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내 편지가 왜 내가 해독할 수 없는 형태로 암호화되어 있는지는 설명해 주지 않았는데요."
"음, 얕보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요. 대사님의 스테이션에서 대사님은 대단히 교육받은 분이시겠지요. 하지만 시티의 암호화는 대체로 시적 암호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비시민이 이걸 배웠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모름지기 대사의 편지란, 대사가 제국과 제국의 시를 잘 아는 유식한 사람이란 사실을 자랑하기 위해서 암호화되어 있는 거예요. 관례죠. 진짜 암호가 아니라 게임이에요."
"르셀에도 시는 있어요, 알겠지만요."
"알죠." 세 가닥 해초가 아주 동정심 어린 어조로 말하기에 마히트는 그녀를 잡아 흔들고 싶었다. - P5152

"상호간에 이득이 있는 속임수를 통한 문화 교류죠." - P82

마히트는 당황한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굉장히 기쁘다는 게 그리 자랑스럽지 않았다. - P89

세 가닥 해초는 모범적인 안내자였다. 그녀는 마히트의 왼쪽 팔꿈치 근처에 있었는데, 호기심 많은 테익스칼란인이 함부로 야만인 외부자에게 다가와 타이밍 나쁜 질문을 해야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가까우면서, 마히트의 좁은 개인 공간을 지켜 줄 정도로는 거리가 있었다. 그녀는 역사적 관심 지역에서 건축적 특징과 주목점을 가리키고, 참아야 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을 때면 다음절多音節의 2행 시구를 자동적으로 중얼거렸다. 마히트는 관계된 시가 그렇게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나온다는 점이 부러웠다. - P100

마히트는 테익스칼란어로 ‘폭발‘이라는 단어를 알았다. 군사 시詩의 핵심 단어로 대체로 ‘충격적인‘이나 ‘타오르는 불길‘ 같은 묘사와 함께 쓰였다. 하지만 이제는 고함 소리로부터 추론해서 ‘폭탄‘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짧은 단어였다. 아주 크게 외칠 만했다. ‘도와 달라‘고 외치지 않을 때면 사람들이 그 단어를 외쳤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었다. - P104105

"대단하기도 해라. 오전을 그렇게 보내고도 여전히 올바르게 행동하는군요."
마히트는 자신의 인내심이 다 했음을 깨달았다.
"제가 무례하게 구는 게 좋을까요?"
"물론 아니죠. 열아홉 개의 자귀는 디스플레이와 스크롤하던 투명한 창을 조수들에게 맡기고 마히트 쪽으로 다가왔다. "여기로 온 건 아주 잘했어요. 도착한 이래 당신이 한 첫 번째로 똑똑한 행동이었어요." - P124

항복하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을까? 최소한 깨끗한 포로가 되어야겠다고 마히트는 생각했다 - P125

만약 농담이라면, 그 유머는 너무 날카롭게 찔러 왔다. 그런 농담은 사람이 고통을 알아채기도 전에 피부를 벗겨 버릴 수도 있다. - P133

차를 놓고 나눈 대화 이후로 마히트는 빈정거리는 말을 그다지 잘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열아홉 개의 자귀의 핵심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빈정거림을 주고받고 싶게 하는 화려한 언변의 정치인인 동시에 대화를 속속들이 헤집고 이해받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울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 - P147

마히트는 받은 인포피시 스틱에 편지들을 저장하고, 스틱을 열면 메시지가 제대로 나오는지 하나씩 확인한 다음에 뜨거운 왁스로 봉했다. 사무실 문 옆의 작은 테이블에 있는 실링 키트에서 나온 왁스는 소형 에탄올 라이터로 녹여야 했다. 마히트는 왁스를 붓다가 엄지손가락을 뎄다. 빛으로 만들고 시로 암호화하여 만든 메시지를,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물리적 물체로 전하다니 완벽하게 제국스러웠다.
그야말로 자원의 낭비다. 시간과 에너지와 재료의 낭비.
이런 게 즐겁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 P154

메시지를 보낼 때의 문제는 사람들이 거기에 대답을 한다는 거고, 그 말은 그 답으로 메시지를 더 작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 P156

두 번째 인포피시 스틱은 어떤 면에서도 익명이 아니었다. 내부의 전자장치만 빼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그것은 짙은 초록색 왁스로 봉하고 그 위에 태양바퀴의 하얀색 상형문자가 찍혀 있었다. 과학부다. 스틱을 열자 우아하고 거들먹거리는 조그만 글자가 떠올랐다. 열 개의 진주는 마히트의 대사직 임명을 축하하고, 이스칸드르의 불운한 죽음에 정형화된 유감의 말을 보냈다. 하도 정형화되어서 즉시 그가 어느 실용 수사학 책에서 유감의 말을 복사했다는 걸 알아챘을 정도다. 어쩌면 마히트가 작법을 배웠던 바로 그 책일지도 모른다. 암시적 글을 쓰려고도 하지 않은 노력 부족에 굉장히 테익스칼란인 같은 모욕감을 잠깐 느꼈지만, 곧 테익스칼란 시민의 교육을 흉내 내려고 애썼으나 어색하고 한심한 모방밖에 못 하는 멍청한 야만인 노릇을 성공적으로 잘했다는 굉장히 개인적인 만족감을 느꼈다. - P158159

거울이 돼. 스스로에게 다시 말했다. 칼을 만날 때는 거울이 되는 거야, 돌을 만날 때는 거울이 되는 거야. 가능한 한 테익스칼란인이 되고, 가능한 한 르셀인이 되고, 또…… 아, 제기랄, 숨 쉬어, 그것도 해야 돼. - P163

"여기 사나요, 둘 다?"
"최근에는 그래요. 각하께서 우리에게 참 잘해 주세요."
"그분이 그러지 않으시는 건 상상도 할 수가 없군요." 그건 심지어 사실이었다. "당신은 그분의 사람이죠?"
"아주 오랫동안요. 맵을 갖기 한참도 더 전부터."
마히트는 다섯 개의 마노에게 여러 질문을 하고 싶었다. 하나하나가 그 전 것보다 더 사생활 침해적인 질문이었다. 그분을 위해서 뭘 하죠?가 첫 번째 질문이고, 그다음으로는 어떻게 그분의 사람이 됐죠? 그리고 아마도, 그분은 당신이 아이를 낳는 것을 원했나요? 하지만 실제로 물은 건 이거였다.
"뭐가 달라졌나요? 당신이 이사 오기 전에, 최근에요."
우주선 전망창 위로 반反햇빛 코팅제가 내려오는 것처럼, 다섯 개의 마노의 얼굴에서 솔직한 표정이 일부 닫혀 버렸다. - P167

"아뇨. 나에게 황제 폐하에 대해 이야기해 줄 게 아니라면요. 어제 저녁 내내 뉴스피드를 봤는데, 시티 바깥에서 온 사람은 모를 이 지역의 정치적 정서에 대충 익숙할 거란 전제로 이야기하더군요. 테익스칼란인이 아닌 사람이 그런 걸 모르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죠."
"제가 아는 것 중 뭘 알고 싶으시죠? 저는 심지어 귀족도 아니에요, 대사님."
다섯 개의 마노는 아들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라면 특유의 말하는 방식이 있었다. 자신을 아주 냉정하게 낮추기 때문에 유머 감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귀족은 아니지만 에주아주아카트의 하인, 황실에서는 급이 낮다고 해도 이건 훨씬 더 중요한 자리였다. - P168169

이상적인 때와 이상적인 장소에서 계승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요. 역사는 자극적인 변수들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각하."
열아홉 개의 자귀는 마히트가 흡족한 대답을 한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황제에게 자신의 몸에서 나왔거나 자신의 유전자에 의한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이 연령으로도 정신적인 면에서도 성숙하면 황제가 공동 황제로 주위시켜요. 그리고 나이 든 황제가 승하하면 별들이 알고 사랑하고 축복하는 새로운 황제가 이미 있는 거죠. 피로 만들어지고 햇빛으로 칭송을 받는 존재가."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죠?"
마히트가 냉정하게 물었다.
"충성스러운 병사 10만 명의 지지를 받는 어느 군 사령관이 우주의 좋은 기운이 자신을 황제로 지목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적게 일어나죠. 대사, 역사는 자극적이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정확하답니다."
그리고 얼마나 자주 황제가 자신의 후임으로 세 명의 통치위원회를 지명할까? 아마도 그리 자주는 아니겠지. 마히트는 생각했다. 뭔가가 잘못되었을 경우에만 그럴 거야. 적절한 후계자가 없을 때. 완벽하지는 않을 때. 설령 서른 송이 미나리아재비와 여덟 개의 고리가 90퍼센트 클론의 섭정 역할을 할 예정이라고 해도, 그건 길고 다툼이 잦은 섭정시대겠지. - P172173

두 번째 낭송은 각 행의 첫 글자들을 따면 시인이 잃어버린 가상의 연인의 이름이 되고, 그가 자신을 희생해 진공으로 뚫린 구멍에서 동료 선원들을 구하려 한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는 아크로스틱(acronic, 각 행에서 처음이나 중간, 끝의 말을 서로 이으면 어구나 문장이 되는 시의 형태)이었다. 그것을 듣다가 마히트는 자신이 테익스칼란 궁중에서 테익스칼란 시 대회를 들으며, 손에 알코올 음료를 들고 재치 있는 테익스칼란인 친구와 함께 서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열다섯 살 때 원했던 모든 것이었다. 바로 여기가.
그 사실에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대신에 불쑥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단절. 비인격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 P214

골라에트의 손이 마히트의 팔로 돌아왔고, 마히트는 상대방에게 혐오감 섞인 동정심을 희미하게 느꼈다. 이 여자는 정부에 의해 여기에 파견되었고, 그 정부는 새로 테익스칼란의 보호국이 되었고, 여자는 혼자였다.(마히트가 혼자인 것처럼. 하지만 마히트는 원래 혼자일 예정이 아니었다.) 테익스칼란에서 혼자 있는 건 깨끗한 공기 속에서 질식하는 것과 비슷했다. - P226

"휘차후이틀림."
"그게 이 새들의 이름인가요?"
"여기 있는 것들은 그렇게 불리지. 원래 있던 저 밖에서는 다른 이름이야. 하지만 이것들은 황궁의 벌새야. 르셀에는 새가 없다지."
"네: 마히트가 천천히 말했다. 이 아이는 이스칸드르와 아는 사이였다. 그리고 이스칸드르는 아이의 머리에 르셀 스테이션이 어떤 곳인지 일종의 환영을 불어넣어 놓았다. "없어요. 저희는 동물들이 별로 없지요."
"그런 장소를 한번 보고 싶네."
마히트는 중대한 정보의 조각을 놓치고 있었다.(그녀는 혼자 비공식적으로 이 아이를 만날 일은 원래 없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실 수 있지요. 전하는 젊고 권력 있는 분이십니다. 나이가 차셨을 때에도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르셀 스테이션은 전하를 맞이하는 영예를 기꺼이 누릴 것입니다."
여덟 가지 해독제가 웃었을 때, 그것은 열 살 소년의 웃음이 아니었다. 약간 특이하고, 씁쓸하고, 영리한 웃음소리였고 마히트는…… 정확히 뭐라 특정하기 힘든 어떤 감정이 들었다. 모성 본능의 흔적. 이 새들을 알고, 친구나 경호원도 없이 황궁에 홀로 남겨 둔 이 아이를 껴안고 싶었다.(어딘가에 분명히 경호원이 있을 것이다. 혹은 시티 그 자체가, 완벽한 알고리즘이 그들 둘을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다.) - P232

