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씨와의 만남은 어느 날엔 우박이 내리는 뉴욕의 오래된 레스토랑에서, 또 어느 날엔 안개에 휩싸인 오슬로의 호텔 라운지에서, 때로는 도쿄의 바에서 이래저래 20년 가까이 이어져왔습니다. 배경이 전혀 다른 우리 두 사람의 대화는 앞에서 사카모토 씨가 말씀하셨듯, 신기하게도 매번 같은 지점에 도달하더군요. 바로 피시스와 로고스의 상극. 그것은 두 사람의 인식의 여정(‘세상을 어떻게 써내려갈 것인가‘라는 물음)이 비슷한 궤적을 그려왔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후쿠오카 신이치) - P11

저는 원래 파브르와 닥터 두리틀(소설 《닥터 두리틀Doctor Dolittle》의 주인공으로, 동물과 말하는 능력을 지녔다-옮긴이)을 동경해 피시스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고, 피시스의 정묘함에 자극을 받아 생물학자를 꿈꾸었음에도 언제부터인가 실험용 동물을 죽이고, 세포를 짓뭉개고, 유전자를 조작하는에 매진해왔습니다. 조작적으로 생명을 다루고 요소환원주의要素還元主義(사물을 요소로 분해하면 그 각각의 요소가 단순한 원리로 작동할 것이라 간주하고, 이를 따지면 무엇이든 밝혀낼 수 있다고 여기는 사고법-옮긴이)적으로 생명을 분석했죠. 생물生物학이 아닌 사물死物학을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게놈은 매핑되고 유전자에는 등급이 매겨져 모든 것이 정보로서 데이터베이스화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생명을 완전히 로고스화한 것이죠. - P1112

그럼 사카모토 씨의 궤적은 어땠을까요. 그는 예술대학교에서 정밀한 음악 이론을 익힌 작곡가로서 전자음악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음표를 알고리즘으로 만들고 소리를 완전히 디지털화했죠. 한마디로, 음악의 로고스화에 성공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팝 음악을 작곡하고 영화 음악으로 아카데미상을 거머쥐며 선율이 돋보이는 멜랑콜릭한 다수의 명곡을 탄생시켰고요. 그 후 자기 모방을 경계하면서 유리와 금속의 노이즈를 모으고 마른 나뭇잎에서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일회성의 안개 속에서 불협화음과 어긋남을 표현하는 비동조調 음악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아마도 로고스가(즉, 우리의 뇌가) 기술하는 세상이 피시스를 왜곡하여 피시스의 희미한 떨림을 사상捨象(유의해야 할 현상적 특징 외의 다른 성질을 버리는 일-옮긴이)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로고스의 정상에 올라본 자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었을 겁니다. (후쿠오카 신이치) - P1213

사카모토: (전략) 바꿔 말하면,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기보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그저 걷는 걸 즐기는 감각이에요. 제가 만든 음악에도 이런 면이 반영되어 있겠죠. 조각가가 점토를 빚고 돌을 깎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발견한 수많은 소재를 ‘이거 괜찮은데‘ 하는 느낌으로 만지다보면 뭔지 모를 무언가가 만들어질 뿐입니다.
성격이 이토록 다른데도 후쿠오카 씨와의 대화가 늘 흥미로운 이유는 역시 말씀하신 것처럼 큰 의문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것이 서로에게 상당히 중요한, 본질적인 부분일 때가 많고요. - P21

사카모토: ‘내부주법內部奏法‘ 말씀이시죠?
얼마 전, 피아노가 ‘물체もの(‘もの(모노)‘는 물건, 물체, 물질 등 구체적이며 감각적으로 포착되는 대상을 가리키는 일본어 단어인데, 사카모토 류이치는 〈async〉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걸쳐 나타난 돌, 나무, 종이, 파라핀 등 ‘물체もの‘ 그 자체를 작품으로 삼아 인간중심적 사고에서의 ‘대상‘이 아닌 ‘물체‘ 자체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미술 경향 ‘모노하もの派‘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여기서 ‘もの‘는 이러한 관점에서 사용된 단어로 보이며, 이후 같은 관점에서 사용된 ‘もの‘는 작은따옴표를 사용해 ‘물체‘로 옮겼다-옮긴이)‘임을 강하게 인식하면서 음악으로서가 아닌 ‘물체‘로서의 울림을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후략) - P30

