했는데 처음에는 주로 메이지 유신으로 고객을 잃은 교야키(교토에서 만들어지는 도자기의 총칭—옮긴이) 장인이 중심이 되었다고."
형이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군. 형은 K에서의 일 이후 타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 P127

약속한 가게가 있는 곳은 신바시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커다란 상업빌딩이었다.
옛날에 지어진 빌딩은 어쩐지 분위기가 독특하다. 묵직한 공기, 느긋한 통로 공간. 전체적으로 만듦새에 여유가 있고 잘 닦여진 바닥이 둔탁하게 빛난다. - P133.134

이 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그 여기저기에서 부모님이 만든 집과 시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것이 또 엄청나게 많아서 설마 이런 벽촌에(실례)까지, 하고 생각되는 장소에서도 일한 흔적을 만난다.
"아버지랑 어머니, 얼마나 일을 하신 걸까."
"이러니 우리가 얼굴도 거의 못 보지."
"이런 페이스로 계속 일을 했다면 사고를 당하지 않았어도 언젠가 과로사하셨을 거야."
세계 유산에 등재된 산골짜기의 오래된 집락을 방문했다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이 지은 민가를 발견했을 때는 형도 나도 기가 막혔다.
두 분이 지은 집은 어째서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고, 마음을 담아서 지었다는 점이 전해져왔다.
친밀감이 있고 아담해서 마음이 편안한 집. 이런 집이라면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집.
일반적으로 건축가는 자택에 자신의 사상을 담아 그것을 명함 대신으로 한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결국 두 분은 자신들의 집을 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 P155

둘째, 이것은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낀 것인데 세상은 거의 모든 일이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시작할 타이밍, 무언가를 그만둘 타이밍, 무언가를 물을 타이밍 그리고 무언가를 고백할 타이밍.
세상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있으면 그것은 대개 그쪽에서 다가온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더라‘, ‘지금밖에 없다고 직감했다....... 이런 타이밍은 대체로 옳다. - P193

촉촉이 비가 내리는 오후, 우리는 교토에 있었다.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교토는 사족을 못 쓰는 곳인지, 일을 끝낸 다음이라고는 하나 형은 항상 교토에 들를 때마다 자신의 문고리 컬렉션을 찾아 헤맨다.
형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한 골동품점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문고리는 없었지만 형은 우아한 앤티크 경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원한다고 생각하는지는 천차만별이라, 그 덕에 이 장사가 성립될 수 있는 거라 절실히 느낀다. 그리고 나는 경첩에 흥미가 없다는 사실도.
제시액이 서로 맞지 않아서 잠시 흥정이 이어진 결과 경첩은 그대로 그 골동품점에 남게 되었다. - P194

덧붙여 풍경 소인의 정식 명칭은 ‘풍경이 들어간 통신 날짜 소인‘이다. 요컨대 명승고적 등의 도안이 들어간 소인을 말한다.
우편을 보낼 때 일반적으로 찍는 소인은 날짜와 시간대와 담당 우체국 이름밖에 적혀 있지 않지만, 풍경 소인에는 각양각색의 정취가 느껴지는 도안이 그려져 있다. 가마쿠라의 대불이라든가 이세신궁 같은 명소의 그림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 특성 탓에 어느 우체국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나름대로 기념이 될 만한 것이 있는 우체국에 비치되어 있다.
물론 각 풍경 소인이 비치된 우체국에 부탁하지 않으면 찍을 수 없다. 우송도 의뢰할 수 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우표를 사서 메모장에 붙이고 창구에 내밀어 풍경 소인을 찍어달라는 기본적인 방법을 이용한다. - P248

"그래. 컬렉터는 모으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니 모으는 것 자체가 재미있을 뿐 실은 마음속에서는 컬렉션의 완성 그 자체는 바라지 않아. 모은다는 행위와 모은 것 하나하나가 내가 여기 있다는 존재 증명 같은 것이야. 내가 사라져도 물건은 남아. 내가 모은 것의 집합체가 내 인생의 덩어리 같은 거지."
잠깐 사이를 두고 형이 말을 이었다.
"네 풍경 소인을 보고 생각했어. 스탬프 랠리는 저도 모르게 모으고 싶잖아? 스탬프 수첩에 공백이 있으면 어떻게든 메우고 싶어져. 그것도 마찬가지야. 그 공백은 존재의 공백이야. 자신이 그곳에 없었다는 공백이 무서운 거야. 그러니 네가 말하는 ‘느슨함‘이 부러운 이유는 그 공백이 무섭지 않은 점, 공백을 개의치 않는 점이야."
"흠."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래서 컬렉터라는 인종은 그다지 자각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고 더 강하게 바라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
더욱더 예상외라고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형은 결코 ‘나서는 타입‘이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컬렉터 또한 소극적인 사람이 많으니 놀랍네."
"응. 나도 인생 자체에 집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분석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을 때는 뜻밖이었어." - P261.262

"참 재미있단 말이야. 일러스트레이터나 화가 본인과 만나면 ‘그렇군, 이 사람이 그런 선을 그리는구나‘ 하고 늘 이해가 돼. 이름은 몸을 나타낸다가 아니고 선은 몸을 나타낸다지." - P345

또 어디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나 긴장하는 동시에 우리는 이 장소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세월이 자아내는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셔터의 녹, 콘크리트의 갈라진 틈, 그러데이션으로 변한 함석 색깔. 그것이 고대 유적처럼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을 내보인다.
"장소의 힘은 엄청나니까 그 땅이 내뿜는 에너지에 어울리는 작품을 만드는 일은 힘들어요."
갑자기 다이고 하나코의 말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 P378

그녀들의 역할은 끝났다.
다이고 하나코에게 그 도란을 전해준 것으로 이제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밝은 여름이 눈앞에서 달려간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여름이라는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 P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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