서른 송이 미나리아재비는 위험했다. 자존심 강하고, 영리하고, 남을 조종했다. 마히트는 왜 이 남자가 에주아주아카트가 되고 그다음에 황위의 공동 후계자가 되었는지 그의 활동을 직접 보면 이해하게 될 거라던 다섯 개의 마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그는 홀로그래프처럼 유연하고, 빛처럼 굴절되고, 각기 다른 접근법에서 각기 다른 말을 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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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즈) 파스칼은 수학 신동이었다. 그는 30대 후반에 이렇게 토로했다. "참된 증명이 있다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불확실성을 더욱 키울 뿐이다. 파스칼 말마따나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 P310

라 로슈푸코 공작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미덕에서나 악덕에서나 우리를 인도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자리에서 이렇게 덧붙이는데, 강물이 바닷물에 녹아들듯 미덕은 지기이익에 녹아든다. - P313

1950년대 초 존 내시가 랜드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냉전 정치 전략과 핵 억지를 연구하던 몇몇 박사후 연구원이 ‘수감자 딜레마’라는 게임을 생각해냈다. 이 이름이 하도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탓에 오늘날은 과거에 수감자 딜레마 없이 도덕철학을 연구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다. - P328

이기적 참가자는 상대방의 득실에 개의치 않는 사람인데, 둘 다 이기적이면 서로를 모래 늪에 끌고 들어가는 꼴이 된다. - P330331

분노는 요란하며 무언가를 널리 표출한다. 가장 비천한 폭력배조차 다음과 같이 존중을 요구한다. 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안 되지. 이건 받아들일 수 없어. - P368

인류학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전 세계에서 이른바 소규모 사회(목부, 어부, 유목민, 수렵 채집인 등)가 규칙을 집행할 단순한 제도를 어떻게 자발적으로 만드는지 기록하는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 규칙이란 협력하고, 어장을 공정하게 공유하고, 지속 가능한 숲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스트롬은 이 공로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오스트롬의 견해에 따르면 "제도는 사회적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한 유인책을 제시하는 수단이다." 유인책은 보상일 때도 있지만 처벌인 경우가 훨씬 많다. 이 의미에서 보자면 사회계약은 철학자들이 퍼뜨린 창조 신화가 아니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자발적으로 소규모로 생겨날 수 있다. - P376

무지의 장막이라는 시적 표현은 존 롤스의 철학을 송두리째 욱여넣은 캡슐이 되었다. 자신의 사상이 이렇게 압축되면 사상가로서 성공하기 힘들다. 쇼펜하우어 하면 우리는 으레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떠올린다. 라이프니츠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의 세계를 상징하고 다윈은 생존 투쟁을 상징하며 아인슈타인은 만물의 상대성을 상징하고 하이데거는 무화하는 무를 상징한다. 이런 무조건 반사적 연상은 무지를 가리는 간편한 장막 역할을 한다. 하지만 롤스가 말하는 ‘무지의 장막‘은 이런 뜻이 아니다. - P383

다시 말하지만 평판이 관건이다. 이것은 동료 처벌이 있는 상호부조 게임이나 간접적 대갚음과 분명 유사하다. 내가 부당한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제안자를 응징하는 셈이다. 나는 대가를 치르지만 큰 대가는 아니다. 내게 제안된 작은 이 전부다. 거절의 대가는 제안자가 훨씬 크게 치른다. 그뿐 아니라 나는 내가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입증하게 된다. 실은 나 자신에게만 입증했다. 실험자가 설명했듯, 실험 규칙에 따라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잠시당한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한다. - P393

의례적 싸움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슴은 경쟁자를 죽이거나 몰아낼 수 있다. 그러면 더 빨리 번식한다. 하지만 그 사슴의 새끼들은 싸움을 키우는 아비의 성향을 물려받는다. 그들은 무리 안에 퍼져 점점 자주 서로 맞닥뜨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전략은 같은 전략을 상대하기에는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자멸적이기 때문이다. 이 전략의 빈도가 억제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종의 유익은 부수적 보너스이지 의례적 싸움이 퍼지는 이유가 아니다.
영국의 이론생물학자 존 메이너드 스미스는 이런 종류의 논증을 처음으로 동원했으며 진화적 게임이론의 초석을 놓았다. 개체는 전략(이 경우는 확전 성향 x)을 물려받는다. 득실은 번식 성공률 증가로 평가된다. 득실이 크다는 것은 새끼를 많이 낳는다는 뜻이며, 이 새끼들은 부모의 성향을 물려받는다. 그러므로 빈도는 스스로를 조절한다. - P398

진화적 게임이론의 첫 번째 이론적 예측은 중무장한 종에서는 갈등이 쉽사리 확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예측은 기발한 방법으로 확증되었다. 종이 지닌 무기(이빨, 발톱, 뿔)가 치명적일수록 같은 종에게 무기를 쓰지 않으려는 행태가 더 흔히 나타난다. 반면에 무기가 빈약한 종(이를테면 평화의 상징 비둘기)은 상대의 목숨을 빼앗지 못하도록 하는 방지 장치가 전혀 없다. 이것은 단지 정상적 조건에서는 상대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약한 비둘기가 달아나면 그만이니 말이다. 비둘기를 새장에 가두면 서로 공격하다 죽이기도 한다. 비둘기는 서로에게 자비를 구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고 늑대는 적응했다. - P399

비트겐슈타인은 다음 문장을 지침으로 삼았다.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것의 사용이다"( 많은 부류에 대해서이기는 하지만). 그는 이 쓰임을 더 면밀히 들여다보기 위해 "언어를 말하는 것이 어떤 활동의 일부, 또는 삶의 형식의 일부임을 부각시키고자" 언어 게임이라는 방법을 고안했다. 수학철학자로서 그의 임무는 이 게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하는 것이었다. 게임에는 규칙이 있는데, 참가자들이 언제나 규칙을 자각할 필요는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규칙들을 끈질기게 하나하나 밝혀내고자 했다. 그는 ‘수학‘이라고 불리는 것 뒤에 매끈한 실체가 숨어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학의 "다채로운 혼합"을 이야기했다. 행성, 전파, 은하, 암흑 물질 등 천문학이 다 루는 다양한 현상은 하늘에 있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수학을 하나의 대상이나 하나의 방법으로 뭉뚱그릴 수는 없다. 수학은 잡동사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본보기를 따라 우리가 민족지학자처럼 수학제도諸島에 있는 미답의 해안에 상륙하여 원주민(수학자)들이 서로 어떻게 소통하는지 관찰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그들이 따르는 삶의 규칙, 즉 (비트겐슈타인이 애용하는 용어를 쓰자면) ‘삶의 형식‘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P414

증명은 정리를 다른 정리로부터 유도하는 행위이며 정의는 다른 정의에 근거한다. 물론 이것은 어느 단계에선가, 즉 공리에서 끝나야 한다. 공리란 개념에 대해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명제다. 오늘날 수학에서 공리는 거의 언제나 집합론의 측면에서 정식화된다. 이 관례에서 보듯 집합론과 수리논리학은 수천 개의 가지를 뻗은 수학이라는 거목의 뿌리다. 두 분야는 일반적 의미에서, 이를테면 튜링의 수업에서 상정한 수학의 기초다. - P427

수학 분야가 수백 개에 이르는데도 그 통일성은 다른 학문의 시샘을 살 만큼 굳건하다. 수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매우 현실적인 예를 들자면) 복소수와 유클리드 기하학의 연관성 같은 뜻밖의 연관성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통설이다.
이러한 만장일치가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인 세계수학자대회는 올림픽 경기처럼 4년마다 열린다. 이에 반해 물리학이나 생물학에는 세계 대회가 없다. 이런 세계 대회에서 벌어지는 수학적 대화를 알아듣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나머지 참석자들은 끈기 있게 자리를 지킨다. 게다가 수학자들 사이의 내부 서열(누가 누구보다 위인지)에는 놀라울 만큼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이를테면) 경제학에서 보는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 ‘사회학적‘ 의미에서도 수학은 여타 학문보다 더 통일되었다. - P430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수학이 엄청나게 넓은 응용 범위에서 주역을 맡음을 안다. 물론 몇몇 수학자에게는 이 측면이 (노골적으로 불쾌하지는 않을지라도) 부차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다. 순수한 학문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수론을 연구한 영국의 수학자 G. H. 하디는 『어느 수학자의 변명』에서 모든 응용을 한낱 ‘부수적 피해‘로 치부했다. 다행히도 가능한 모든 응용에서 벗어났고 아마도 언제까지나 그러할 분야들이 있다고 하다는 덧붙인다. 그가 든 사례는 일반상대성이론과 수론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요즘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은 GPS에 쓰이고, 수론은 모든 이메일 플랫폼에서 쓰이니 말이다. 신용카드는 소인수분해를 거쳐 암호화된다. - P432

수학의 효율성에는 기이한 구석이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둘은 아마도 서로 연관되었을 것이다. 하나는 전혀 달라 보이는 이론들 사이에 놀랍고도 때로운 으스스하기까지 한 교차 연결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추상의 사용이다. 이 성격은 수학을 혼란과 파멸로 직행시키는 오점으로 종종 간주된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추상이야말로 수학이 성공한 비결이다. 추상이란 수백 가지 세부 사항을 지우되 다른 가능성들을 상상하고 현실을 가능성과, 심지어 불가능성과 비교하는 자세다. 수학자들은 사고실험과 ‘~라면 어떨까‘의 장인이다. - P433

하지만 무언가에 ‘대해‘ 말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수학이 일조할 수 있다. 수학은 "부정확함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언어이니 말이다. - P434

쿠르트 괴델조차 "플라톤주의적 견해는 수학자들 사이에서 별로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었다. 1940년 저명한 과학사학자 E.T. 벨은 이렇게 썼다. "예언자들에 따르면 수학에서 플라톤주의적 이상을 따르는 최후의 추종자는 2000년엔 공룡처럼 멸종한 신세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새천년의 여명에 플라톤주의가 수학자들 사이에서 오히려 다시 득세했음을 안다. 공룡처럼 멸종한다니, 나 원 참!
실제로 오늘날 현업 수학자 대부분이 빅 스리의 동조자가 아니라 정체를 숨긴 플라톤주의자라는 것이 현재의 견해다. ‘저기 바깥에서‘ 한 단계 한 단계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객관적인 수학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다소 무의식적인 느낌이 수학자들을 이끈다. 이 수학자들은 스스로를 탐험가로 여긴다. 군, 다각형, 소수 같은 수학적 대상이 수학자에게 실재인 것은 두꺼비와 악어가 동물학자에게 실재인 것과 마찬가지다. - P440