사카모토: (전략) 예전에는 피아노를 정밀하게 조율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피아노에게 원래의 자연 상태를 돌려주고 싶다, 피아노가 자연의 ‘물체‘로서 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조율을 안 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음정이 엇나가긴 하지만, 음정이란 것도 인간이 멋대로 만들어낸 개념일 뿐 자연의 소리로서는 딱히 어긋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후략) - P33

사카모토: (전략)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에도 약간의 재현성은 있지만 제어된 파라미터parameter(전자악기에서 특정한 음을 내기 위해 설정하는 모든 요소를 일컫는 말-옮긴이)를 디지털적으로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않기 때문에 전원을 켠 후 경과한 시간이나 기기의 발열 등 여러 요소에 의해 소리가 바뀌므로 나중에 재현할 수 없는 소리도 상당히 많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고요. - P3738

후쿠오카: (전략) 제가 무척 인상 깊었던 것은 〈async〉를 완성했을 때 사카모토 씨가 ‘아무한테도 들려주고 싶지 않다, 나만 듣고 싶다‘라고 생각했다는 점이에요. 언뜻 자기애적 발언으로들릴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요컨대, 일회성을 지닌 음악 혹은 소리더라도 복제해 모두와 공유하는 단계에서 복제된 동일성에 묶여버리니까요. 사카모토 씨는 그렇게 되지 않은 상태의, 일회성에 한정된 〈async〉의 음악을 더 아껴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사카모토: 예리하시네요.
지금까지 많은 앨범을 만들어왔지만 〈async〉를 완성했을 때 처음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음악을 만드는 근본적인 목적은 많은 분이 들어주는 것, 혹은 CD 같은 복제물이 널리 알려지는 것인데 말이죠. 그래서 스스로도 신기했습니다.
앞서 들었던 비유를 쓰자면 지도도 없이,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async〉의 음악을 만드는 동안 ‘산에 오르는 일‘을 ‘어떻게 마무리 짓는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붓을 내려놓을 때‘를 무심코 놓쳐버리고 쓸데없는 덧칠을 하게 될까 봐 굉장히 두려웠거든요. 그래서 ‘지금인가? 지금 아닐까?‘ 하고 붓을 내려놓는 타이밍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앨범을 만들었는데, 이 또한 일회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 않나 싶어요. - P4142

사카모토: 깨부순다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도자기를 빚어서 ‘이것이 제 앨범입니다. 수령 후 부숴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동봉한 다음, 부술 때 발생한 소리를 저의 음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곤 해요. 그걸 위해 직접 흙을 찾는 여정을 떠나도 좋겠다고 생각하고요. - P44

후쿠오카: (전략) 그러나 인간의 뇌는 그 노이즈 중 두드러지는 포인트, 즉 시그널을 묶어 별자리를 검출해내는데, 이것이 바로 과학이 하는 일이죠. 본래 노이즈로 존재하는 자연에서 어떤 종류의 로고스를 끄집어낸다는 면에서 무척 인공적인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는 이 점을 늘 자각하고 있어야 하는데, 무심코 이를 망각하고 시그널이 진짜라고 믿어버리곤 합니다. 인간의 지知의 역사, 특히 근대과학사는 본디 무작위적이며 노이즈투성이인, 일회성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재현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법칙을 추려내고, 이 법칙을 통해 논할 수 있는 것만이 과학이며 세상을 나아지게 만드는 과학의 진보라고 약속해왔어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그널을 추려내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노이즈들이 존재하죠. - P47

사카모토: (전략) 노이즈를 배제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피라미드가 좋은 예인데, 인간은 아름다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육체가 혹사당한다 해도 그 사실을 감추려 하잖아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아인슈타인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만, 여전히 사람들은 노이즈 없는 심플한 아름다움을 좋아하죠. 울퉁불퉁하지 않고 반들반들할수록 찬양과 감탄을 불러일으키고, 건축도 곧은 것이 아름답다고 평가됩니다. - P5152

사카모토: (전략) 과학 역시 ‘지‘와 노이즈를 포함한 총체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할 수 없다면 본질적인 진리에는 도달할 수 없을 거예요. - P55