(그나저나 수학이 이렇게 자립적이라고 해서 수학자들이 철학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많은 수학자는 수학이 발견되는 것인지, 발명되는 것인지를 놓고 몇 시간씩, 대개 늦은 시간까지 토론을 벌인다. 대체로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열정이 사그라들기는 하지만, 그것은 난제의 정답을 찾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체념했기 때문이다.) - P442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고찰하고 연구하면 완전히 이해하고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증명이 있다. 그것이 데카르트적 증명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 단계를 꼼꼼히 전개하고 한 줄 한 줄 기계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증명이 있다. 그것이 라이프니츠적 증명이다."
쾌락을 찾는 사람이라면 데카르트의 편에 서야 한다. 데카르트적 증명은 대체로 번득이는 이해, ‘아하!‘의 경험, 난데없는 깨달음과 관계있다. "이등변 삼각형을 증명한 최초의 사람.—그가 탈레스든 또는 다른 이름을 가졌든—에게 한 줄기 광명이 비쳤다." 이마누엘 칸트의 말이다.
이런 번득이는 이해는 결국에 가서는 섬광으로든 느린 여명으로든 덜 흡족한 다른 통찰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 무언가를 간과했거나, 반례가 제기되거나, 증명이 불완전하거나 심지어 틀렸을 수도 있다. ‘아하!‘에서 ‘아차!‘까지는 잔걸음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이 ‘아차!‘는 증명을 수선하거나 추측을 수정하거나 논박하는 방법들로의 통찰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결국에는 라이프니츠적 증명에서만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때가 되면 재미는 온데간데없다. - P474

하지만 약수의 합의 수열은 뚜렷한 재귀적 법칙을 따르는 반면에 소수의 수열은 (레온하르트) 오일러에 따르면 "질서의 기미를 조금도 나타내지 않는 듯하다. 소수의 수열은 누대에 걸쳐 수학자들의 어떤 시도에도 난공불락이었다. 오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정신이 결코 파고들 수 없는 어떤 신비가 있다고 믿을 이유가 충분하다." 소수는 두서없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 P486

리만 가설은 소수의 분포를 무작위 연쇄와 구별할 수 없음을 매우 분명하고 정확하게 선언한다. 자연수보다 규칙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한 반면 자연수의 구성 요소인 소수의 배열보다 불규칙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 P486

그건 그렇고 우리 고양이 몬티가 집필 시간에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내 요청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음을 꼭 언급해야겠다. 심지어 내 키보드를 고의로 밟고 지나가기까지 한다. 따라서 남은 실수는 모두 몬티 탓이다. - P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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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이상적 통치자가 되려면 우선 10년간 수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다행히 아무도 그의 제안에 호응하지 않았다. - P15

19세기를 거치면서 유클리드의 정리들이 모두 옳지만 몇 가지 증명은 불완전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이따금 유클리드의 논증은 공리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 ‘자명성‘을 써먹었다. 이를테면 A, B, C가 직선 위의 세 점이고 B가 A와 C 사이에 있으면 C는 A와 B 사이에 있지 않다거나, 삼각형의 한 변과 교차하는 직선은 다른 변과도 교차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했다. 무의식적으로든, 적어도 부지불식간에든 올바르게 증명되지 않은 것들이 현실에서의 공간 추론 때문에 ‘명백‘해 보인 것이다. 이런 결함은 첫 정리에서부터 나타났다. - P34

(다비트) 힐베르트의 책은 유클리드의 『원론』에 있는 구멍 몇 개를 메우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자명성‘과 ‘직관‘을 둘 다 없애 최후의 보루인 기초 개념과 공리에서 배제했다. 힐베르트는 기초 개념에 대해 공리를 따른다는 것 말고는 어떤 의미도 부여하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 P3536

유도할 수 있다면 주어진 것으로 가정할 필요가 없다. - P39

항해사와 지도 제작자의 검증된 구면기하학은 영락없는 타원기하학이다. 수학자들은 수백 년간 구면기하학을 코밑에 두었으면서도 이것을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모형으로 삼을 수 있다는 발상에 대경실색했다. 그들에게 결여된 것은 기하학 지식이 아니라 점과 직선 같은 낱말을 직관에 구애받지 않고 구사하려는 마음가짐이었다. - P48

기이하게도 시각과 촉각이 대립할 때는 촉각이 우선권을 가지는 듯하다. 연필은 물에 잠기면 꺾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연필이 곧다고 말한다. 촉각이 현실을 전달하고 시각이 외양만을 전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뭇가지 사이를 잽싸게 누비며 눈과 손을 협응시켜야 했던 유인원과 원숭이의 오랜 계보에서 우리가 진화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을까? 그런 존재에게는 촉각이 틀림없이 언제나 최종 결정권을 가져야 했을 것이다. 붙잡던 줄이 끊어지면 대가 끊길 테니 말이다. - P50

17세기 철학자들이 모두 위대한 기하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모두 그렇게 되고 싶어했다. 바뤼흐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유클리드방식(그의 표현으로는 모레 게오메트리코more geometrico)으로 썼다. 토머스 홉스는 원적문제§주어진 원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을 자와 컴퍼스로 작도하는 문제의 해법§을 거듭거듭 제시했다. 전부 틀리긴 했지만. - P52

양이 다른 양에 대해 음이라는 말은 다른 양 안에서 동일한 양만을 상쇄한다는 의미에서 반대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마누엘) 칸트는 이 주장을 설명하는 예를 몇 가지 제시한다. 범선 한 척이 포르투갈에서 브라질로 항해한다. 어느 날에는 12해리 전진하지만 그다음 역풍을 맞아 3해리를 잃는다. 그러므로 ‘음의 3‘해리를 총 이동 거리에 더해야 한다. 교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빚은 음의 재산으로 간주할 수 있다(이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음수가 인도에서 처음 도입되었을 때 원래 이름은 ‘빛‘이었다). - P56

빈 학파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바이스만은 『수학적 사고 입문Einführung in das mathematische Denken』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원을 품는 것을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과 혼동하면 결코 안 된다." 바이스만의 수학과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살았던 노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도 동의했을 것이다. - P57

실수는 격자점을 가르는 ‘절단‘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유리수를 크기순으로 정렬해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지루하고 명백하다. (0, 0)을 지나는 각각의 선은 평면 위쪽 절반에 있는 반직선을 정의한다. (0, 0)에 달려 시계 방향으로 움직이는 시곗바늘이 (c, d)를 지나는 반직선에 도달하기 전에 (a, b)를 지나는 반직선을 가로지르면 유리수 a/b는 유리수 c/d보다 작다. - P61

복소수를 다루는 수학자가 자신이 실수 쌍을 다루고 있으며 각각의 실수가 유리수 집합의 쌍이고 각각의 유리수가 정수 쌍이고 각각의 정수가 자연수 쌍이라는 사실을 늘 자각하지는 않는다. 이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문제를 곱씹기 시작하면 구두끈 묶는 동작을 머릿속에서 상상할 때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기 십상이다.
현업 수학자들은 그저 익숙한 작업을 할 뿐이다. 하지만 철학자는 점점 깊이 파고들려 노력하며, 수에 대해 당연하게 간주되는 괴상한 규약들을 맞닥뜨렸을 때 아이가(또는 칸트의 독자가) 경험하는 어리둥절함을 자각하고 싶어한다. - P62

분수는 음의 양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리수는 모든 고등 문명에서 쓰였는데, 이따금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이상한 제약을 받기도했다. 이를테면 고대 이집트에서는 1/n 같은 형식의 단위분수와 단위분수의 합만 썼는데, 어떤 단위분수도 두 번 나타날 수 없었다. 그래서 2/3은 1/3+1/3이 아니라 1/2+1/6로 표시된다. 이상하게 우회하긴 하지만 모든 양의 유리수를 이런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 P67

유리수는 정수에 없는 신기한 성질이 있다. 크기 순으로 정렬할 수는 있지만 ‘이 수 다음으로 가장 큰 수‘는 없다. 임의의 두 유리수 사이에는 수많은, 실은 무수히 많은 유리수가 있다. 유리수는 조밀하다. 수직선 위에 있는 임의의 두 점 사이에는 언제나 유리수가 있다. 유리수는 수직선을 뒤덮어 조그만 간격조차 남기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이 성질은 치수를 재기에 안성맞춤인 듯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유리수는 수직선을 덮긴 하지만 ‘채우진’ 못한다. - P68

플라톤 시대가 되자√2가 무리수라는 사실이 더는 당혹스럽지 않았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에서 동명의 새내기 수학자는 자신이 친구들과 함께 3부터 17까지의 모든 수의 제곱근이 무리수임을 증명해냈다고 지나가듯 언급한다(4, 9, 16의 제곱근이 무리수가 아니라는 사실과 2의 제곱근이 무리수라는 사실은 언급되지 않았다. 너무 명백해서 지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플라톤은√2가 무리수라는 사실을 힘주어 지적한다. "정사각형의 대각선이 변과 공약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인간이라고 불릴 값어치가 없다." 그즈음 히파소스의 충격적인 비밀은 상식이 되어 있었다. "믿음직한 헬레네인들이여, 이는 말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라네. 알지 못하는 것은 수치요, 안다 해도 별다른 덕이 아니라는 것이지." - P69

처음 무리수를 접했을 때의 경이감을 요즘도 느낄 수 있을까? √2가 무리수라는 사실은 (0, 0)에서 출발하여 (√2, 1)을 통과하는 반직선이 x와 y가 정수인 어떤 격자점 (x, y)와도 만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평면에는 무한히 많은 격자점이 있으나, 반직선 중에는 어느 격자점에도 걸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 무한 속으로 항해하면서도 격자점을 하나도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 P69

물론 실수를 복소수로 확장하면서, 그리하여 수직선에서 복소 평면으로 이동하면서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다. 실제로 실수는 크기순으로 정렬되는 반면에 복소수는 그렇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복소수는 여러 방법으로 정렬할 수 있지만 그때마다 일반적 산술 규칙에서 말썽이 벌어진다. 이 규칙들은 제곱수가 음수일 수 없음을 함축하는데도 √-1의 제곱은 음수다. - P7879

가장 오래된 셈 흔적은 이상고 뼈로, 약 2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성적 학자들은 뼈에 11, 13, 17, 19개의 새김눈이 파여 있다고 주장한다(뼈에 관한 여러 주장이 그렇듯 여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수들은 10과 20 사이의 소수다(여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 P83

귀납에 의한 증명은 수학자에게 대단한 기쁨을 선사한다. 수학자들은 이런 증명을 숱하게 보는데, 대학 1학년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각각의 증명은 무한히 많은 논리적 단계의 연쇄다. 지퍼처럼 자르륵 풀린다. - P89

(주세페) 페아노에 따르면 자연수는 각 원소가 ‘후속자‘라는 다른 원소 하나에 사상map하도록(화살표로 연결되도록) 대응이 정의되는 집합이다(이 사상을 S라고 부른다). 집합의 원소는 후속자가 저마다 다르다. 후속자가 아닌 원소는 하나가 있다(수학 용어로는 후속자 사상 S가 일대다사상이 아니라 일대일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전부 뭉뚱그리면, 공리에 따라 어떤 부분집합이 후속자가 아닌 원소를 포함하고 각각의 원소에 대해 그 후속자도 포함하면 이 부분집합은 전체집합이어야 한다.
이게 전부다. 산술에 필요한 공리들은 이게 다다.
후자가 아닌 원소가 하나뿐일 수밖에 없음은 쉽게 알 수 있다. 그 원소의 이름은 1이다. - P91

(게오르크) 칸토어의 생각에서 관건은 어떤 통찰이었다. 우리는 집합 A의 원소 개수가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하면서도 집합 B만큼 많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A의 원소와 B의 원소 사이에 일대일대응이 존재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면 두 집합은 원소 개수(수학 용어로는 기수)가 몇 개인지와 상관없이 같다. 이것을 대등하다라고 한다.
마라톤을 구경할 때는 선수의 인원수를 세지 않아도 왼발 개수와 오른발 개수가 같음을 알 수 있다. 거실에서 모든 찻잔이 받침에 놓였고 빈 받침이 하나도 없으면 찻잔 개수와 받침 개수가 같음은 세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 P9697

지금까지의 결과는 모든 무한집합이 가산적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하지만 칸토어가 발견했듯 그렇지 않다. 그의 집합론은 이 지점에서 신기원을 열었다. 무한의 크기가 하나뿐이라면 재미없을 것이다.
칸토어는 구간에 있는 실수(이를테면 0과 1 사이의 실수)를 열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칸토어 스스로 여러 증명을 고안했는데, 마지막 증명은 하도 기막히게 기발해서 자신의 논증이 빈틈없는지 몇 번이고 의심했을 정도다. 그는 (다비트) 힐베르트를 비롯한 동료들에게 걱정 어린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는지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증명은 어이없을 만큼 쉬워 보였다.
오늘날 칸토어의 대각선 논법은 충분히 검증된 친숙한 도구로, 간접적 방법을 활용한다. 0과 1 사이의 모든 실수를 열거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이 실수들은 0.5000・・・ 이나 0.333・・・처럼 맨 앞에 0이 오고 다음에 점이 오고 그 뒤에 무한한 숫자 연쇄가 오는 십진법의 전개식에 대응한다. 실수가 위의 가정처럼 정말로 열거 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목록을 전부 줄줄이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크기별로 배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이제 다음과 같은 전개식으로 수 하나를 구성해보자. n번째 자리에 있는 숫자에 대해 위의 목록에서 2번째 실수를 골라 n번째 자리에 있는 숫자를 다른 숫자로 바꾼다. 그러면 계단을 내려가듯 대각선을 따라 차례로 내려가면서 2번째 계단에서 만나는 모든 숫자가 다른 숫자로 바뀐다. 이렇게 하면 0과 1 사이의 실수에 대한 전개식을 얻는다. 그런데 이 수는 우리의 목록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실제로 n 자리에 있을 수 없다. n번째 숫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n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방금 구성한 0과 1 사이의 실수는 우리의 목록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모든 실수를 나열했다는 가정과 모순된다. 그러므로 실수는 열거 가능하지 않다. 실수는 비가산적으로 많다. - P99100

칸토어는 연속체보다 큰 기수(원소 개수)가 많음을 증명했다. 이를테면 ‘직선의 모든 부분집합의 집합‘ 크기가 있다. 실제로 그는 무수히 많은 무한 기수를 발견했으며 이내 수학자들이 그 기수들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계산 규칙은 놀랍도록 괴상하다. 하지만 연속체의 기수보다는 작지만 자연수의 기수보다는 큰 기수가 있는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모든 비가산 실수 집합은 연속체 전체의 크기를 가져야 할까? 이 주장을 ‘연속체 가설‘이라고 한다.
칸토어의 혁명적 발상은 많은 반발을 샀으며 그는 격렬한 논쟁에 휘말렸다. 칸토어가 논쟁을 찾아다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칸토어는 수학을 연구하지 않을 때는 셰익스피어 희곡의 진짜 저자가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가설을 옹호했다. 이 주장은 실무한 못지않게 평생을 허비할 수 있는 논쟁거리다.
베이컨 가설과 달리 집합론은 인정을 받았다. 칸토어는 할레에 있는 군소 대학에서 일생을 보냈음에도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897년 (자신이 출범에 큰 역할을 한) 제1회 세계수학자대회에 참석했을 때 그는 많은 강연에서 자신의 이론이 기정사실로 취급되는 모습을 보았다. 한 세대가 채 지나지 않아 집합론은 모든 수학 분야의 공통 기초가 되었다. - P103

대부분의 수학자는 칸토어를 확고히 지지했으며 오리가 물을 좇듯 집합론을 좇았다. 언제나 카리스마가 넘쳤던 다비트 힐베르트는 이렇게 포효했다. "누구도 우리를 칸토어가 창조한 낙원으로부터 내쫓지 못하리라." - P104

자연수에 대한 (고틀로프) 프레게・(버트런드) 러셀 접근법은 수학의 기초를 다지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은 집합론에서 자연수를 도출하는 상향식 방법이 프레게・러셀 접근법을 대체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방법은 요한 폰 노이만이 제시한 것으로, 그가 갓 스무 살(영재가 은퇴하는 시기)이 되었을 때 발견했다. - P105

기수는 집합의 크기를 나타내며 서수는 배열을 묘사한다. 유한집합에서는 기수와 서수가 대략 같다. 기수는 "일, 이 삼"으로 세고 서수는 "첫째, 둘째, 셋째"로 센다는 것만 다르다. 무한집합은 사정이 달라서 기수적 무한의 산술 규칙과 서수적 무한의 산술 규칙이 따로 논다.
집합을 배열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전문용어로는 정렬이라고 한다. 이 말은 모든 원소가 선형적 순서로 놓였다는 뜻이다(임의의 서로 다른 두 원소 x와 y에 대해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작다. 또한 x가 보다 작고 y가 2보다 작으면 x는 2보다 작다). 이와 더불어 정렬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에는 가장 작은 원소가 있다(가장 큰 원소가 있을 필요는 없지만). 이를테면 자연수 집합은 ‘자연적‘ 방식으로, 말하자면 {1, 2, 3, ・・・}으로 정렬되며 ω에 대응한다. 1을 맨 뒤로 보내 다시 배열할 수 있는데, 그러면 {2, 3, ・・・, 1}이 된다. 이 정렬은 ω+1에 대응한다. - P109

이 ‘생각의 표현법‘ 중에서 논리적으로 옳은 것은 열다섯 가지로 밝혀졌다. 전통적 설명에는 몇 가지가 더 있는데, 이는 고대인의 용법 중 일부가 오늘날 수학자들의 용법과 약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A는 B다"라는 명제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A라는 성질을 가지는 대상이 존재함을 함축하는 데 반해 현대의 수학적 규약에 따르면 A라는 성질을 충족하는 것이 전혀 없어도 무방하다. 말하자면 대응하는 집합이 공집합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용은 귀엽다"는 애초에 용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옳은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마도) 대부분의 일반인은 이 명제를 거짓으로 여기거나, 만일 참으로 받아들인다면 용의 존재를 함축한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이 용법은 우연한 회심conversio per accidens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스콜라철학자들의 골머리를 썩였다. - P114

아래의 열 가지 전제가 성립한다고 가정하자.

1. 이 집에 있는 유일한 동물은 고양이다.
2. 달 바라기를 좋아하는 모든 동물은 애완동물로 적합하다.
3. 나는 동물이 혐오스러우면 멀리한다.
4. 어떤 동물도 밤에 돌아다니지 않는 한 육식동물이 아니다.
5. 어떤 고양이도 생쥐를 죽이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다.
6. 이 집에 있는 것 외에 어떤 동물도 내게 사근사근하지 않다.
7. 캥거루는 애완동물로 적합하지 않다.
8. 육식동물을 제외한 어떤 것도 생쥐를 죽이지 않는다.
9. 나는 내게 사근사근하지 않은 동물이 혐오스럽다.
10. 밤에 돌아다니는 동물은 언제나 달 바라기를 좋아한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논리적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나는 캥거루를 멀리한다(힌트: 달빛에 혹하지 말 것).
이 삼단논법 연쇄를 고안한 옥스퍼드대학교의 논리학자는 찰스 도지슨이다. 그는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으로 더 유명하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썼다. - P115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놀라운 통찰은 논증을 순수한 형식 계산으로 기술한 것이다. 명제의 내용은 진위와 무관했다. 그가 수학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규칙은 형식화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 P116

(영국의 조지 불 이후) 영국의 오거스터스 드모르간과 존 벤, 미국의 찰스 퍼스, 독일의 에른스트 슈뢰더, 이탈리아의 주세페 페아노가 진행한 연구를 통해 논리학은 점점 수학과 비슷해졌다. 이와 나란히 수학도 점점 논리학과 비슷해졌다. 수학 추론은 점점 엄밀해졌으며 수학 증명은 고생스러울 만큼 명시적으로 바뀌었다. 이런 발전이 (무엇보다 해석 과정에서) 절실히 필요한 곳은 새롭고 더 명시적인 논증이 놀라운 결과를 밝혀내는 분야였다. 그 놀라운 결과란 이를테면 연속함수 수열의 극한은 불연속적일 수 있다거나, 몇몇 연속함수는 어디서도 미분 가능하지 않다 등이며, 그 밖에도 비슷한 문제들이 밝혀졌다.
새로운 엄밀성을 앞장서서 옹호한 사람은 오귀스탱 루이 코시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였다. 훗날 프라하에서 베른하르트 볼차노라는 저명한 성직자이자 철학자이자 수학자가 이 발전들 중 상당수를 예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으며, 유일하게 관심을 가진 가톨릭교회는 그의 책들을 금서로 지정했다. 공교롭게도 수학에 집합 개념을 도입한 사람도 볼차노였다. 그는 집합을 부분의 배열에 의존하지 않는 다수로 정의했다. - P117118

이를테면 함수(더 일반적으로는 두 항 사이의 관계)는 영락없는 쌍의 집합이다. - P119

어떤 학문도 모순을 반기지 않는다. 모순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신호이니 말이다. 하지만 형식적 수학 이론에서의 모순은 훨씬 고약하다. 더는 가망이 없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다. 실제로 A와 A 아닌 것이 둘 다 참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A의 타당함은 임의의 명제 B에 대해 "A이거나 B가 참임을 함축한다. "A거나 B가 참이고 A 아닌 것도 참이기 때문에 B는 무조건 참일 수밖에 없다. 이러면 모든 것이 올스톱된다. - P128

힐베르트 프로그램은 오랜 기간에 걸쳐 꾸준히 발전했으며 힐베르트 자신과 여러 제자가 실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느닷없이 암초를 만났다.
쿠르트 괴델이라는 박사후 연구원이 빈에서 철학과 수학을 공부하고 힐베르트의 노선을 따라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낸 뒤, 힐베르트 프로그램이 결코 목표에 도달할 수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또한 같은 증명으로 괴델은 수학적 참과 형식적 증명의 간극이 메워질 수 없음을 입증했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정합적인 형식적 수학 이론에서 성립하는 모든 것이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정합성 자체가 이론 안에서 형식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괴델의 첫번째 불완전성 정리와 두 번째 불완정성 정리인 이 두 명제는 철학적으로 의미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수학적 정리이지 결코 ‘한낱‘ 철학적 진술이 아니다.
20년 뒤 하버드대학교에서는 괴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면서 불확정성 정리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수학적 진리‘로 천명했다. - P131132

현대에 들어 동료 평가는 새로운 수학적 생산물의 양에 짓눌리고 있다. 해마다 수천수만 명의 수학자가 수십만 개의 새 정리를 발표한다. 수학계에서는 동료 평가 학술지에 게재하여 정리를 검증한다. 이렇게 하면 각각의 새 논문은 적어도 한두 명의 평가자가 (바라건대) 비판적으로 읽었음이 보장된다. 하지만 평가자는 대체로 익명에 무보수여서 열심히 평가할 동기가 부족하다. 많은 오류가 걸러지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수학자들이 그 잘못된 결과를 이용하고 전파하게 된다. 증명을 샅샅이 들여다보는 데는 몇 달, 아니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현업 수학자가 독창적 연구를 하고자 한다면 다른 수학자가 발표한 이전 결과를 검증 없이 활용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피하다. 궁극적으로 오류가 생길 것이 뻔한 사회적 과정에 의존하는 격이다. - P163

동료 평가에 따르는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그에 따라 정리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것은 증명 보조기의 존재 이유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나머지 이유는 더 심오하다. 증명 보조기는 수학 전체를 완전하게 형식화하여 논리적으로 정당화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HOL 라이트의 핵심 프로그램을 이루는 500행의 컴퓨터 코드는 의심할 여지 없이 힐베르트를 놀라게 하겠지만 그의 인정을 받기에 족한 ‘기초‘다. 이 기초는 철학적 이상을 실현할 튼튼한 확실성을 선사한다. 그 도움을 받아 수많은 정리가 검증되었는데, 그중에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같은 가장 이름난 기념비적 결과도 허다하다. - P166

아르키메데스는 십진수를 쓰지 않았지만 원주율을 무한히 정확하게 구하는 기법을 개발했다. 그는 지름이 1인 원에서 출발하여 원에 외접하는 가장 작은 정육각형을 그렸다. 그 둘레 길이는 2√3이다. 이번에는 원에 외접하는 가장 작은 정12각형을, 그다음에는 정24각형을 그렸다. 이쯤 되면 변의 길이를 계산하는 일이 고약해진다. 제곱근을 어마어마하게 곱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끈기와 의지를 발휘하면 해낼 수 있다. 아르키데메스는 원에 외접하는 가장 작은 정48각과 정96각형의 둘레를 계산하고 그만두었다. 기진맥진해서exhaustion 그런 것은 아니었다. 원리는 명확했으며(‘실진법exhaustion principle‘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계산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184

극한에 도달하면, 거리의 계산은 무한히 작은 길이들을 무한히 많이 더하는 것과 같다. - P205

확률론은 종종 무작위성의 수학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볼테르는 무작위성을 부정했다.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가 우연을 이야기하는 것은 원인을 무시하고 결과만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볼테르가 자신의 기이한 복권 당첨을 의미심장하게 암시하려는 문장이 아니었다. 모든 근대 철학자의 확립된 견해였다. 적어도 뉴턴 시기에 이르자 세계관은 확고히 결정론으로 기울었다. 사실 수백 년 전에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되었고 지금은 과학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만 다르다. (지난 100년을 거치며 인과율과 결정론에 대한 견해가 또 다른 변화를 겪었는데, 이번에도 물리학 때문이었다. 무작위성은 양자역학에서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나는 독자 여러분을 저 지뢰밭에는 데리고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 P213

인간은 우연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도록 생겨먹었다. - P214

베르누이 법칙(그는 애정을 담아 ‘황금 정리‘라고 불렀다)은 다음과 같다. "실험을 충분히 자주 반복하면 어떤 사건의 상대빈도는 그 확률과 무작위적으로 작은 차이가 나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그럴 확률이 무작위적으로 크다."
(중략) 그의 법칙은 무슨 뜻일까? 원하는 만큼 여러 번 반복할 수 있는 실험(이를테면 동전 던지기)과 P(A)의 확률로 일어나는 사건 A(이를테면 50퍼센트의 확률로 일어나는 ‘앞면‘ 사건)를 생각해보자. 무작위적 정확도(이를테면 5퍼센트)를 하나 정하고 우리가 바라는 만큼 1에 가까운 확률(이를테면 99퍼센트)을 정하자. 베르누이의 황금 정리에 따르면 실험을 독립적으로 반복하는 횟수 N이 충분히 크면 사건 A의 상대빈도 N(A)/N와 그 확률 P(A)의 차이는 5퍼센트 미만이다. 달리 말하자면 상대빈도가 44퍼센트와 55퍼센트 사이에 있을 확률이 99퍼센트다. 충분히 여러 번 시도하기만 하면 된다.
이 법칙은 여러 번 반복하는 시도에서 사건의 빈도 N(A)/N를 추정하여 그 확률, 말하자면 P(A)를 구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곧잘 해석된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베르누이의 큰수의 법칙은 A의 확률이 알려져 있을 때 A의 빈도에 관해 말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 P224225

모든 보험 상품도 도박이며, 심지어 불공정한 도박이다. 어차피 보험 회사도 살아야 하며, 심지어 떵떵거리고 싶어하니 말이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주택 보험에 가입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멍청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작은 확률로 큰 손실을 당하기보다는 큰 확률로(실은 확실히) 작은 손실, 말하자면 보험료를 감당하고 싶어한다. - P230

하나의 원리가 리하르트 폰 미제스를 인도했다. 그것은 우연을 이기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장기적으로 이길 수 있는 전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은행을 이기는 시스템을 발견했다고 믿은 무수한 도박꾼이 처참하게 실패한 것에서 보듯 이 원리는 충분히 합리적이고 최대한 경험적인 듯하다. 영구 운동 기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박 시스템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유치한 ‘소원 원리‘가 현실에 무릎 꿇는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이는 과학에 유익하다. 영구 운동 기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열역학의 토대다. 도박 시스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확률론의 토대다.
적어도 이것이 리하르트 폰 미제스의 취지였다. - P244245

고려할 만한 기술적 요소(이를테면 어떤 유형의 컴퓨터를 선택할 것인가)들이 있긴 하지만, 악용할 수 없는 연쇄, 규칙 없는 연쇄, 압축 불가능한 연쇄는 사실상 모두 동일하다. 세 가지 접근법은 리하르트 폰 미제스가 자신의 콜렉티프로 얻고자 했던 목표를 달성한다.
무작위성의 이 모든 규정이 활용하는 개념은 무작위성의 정반대, 말하자면 연산 가능성이다. 연산 가능성은 어떤 확률론적 맥락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발전했다.
무작위 연쇄 개념은 연산 가능성 이론뿐 아니라 확률론 개념들도 근거로 삼는다. 이 말은 명백하면서도 실은 얼토당토않은 듯하다. 무작위성이 확률과 잘도 관계가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확률론은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콜모고로프의 측도론 공리에 기초한 확률론이다. 사실 측도론은 확률이 100퍼센트나 0퍼센트인 결과의 집합에 관한 모든 수많은 진술에 필요하다. 이는 역설적 결과다. 리하르트 폰 미제스는 확률론을 무작위 연쇄라는 토대 위에 놓고 싶어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무작위 연쇄를 이해하는 데 확률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 P250251

이론상 무작위 문자열은 온전한 동전을 여러 번 던지거나 방사성 원자의 붕괴를 관찰하거나 전력망의 변동을 측정하여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물리적 방법으로 무작위성을 생성하려면 대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효율도 낮다. 이런 까닭에 대부분의 난수는 가짜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이런 난수는 유사난수라고 부른다. 유사난수는 알고리즘으로 생성하며, 따라서 무작위성의 의미와 정반대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 P252

지금은 유사난수를 생성하는 방법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사술邪術에 가깝다. 유사난수를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기대만큼 무작위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당혹스러운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유사난수를 이용하는 것은 여전히 불법의 냄새를 풍기는 도박이다. 요한 폰 노이만은 이런 농담을 남겼다. "난수를 생성하는 산술적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이 죄인의 처지에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필요가 없다." - P252

(프랭크 플럼프턴) 램지의 어머니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이 오점을 제외하면 램지는 뼛속까지 케임브리지인이었다. 아버지는 수학자로, 모들린대학교 학장이었다. 프랭크는 트리니티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금세 그를 자신의 품 안에 맞아들여 비밀에 싸인 엘리트 토론 모임 사도회에 입회시켰다.
사도회에서는 독일어로 쓰인 얇고 신비스러운 논리학 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어떤 교수는 제목으로 ‘논리·철학 논고‘를 제안했는데, 향후 판매 실적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했다. 이 소책자는 엄청난 부자로 알려진 빈 출신의 전직 사도회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적군의 참호에서 복무하는 동안 썼다.
프랭크 램지는 독일어를 배워가며 소책자를 번역했다. 학부생이던 그는 『논고』의 몇몇 표현이 꽤 불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 니더 외스터라이히를 찾아갔다. 그곳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몇 주간 오후마다 책을 한 줄 한 줄 읽어갔으며 놀랍게도 둘은 평생 친구가 되었다. 유일한 시빗거리는 지크문트 프로이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였다. 프랭크는 프로이트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및 비트겐슈타인과 동급에 놓았다. 루트비히는 자존심이 상했다. - P256

어떤 면에서 믿음은 틀릴 수 없다. 매번 관찰의 결과로 믿음이 갱신되더라도 이는 믿음이 올바르게 교정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애초에 틀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 P269

이것이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 이면에 숨은 교훈이다. 개인이 가진 의지와 같은 의미에서의 의지를 집단이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콩도르세 후작으로 돌아간다. 그는 여느 계몽주의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장 자크 루소의 사상에 깊이 감화했다. 루소에 따르면 집단은 일반의지에 인도받아야 한다. 이 일반의지는 고귀한 개념이지만 콩도르세는 꼼꼼히 뜯어보니 일반의지를 명확히 규정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반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경우에 따라 현저히 부재할 수 있다. 이 통찰은 루소의 추종자들에게는 뼈아픈 타격이었다. 프랑스혁명의 광기 어린 시기에 얻은 현실적 교훈이 환멸을 키웠다. 결국 젊은 나폴레옹이 권좌에 오르자 ‘일반의지 volonté generale‘는 ‘장군의 의지volonté du général‘에 밀려났다. - P287

선거는 우세한 의견을 결정하는 측량 행위에 머물지 않는다(앞에서 보았듯 ‘우세한 의견‘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선거는 제의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참여의 제의다. 투표자들은 좋게든 나쁘게든 직접 참여한다. 선거에는 제의적 측면이 있다. 이 성질은 통계에 근거한 여론조사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표본이 (티코크라시tychocracy적으로 설계된 독재자의 경우에서처럼) 작든 크든 상관없다. 심지어 대표성이 가장 큰 여론조사조차도 총선거라는 참여 방식을 대체할 수는 없다. - P289

반박될 만큼 정밀해질 수 있다는 수학의 특징은 결코 사소한 미덕이 아니다. - P301

두 실험에서 대부분의 사람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면 당신은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다. 실제로 첫 번째 실험에서 당신은 흰색 공이 나올 가능성이 회색보다 크다고 추측했다. 그러므로 ‘흰색이나 검은색’ 공이 나올 가능성이 ‘회색이나 검은색‘보다 커야 한다. 이 실험은 우리가 확률을 다루는 방식이 기이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대니얼 엘스버그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는데, 이유는 따로 있었다. 1970년대 초 화제의 펜타곤 문서를 유출한 것이다. 장년층은 이 사건을 여전히 똑똑히 기억하며 젊은 층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더 포스트>를 보고 알게 되었다.
펜타곤 문서는 미 행정부의 치부를 드러냈으며 엘스버그는 내부 고발자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는 방첩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15년형을 구형받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닉슨의 ‘배관공들‘(문서 유출에 대처하는 업무를 맡아서 붙은 별명)이 엘스버그를 진료한 정신과 의사의 사무실에 침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부의 중대한 부정행위를 이유로 소송이 기각되었다. 훗날 ‘배관공들‘은 다른 시급한 업무를 하달받았는데, 이번에는 워터게이트 빌딩에 파견되었다가 또다시 일을 망쳤다. 한편 엘스버그는 MIT 교수가 되었으며 시민으로서의 용기와 학문 연구 양쪽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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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가 학습할 수 있는 이유는 수학과 전산학의 이례적인 만남 덕분이다. 물리학과 신경과학도 거들었다. - P10

이 책을 쓰는 내내 생각과 개념을 반복적으로 제시했으며 때로는 같은 문구를 되풀이하거나 같은 개념을 다르게 표현했다. 이 반복과 재서술은 의도적인 것이며 이것은 수학자나 기계 학습ML 개발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순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복잡한 주제를 파악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일단 생각이 표현되면 우리의 뇌는 거기에서 패턴을 발견하며 다른 곳에서 그 생각을 맞닥뜨릴 때마다 연결을 형성함으로써 처음보다 더 깊이 이해한다.
당신의 신경세포들이 이 과정을 내 신경세포들만큼 즐기기를 바란다. - P14

이를테면 새끼 청둥오리에게는 모양이나 색깔이 비슷한 한 쌍의 움직이는 물체가 각인될 수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두 물체에 구현된 관계 개념이 각인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끼 청둥오리가 부화 직후 두 개의 움직이는 빨간색 물체를 보았다면, 그 뒤로 색깔이 같은 두 개의 물체는 따라다니지만(빨간색이 아니라 파란색이어도 상관없다) 색깔이 다르면 따라다니지 않는다. 이때 새끼 청둥오리에게 각인된 것은 유사성 개념이다. 그런가 하면 비유사성을 인식하는 능력도 관찰된다. 이를테면 처음으로 본 움직이는 물체가 정육면체와 직사각형 프리즘이면 새끼 오리는 두 물체의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여 훗날 모양이 다른 두 물체(이를테면 정사면체와 원뿔)는 따라다니지만 모양이 같은 두 물체는 외면한다. - P16

(프랭크) 로젠블랫의 퍼셉트론Perceptron이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데이터에서 가중치를 학습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떤 면에서 가중치는 데이터에 들어 있는 패턴에 대한 (아무리 사소할지언정) 지식을 부호화하여 기억했다. - P2526

퍼셉트론 장치의 제작은 대단한 성취였다. 하지만 훨씬 큰 성취는 만일 데이터가 선형적으로 분리 가능하면 단층 퍼셉트론이 선형 분리 초평면hyperplane을 반드시 찾아낸다는 수학증명이었다. 이 증명을 이해하려면 벡터가 무엇이며 어떻게 이것들이 기계 학습에서 데이터를 나타내는 방법의 뼈대를 이루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수학적 급유 지점이다. - P33

물론 한 데이터 점을 바로잡으면 초평면이 나머지 데이터 점의 일부 또는 전부에 대해 틀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퍼셉트론은 이 절차를 데이터 점 단위로 반복하다가 결국 모든 데이터 점에 적합한 가중치와 편향에 대해 수용 가능한 값 집합에 안착한다. 이런 식으로 퍼셉트론은 두 데이터 점 집합을 가르는 선형 구분선을 찾는다. - P60

이 분야 사람들은 1974년부터 1980년까지를 첫 번째 AI 겨울이라고 부른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루커스 응용수학 석좌교수인 제임스 라이트힐 경은 이 분야를 조사하여 1972년 AI의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의 보고서에는 심지어 "과거의 실망스러운 것들"이라는 대목도 있었다. 해당 부분은 이렇게 시작된다. "AI 연구 및 관련 분야 종사자들은 대부분 지난 25년간의 성취에 대해 뚜렷한 실망감을 토로한다. 1972년에 실현된 것은 그들이 1950년경, 심지어 1960년경 이 분야에 발을 들일 때에 품었던 부푼 희망과는 딴판이었다. 이 분야의 그 어떤 발견도 당시 장담한 거대한 변화를 지금껏 전혀 일으키지 못했다." - P63

때는 1959년 가을이었다. 갓 30대가 된 젊은 학자 버나드 위드로가 스탠퍼드 대학교의 연구실에 있을 때, 거창한 추천의 말과 함께 마션 ‘테드‘ 호프라는 대학원생이 그를 찾아왔다. 전날 스탠퍼드 대학교의 선임 교수 한 사람이 위드로에게 호프를 이렇게 소개했다. "테드 호프라는 학생이 있네. 내 연구에 흥미를 붙여주지 못하겠어. 자네가 하는 것에는 관심을 보일지도 모르겠군. 그와 얘기해보겠나?" 위드로가 대답했다. "기꺼이 그러죠."
위드로가 내게 말했다. "그렇게 이튿날 테드 호프가 제 연구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 P72

이제 x, y, z에 대해 임의의 값 집합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 점에서 함수의 기울기를 구한 다음 반대 방향으로 작은 걸음을 내디뎌 x, y, z의 값을 갱신할 수 있다. 함수가 전역 최솟값이나 지역 최솟값들을 가지면 이절차를 반복하여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해석은 함수와 벡터라는 두 중요한 개념을 연결했다. 이것을 명심하라. 기계가 왜 배우는지 이해해나가면서 우리는 벡터, 행렬, 선형 대수, 미적분, 확률 통계, 최적화 이론(마지막 두 개는 아직 들여다보지 않았다)과 같이 서로 동떨어져 보이는 분야들이 모두 어우러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P85

그때 그(버나드 위드로)는 MIT에 있으면서 필터 설계의 대가 노버트 위너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위너는 MIT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교수였다. 수십 년 뒤 위드로는 책에서 위너의 성격을 회상하며 유난히 감정에 북받쳐 묘사했다. 위너가 MIT 건물 복도를 걸을 때 그의 머리는 말 그대로, 또한 비유적으로 "구름 속에in the claa A ouds" 있었다고 한다(‘구름 속에‘는 공상에 빠져 있음을 뜻하는 관용 표현이다/역주). "우리는 위너를 매일 그곳에서 보았는데, 그때마다 시가를 물고 있었다. 그는 시가를 뻐끔거리며 복도를 내려왔다. 시가는 세타 각을 이루고 있었다. 즉, 지면으로부터 45도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결코 걷는 방향을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연기를 뻐끔뻐끔 내뿜어 머리가 연기 구름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물론 방정식을 도출하고 있었다. 위너는 복도 끝 계단 앞에 다 와서도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위너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져 목숨을 잃을 것처럼 보여도 방해하면 안 된다. 그의 생각의 흐름이 끊기면 과학이 10년은 퇴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늘 이 문제가 있었다." - P88

위드로와 호프는 자신들의 방법이 지독히 근사적임을 알고 있었다. 위드로가 내게 말했다. "제가 하는 일은 오차의 값 하나를 취해 제곱하고 침을 꿀꺽 삼키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할 작정이니까요. 그러고는 그것이 제곱 평균 오차라고 말합니다. 잡음이 자글거리는 제곱 평균 오차인 셈이죠. 그러고 나서 도함수를 취하면 미분하지 않고 해석적으로 값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제곱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평균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잡음이 지독히 많은 기울기를 얻었습니다. 이런 작은 단계를 한번, 또 한번, 다시 한번 거칩니다." - P98

위드로의 연구실 맞은편에는 아날로그 컴퓨터가 있었다. 록히드 사가 스탠퍼드 대학교에 준 선물이었다. 문은 열려 있었으며 누구나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 컴퓨터로 프로그래밍하는 것은 구식 전화 교환대를 조작하는 것과 비슷하게 전선을 이 배선반에서 뽑아 저 배선반에 꽂는 식이었다. 호프는 반시간 만에 아날로그 컴퓨터에서 알고리즘을 작동시켰다. 위드로가 내게 말했다. "호프가 해냈습니다. 작동법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프로그래밍하는 법을 알고 있더라고요."
알고리즘이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 두 사람의 다음 단계는 단일 적응 신경세포, 즉 실제 하드웨어 신경세포였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스탠퍼드 대학교 비품실은 주말에는 문을 닫았다. 위드로가 내게 말했다. "기다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팰로앨토 시내의 전파사를 찾아가 필요한 부품을 몽땅 구입했다. 그러고는 호프의 아파트로 가서 토요일 한나절과 일요일 반나절 내내 일했다. 일요일 오후가 되자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했다. 위드로가 그때를 떠올렸다. "월요일 아침에 제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사람들을 초대하여 학습하는 기계를 보여줄 수 있었죠. 우리는 애들라인ADALINE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적응 선형 신경세포adaptive linear neuron‘의 약자입니다. 그것은......적응 필터가 아니라 훌륭한 신경세포가 되는 법을 학습한 적응 신경세포였습니다." - P99

제2장에서 본 퍼셉트론 수렴 증명은 선형 분리 초평면이 만일 존재한다면 퍼셉트론이 그 초평면을 찾아내는 이유를 분명히 보여주었지만, 조잡한 LMS 알고리즘이 효과가 있는 이유는 그만큼 분명하지 않았다. 몇 해 뒤에 위드로는 뉴저지 주 뉴어크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항공권은 유나이티드 항공사가 발급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항공권을 봉투에 넣어서 줬습니다. 그리고 봉투에는 여백이 있었죠. 그래서 자리에 앉아 몇 가지 대수식을 풀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라, 이건 불편 추정값unbiased estimate이잖아."
위드로는 단계가 극단적으로 작아지면 LMS 알고리즘이 해를 내놓는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그것은 신경세포나 적응 필터의 가중치에 대한 최적값이었다. 위드로가 내게 말했다. "단계를 작게 줄여 많이 만들면 평균 효과를 얻어 그릇 바닥에 도달합니다." - P100101

그러나 거의 모든 사례에서는 기저 분포를 알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확률론적 ML 알고리즘의 과제는 데이터에서 분포를 추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알고리즘은 다른 알고리즘보다 이 일을 잘하며 모두가 실수를 저지른다. 그러므로 AI가 정확한 예측을 한다는 주장을 듣거든 100퍼센트 정확도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퍼셉트론의 경우에서처럼) 암묵적으로 확률론적이든 (조금 뒤에 살펴볼 예제에서처럼) 명시적으로 확률론적이든 모든 알고리즘은 틀릴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기계 학습에 타격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인 우리도 (스스로는 합리적이고 오류 없는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하지만) 확률론적 결정을 내린다. 이 확률론적 과정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말하자면) 막후에서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 P124

홀수는 옳든 그르든 답을 보장한다. - P168

여기에는 놀라운 의미가 담겨 있다. 데이터 집합에 대한 단순한 가정이 주어지면, 저차원에서의 결정 경계가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문제를 무한 차원에서 선형적으로 분리 가능한 문제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 P243

RBF(radial basis function, 방사형 기저 함수) 커널은 일부 무한 차원 공간에서 선형적으로 분리 가능한 초평면을 알고리즘이 반드시 찾도록 해줄 수 있기 때문에 저차원 공간에 대응되면 아무리 복잡한 공간에서도 어떤 결정경계(또는 함수)든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보편 함수 어림자universal function approximator‘라고 불린다. 이 구절을 기억해두라. 뒤에서 장 하나를 통째로 할애하여 특정 유형의 인공 신경망이 어떻게 해서 보편 함수 어림자이기도 한지를 논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경세포가 충분하다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
(블라디미르) 바프니크의 1964년 최적 한계 분류자와 커널 수법의 조합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이제 넘보지 못할 데이터 집합은 하나도 없었다. 원래의 저차원 공간에서 데이터 부류들이 얼마나 뒤섞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데이터를 극단적 고차원에 투영하여 최적 한계 분류자를 이용하면 최상의 선형 분리 초평면을 찾을 수 있지만, 커널 함수를 이용하기 때문에 고차원 공간에서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 - P244

나는 존 홉필드를 인터뷰하면서 그의 이름을 딴 연결망을 언급하는 것이 어색했다. 내가 말했다. "당신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홉필드 망이라고 부르는 게 멋쩍게 느껴져요. 당신은 늘상 이런 경험을 했겠죠."
홉필드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마음을 비웠습니다." - P277278

논문은 발표되었다. 홉필드는 에세이 "이제 무엇을 할까?"에서 그 과정을 떠올리며 헤밍웨이를 인용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논픽션 쓰기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산문의 저자가 자신이 무엇에 대해 쓰는지 충분히 알면 자신이 아는 것을 생략할 수 있으며, 독자는 (저자가 충분히 진실되게 쓴다면) 생략된 것에 대해 마치 저자가 쓴 것처럼 생생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나는 「PNAS」(「미국 국립과학원 회보」) 분량 제한 때문에 무엇을 쓰고 무엇을 생략할지를 매우 깐깐하게 골라야 했다. 헤밍웨이가 물리학자였다면 내 문체를 알아봤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거의 명백한 것을 생략한 덕분에 논문의 영향력이 커진 듯하다. 언급되지 않은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주제에 첨언하라는 초대장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연구자 집단이 이런 연결망 모형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도록 독려했다. 성공적인 과학은 언제나 공동 작업이다. - P278279

충분한 은닉 신경세포가 주어졌을 때 신경망이 어떤 함수든 어림할 수 있다는 그의 증명이 단 하나의 은닉층에 초점을 맞춘 탓에 일부 연구자들은 은닉층 개수를 늘려 깊이 들어가기보다는 하나의 은닉층만 가지고 신경망을 구축하는 데 열중한 듯하다. (조지) 시벤코가 말했다. "저는 층을 하나만 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하나만 필요하다고 결론 내린 것입니다." - P308

(제프리) 힌턴은 결국 박사 과정을 끝냈다. 그의 연구는 신경망을 이용해서 제약하 최적화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경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학습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힌턴은 언젠가 다층 신경망을 학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는 1970년대 중엽이었다. (마빈) 민스키와 (시모어) 패퍼트가 단층 퍼셉트론이 XOR 문제를 풀 수 없음을 증명한 것이 그즈음이었다. 힌턴은 두 사람의 증명이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XOR 문제가 단층 퍼셉트론으로 풀 수 없는 문제 유형의 특수 사례라는 것도 인정했다. 하지만 주눅 들지는 않았다. 그가 내게 말했다. "단순한 신경망이 그렇게 못한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속임수였습니다. 두 사람은 더 복잡한 신경망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어떤 증명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일종의 유추일 뿐이었습니다. ‘단순한 신경망이 못 하니까 잊어버려‘라는 식이었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수긍하더군요." - P312

영국에서는 면접조차 잡기 힘들었다. 서식스 대학교에서만 발달심리학과 자리가 나서 면접 기회를 얻었는데, 결국 탈락하고 말았다. 서식스 대학교의 한 학자는 힌턴에게 논문을 축소판으로 복사해서 미국에 있는 모든 관련 인사에게 보내보라고 제안했다. 힌턴이 말했다. "AI는 미국에 있었으니까요."
(데이비드) 러멜하트는 힌턴의 논문을 읽고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의 박사후 연구원 자리를 제안했다. 영국의 획일적인 학문 풍토에 시달린 힌턴에게 미국은 신의 계시와 같았다. 영국에서는 ‘올바른‘ 방법이 정해져 있었으며 나머지 모든 것은 이단으로 치부되었다. 신경망은 그런 이단에 속했다. "미국은 그렇게 옹졸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해안이 두 곳입니다. 한쪽에서는 이단이 다른 쪽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죠." - P316

이것은 역전파 알고리즘의 경이로운 능력이다. 입력에서 손실에 이르는 연산의 연쇄를 매 단계마다 미분할 수 있으면 손실 함수의 기울기를 계산할 수 있다. 기울기가 주어지면 각각의 가중치와 편향을 조금씩 갱신하여 손실이 수용 가능할 만큼 최소화될 때까지 경사하강법을 실시할 수 있다.
역전파 알고리즘의 유연성과 위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론상 신경망의 층 개수가 몇 개든 상관없으며, 층 하나당 신경세포 개수도 몇 개든 상관없다. 신경망의 연결이 듬성하든 촘촘하든 상관없다. 알맞은 손실 함수를 설계하기만 하면 된다. 이 모든 선택은 당신의 신경망이 수행해야 하는 작업을 결정한다. 훈련은 결국 다음으로 귀결된다. 신경망에 일정한 입력 집합을 넣고 예측 출력을 알아내고(이것은 사람이 데이터에 주석을 달아서 출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기 지도self-supervised 학습이라는 학습 유형에서 예측 출력이 입력 자체의 알려진 변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손실을 계산하고 손실 기울기를 계산하고 가중치/편향을 갱신하고 이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다. - P342343

(얀) 르쾽은 앞 장들에서 이미 만나본 ML의 성서인 (리처드) 두다와 (피터) 하트의 『패턴 인식Pattern Classification』을 발견하여 일부를 암기했다. 르쾽은 이 모든 독서에서 얻은 핵심 교훈을 이렇게 설명했다. "학습 알고리즘은 목적 함수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그러면 엄청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목적 함수는 손실 함수를 사소하지만 유의미하게 변화시킨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손실 함수는 ML 모형의 매개변수를 취해 손실을 (이를테면) 전체 훈련 데이터 집합에 대한 제곱 평균 오차(MSE)로서 계산하는 함수이다. 우리는 손실 함수를 어떻게 최소화하거나 최적화할 수 있는지 보았다. 그런데 손실 함수만 적용하는 것에는 내재적 문제가 따른다. 최적화를 너무 잘하면 ML 모형이 데이터에 대해 과적합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전에 보지 못한 시험 데이터에 대한 예측 실력이 형편없어질 수 있다. 이를 방지하려면 정칙화 항(regularizer. 보통 ‘정규화‘라고 번역하지만 이 책 앞부분에도 나오는 또다른 기계학습 용어인 ‘normalization‘과 혼동 우려가 있어서 이 책에서는 ‘정칙화‘로 번역한다/역주)이라고 하는 추가 항을 손실 함수에 덧붙이는 방법이 있다. 이 항은 ML 모형이 과적합을 피하게 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 손실 함수와 정칙화항을 합치면 목적 함수가 된다. 단지 순수한 손실 함수만이 아니라 목적 함수를 최소화하여 구축한 모형은 처음 보는 데이터를 더 탁월하게 일반화할 수 있다. - P366367

우리는 ML 모형이 그릇 바닥에 있기를 바란다. 이 지점은 미적합과 과적합 사이, 모형의 단순성과 복잡성 사이에 있는 최적 균형을 나타낸다. 이것이 골디락스 구역이다. 시험 오류 위험을 최소화하는 모형을 선택하면, 처음 보는 데이터(모형이 현실에서 맞닥뜨릴 데이터로, 말하자면 훈련 데이터나 시험 데이터에 들어 있지 않은 것)를 일반화하는 능력이 최대화된다. 그러므로 시험 오류를 최소화하는 것은 일반화 오류를 최소화한다는 뜻이자 일반화 능력을 최대화한다는 뜻이다.
전통적인 기계 학습의 거의 모든 경험적 설명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옳아 보였다. 그런데 심층 신경망이 뛰어들어 이 통념을 뒤집었다. 심층 신경망은 매개변수 개수가 훈련 데이터 인스턴스에 비해서 너무 많다. 그래서 과매개변수화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과적합해야 마땅하며 처음 보는 시험 데이터를 제대로 일반화하지 못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제대로 일반화한다. 표준 ML 이론은 심층 신경망이 왜 이토록 훌륭한 결과를 내놓는지 더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 P401

ML 엔지니어는 여러 초매개변수를 선택해야 하는 것 이외에 더 포괄적으로는 지도 학습을 동원할 것인지, 비지도 학습을 동원할 것인지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지도 학습에 주로 초점을 맞췄는데, 이를 위해서는 훈련 데이터를 라벨링해야 한다. 이 말은 각 입력에 대해 그에 대응하는 예측 출력이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면 훈련 데이터의 인스턴스마다 손실을 계산할 수 있다. 비지도 학습도 간단하게 접했는데, 이를테면 훈련 데이터 집합에 군집이 몇 개 있는지 알고리즘에 알려주면 이 알고리즘은 군집을 찾아 데이터의 각 인스턴스를 해당 군집에 할당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5년에 걸쳐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그 덕에 챗GPT 같은 AI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졌다)는 자기지도 학습이라고 불리는데, 비라벨 데이터를 취해 인간의 개입 없이 암묵적 라벨을 만들어 스스로 지도 학습을 하는 기발한 방법이다. - P409

사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전통적인 기계 학습의 토대에는 잘 이해된 수학적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칭송했지만, 심층 신경망, 특히 오늘날의 거대 신경망은 이 통념을 뒤집는다. 느닷없이 신경망의 경험적 관찰이 앞장을 서고 있다. 마치 AI를 하는 새로운 방식이 우리에게 제시된 듯하다. - P416

트랜스포머transformer는 내부 고차원 공간에 있는 각각의 수를 표상하는 법을 학습했으며 모듈로—97 덧셈으로 수를 더하는 법도 학습했다. 신경망의 훈련 손실이 0이 되는 점에서 훈련을 중단하면 신경망은 훈련 데이터를 내삽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말은 데이터를 무작정 암기했다는 뜻이다. 오폰시 연구자들이 훈련을 중단한 것도 대개 이 시점에서였다. 누구도 더 훈련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휴가 소동 덕분에 신경망이 이 시점을 지나 훈련을 계속했으며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를 학습했다. (얼리티아) 파워가 내게 말했다. "신경망이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그러니까 훈련 집합을 암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몇 배에 이르는 훨씬 오랜 시간 동안 훈련을 받으면 갑자기 더 심층적인 기저 패턴을 찾아내고, 일반화 능력이 생기며, 데이터 집합의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더 정확한 예측을 내놓을 수 있어요. 기이한 현상이죠. 우리는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 P419420

마음 이론 과제(외부 행동 단서만으로 타인의 믿음이나 마음 상태를 추론하는 것)가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LLM(large language model, 거대 언어 모형)에는 중대한 응용 분야가 있다. 이를테면 프로그래밍 코드가 들어 있는 웹페이지에 대해 미세 조정된 LLM은 프로그래머에게 뛰어난 조수가 될 수 있다. 문제를 자연어로 기술하면 LLM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코드를 내놓는다. LLM은 천하무적이 아니며 실수를 저지르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LLM이 코딩을 훈련받는 것이 아니라 토큰 연쇄가 주어졌을 때 다음 토큰을 생성하는 법만 훈련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코드를 생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한 프로그래머의 생산성 향상은 부인할 수 없다. - 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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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여행자를 위한 생존법 - 경이로운 우주를 탐험하기 전 알아야 할 것들
폴 서터 지음, 송지선 옮김 / 오르트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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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내가 얼마나 잘 잊는지, 무척 잘 아는 과학자가 쓴 책이다. 시시때때로 얼마든지 나가보세요, 돌아오지는 못하겠지만요.”라는 식으로 말한다. 현대 과학이 지금까지 규명한 우주의 경이를, 독자들의 우주여행을 전제로 구성했다는 이 책의 개성은, 그 모든 지식의 결론이 다채롭지만 일관된 경고라는 데서 가장 선명하다. “그래서 죽을 수도 있답니다, 우주에서, 어떻게든.”


 이제 인류가 우주에서 무엇을 알아내야 하고, 현재까지 파악한 우주는 어떠한지에 관한, 이 모든 지식이야말로 우주에서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이 순환이 생존법의 핵심이다. 이 책에서 새삼스럽게 놀라운 지점이기도 하다. 우주가 얼마나, 어떻게 위험한지는 이미 자주 들었고, 우주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어느 정도는 안다. 하지만 과학과 우주의 이런 두 측면이 필연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별개였다.

 

외부 태양계에도 문제가 덜 되죠. 방사선량은 거리의 제곱에 따라 감소하므로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면 유해지수가 4분의 1로 줄어드니까요. 그러나 내부 행성, 특히 수성은 사악한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공기가 없는 달이나 소행성에 서식지를 꾸미는 경우, 이 서식지 설계자는 바로 이 문제, 많은 방사선량을 피하기 위해 서식지를 지하 깊숙이 배치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터지기를 기다리는 걸어 다니는 암, 시한폭탄에 불과할 것입니다. -109

수명이 다한 거대한 별을 조심하세요. 별이 태양 질량의 10배가 넘는다면 폭발에 너무 가까이 다가갈 위험이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보이는 별에서 폭발적인 죽음의 폭발로 바뀌는 데는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으며 경고도 거의 없습니다. 충격파와 감마선으로 인한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는 최소 수십 광년 떨어진 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311

 

 그러므로 자칫하면 상당히 안전하고 경제적인 우주여행이 가능해지더라도, 그것이 너무 빨리 가능해지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겠다는 괜한 걱정까지 들었다. 어떤 이유로든, 어떻게든 항공기 문을 열겠다는 사람은 아직도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 덕이다. 민간 우주여행의 안전성, 완성도는 물론 경제성이 제고되는 속도가 우주에 대한, 특히 그 위험성의 과학이 보편화, 상식화되는 속도를 능가해서는 오히려 곤란할 수도 있다. 무작정 누구나 우주에 갈 수 있는 시대가 되면, 누구나 우주에서 돌아올 수 없는 시대일 것이다. 항공기의 비상구를 열거나 창을 깨려는 사람이 드문 것은, 누구나 그 정도는 처음부터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많은 인류가 현재까지 과학과 이성을 갖춰온 결과에 가깝다. 단지 나 자신만 여태 배워서도 아니고,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 한국에 유입된 과학과 상식의 덕으로 지금 얌전히 비행기를 탈 뿐이다.


 결국 지금까지 인간이 우주에 대해 쌓은 과학은, 우리가 우주에서 죽을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당장 우주에 갈 수 없는 까닭에, 이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의 정보를 생존의 문제로 연결 짓지 못했을 뿐이다. 이 책이 지극히 진지한 최신 연구들과 그 근간이 된 현대 과학, 특히 물리학의 원칙을 차근차근 설명하면서도 내내 유머를 잃지 않는 이유는, 독자 대부분은 지금 이 내용이 우주에서 자신의 생사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모른다는 그 사실부터 저자가 떠올려서인 듯하다. 헛웃음인 셈이다. 언젠가는 저 천체를 더 선명하게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려고 흐릿한 창을 깨거나 창을 열라고 기내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을 잠시라도 상상했을까? 물론 우주여행의 상용화와 대중화는 엄연히 다른 층위인데다, 인류가 도달 가능한 우주의 영역까지 고려한다면 당장은 우주여행의 생존법을 모르더라도 우주여행을 할 때 생사의 기로에 서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달을 한 바퀴 돌고 지구로 돌아오는 정도의 우주여행이 당장 상용화되더라도 나까지 탈 수 있는 가격일리는 없고, 대중화가 되더라도 동승자들의 무지가 내 목숨까지 위협할 정도가 되려면 시간은 꽤 걸릴 것이다. 적어도 항공기 탑승객이 저지른 사고는 요즘에야 내 눈에 띄었듯이.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알려 드릴게요. 이 입자 소나기에 있는 입자 중 하나가 뮤온입니다. 뮤온의 수명은 수 마이크로초(1마이크로초는 10-6승 초),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대기권 상층에서 지상에 닿을 만큼 그 수명이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를 가진 뮤온은 상대성 이론의 시간 연장 효과 덕분에 입자의 내부 시계는 느려져서 작은 파괴의 힘으로도 이 세상을 가격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됩니다. -147

간단히 말해, 블랙홀은 시공간 자체에 구멍이 뚫린 것과 같아요. 모든 물질이 중력에 의해 무한히 작은 점으로 밀집된 무한 밀도의 지점이지요. 이것이 완전히 정확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특이점은 어떤 물체가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더 이상 우리를 안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가 써 있는 표지판에 불과합니다.) 일단은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 보도록 하죠. 이러한 특이점은 사건의 지평선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 사건의 지평선 또한 보이지 않는 모래 위의 선과 같이 어떤 사물이 아닌 거죠.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가면 특이점 마을로 가는 편도 티켓만을 얻게 되는 것이고요. -502

 

 이 책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우주여행을 전제하고, 이 설정에 부합하는 문체와 표현으로 우주의 본질을 규명한 물리학, 천문학, 천체물리학의 최근 성과를 전달한다. 따라서 이 책의 과학은 구체적, 현재적인 동시에, 문학적, 사회적인 의미도 띤다. 당장 우주여행을 무사히 다녀오려면 마땅히 숙지해야 하는 지식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구체적, 현재적이다. 그 우주여행은 당장 내가 갈 리도, 갈 수도 없지만, 만약에 내일 간다면 아는 것은 너무 없고 위험한 것은 너무 많아서 큰일 날뻔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문학적, 사회적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인류 역사 이래 우주라는 공간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가장 급격히 증가하는 시기다. 인류의 생활 영역이 우주로 확장될 가능성이 지금까지 높아진 정도와, 최근 10여 년간 높아진 정도는 비슷해 보인다. 따라서 이제 우주에 관한 지식은 곧 이 공간에서 닥칠 위기, 벗어날 대책과 직결된다. 게다가 최근의 이런 급격한 진전이 우주에 대한 기존의 대중적 과학관 사이의 시차를 점점 벌릴 수도 있다. 대중이 알고 배우는 우주의 과학이 나아가는 속도보다 우주여행이 진전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말이다. 우주여행은 이미 듣고 접해온 과학이 개인과 사회를 얼마나 크게 바꿀지 보여주는 결정적 변화이므로 과학적이다. 우주로 계속 나아가는 현대 과학을 더 깊고 넓게 이해할 이유가 된다는 것은, 우주여행의 그 다음 과학적 의미다. 저자의 필력으로 우주에 앞서서 이 우주여행의 과학부터 여행했다.

 

 저자와 번역자는 물론 편집자까지 천체물리학을 전공한 까닭에, 자칫 난해하거나 어색할 수 있는 이 책 특유의 구성과 표현이 한국어로 생생하게 전달된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저자가 자신의 지식을 영어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 구사한 다채로운 표현을, 번역자와 편집자가 영어와 한국어의 행간에서 세심하게 조율해서 타당하게 전달한 덕분이다. 그저 한국어 번역자와 편집자도 이 분야의 전문지식이 깊어서 신뢰할 수 있다는 당위적인 차원이 아니다. 번역자와 편집자의 두 언어와 전문지식의 역량은 물론, 그리고 이 세 요소에 대한 사사로울 정도의 애정이 빛을 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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