사카모토: (전략) 앨범에 담는 음악은 어느 지점에서 끝나야겠지만, 시작과 끝이 있는 하나의 시간이 아니라 복수의 시간이 동시에 진행되어 영원히 ‘반복‘이 일어날 수 없는 음악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기도 하고요. - P60

사카모토: 나 자신이 자연이라는 걸 깨닫고 난 후부터는 항상 그 사실을 의식하게 됐어요. ‘내 신체는 자연물이라 통제할 수 없다. 매일 변화하는 것이 당연하며 감기도 걸리고, 병도 걸리고, 태어났으니 죽을 테고, 이윽고 붕괴할 것이다.‘와 같은 생각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엔트로피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 아닌가요? - P9091

사카모토: 로고스로 설명하지 못하면 뉴에이지New Age(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영적인 운동을 말한다-옮긴이)의 세계가 되어버리니까요. 미국 과학자 중에도 뉴에이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있지만, ‘요즘 그 사람, 뉴에이지가 다 됐던데‘라는 평가를 듣지 않으려면 로고스적 이해로도 납득할 수 있는 형태를 만들어야 하잖아요. 그들을 이해시키려면 로고스라는 공통 언어를 쓸 수밖에 없죠.

후쿠오카: 바로 그거예요. 피시스와 로고스의 대립에서 느닷없이 피시스 쪽으로 가버리면, 뭐랄까, 오컬트적으로 접근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리니까요. 세계는 항상 진동하고 있다는 식의 ‘뉴에이지스러운‘ 느낌은 지양하고 싶어요. - P119120

사카모토: 그 발견이야말로 굉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에도 시대(1603~1868년-옮긴이)에 미우라 바이엔이라는사상가가 있었는데, ‘고목에 꽃이 피는 것보다 살아 있는 나무에 꽃이 핀다는 사실에 놀랄지어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나무에 꽃이 피는 자연의 섭리야말로 진정 경이로운 것이란 뜻인데, 바꿔 말하면 ‘당연해 보이는 일들이 얼마나 기적적인가‘라는 얘기죠. 후쿠오카 씨가 실험을 통해 느낀 바와 완벽히 일치하는 것 같아요.
이런 인식은 ‘생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라는 바울의 말과도 연결됩니다. 바울로의 논리는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로 귀결되지만, 결국 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할 정도의 기적이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이런 기적 같은 자연의 섭리가 없었다면, 과연 생명이 이 엄청난 격랑 속에서 38억 년이라는 시간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요. - P139

사카모토: 비유를 해보자면 지금 설명하신 것처럼 원이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 자체는 물질세계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로, 항상 일어나고 있죠. 그러다 어느 순간 결함이 생기고 나아가 분해 쪽이 근소하게 많아지는 가장 좋은 균형에 도달합니다. 이 우주 안에도 그런 도달의 순간이 분명 존재할 거예요.

후쿠오카: 말씀대로 태양계의 출발점이 46억 년 정도 전이고, 처음 생명이 등장한 것이 38억 년쯤 전이니까 불과 8억 년밖에 여유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 8억 년 사이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해도, 그런 우연의 균형을 잡아낸 순간이 단 한 번이라도 존재했다는 건 정말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사카모토: 시행착오를 겪는 8억 년 동안에는 생명이 되지 못한 채 그저 물질로 끝나버리는 존재도 무수히 많았을 거예요. 그렇게 계승되지 못한, 이른바 생명 동지들의 흔적이 어딘가에 남아 있으면 좋을 텐데요. - P170171

사카모토: 맞아요. 누군가에게 연주되어 소리가 되지 않는 한, 음악이라 할 수는 없으니까요. 악보라는 건 ‘뉴턴적‘인 절대공간, 절대시간, 균질한 시공간처럼, ‘그 점을 어디에 두든 똑같다, 그저 값이 다를 뿐‘이라는 사고방식을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P175

사카모토: 그렇습니다.
특히 최근 몇 세기 사이, 악보 체계는 보다 복잡해지고 점점 정밀화되고 있어요. 20세기에는 오선지가 너무 조잡하다며 기하학에서나 쓸 법한 모눈종이에 치밀하게 악보를 적어나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죠. 서양음악계에는 애매함이 개입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모든 걸 숫자로 지정하는 악보를 쓴 작곡가도 있고요. 이런 점은 과학과 유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후쿠오카: 그러네요, 과학과 비슷해요.

사카모토: 그렇게 되면 당연히 수학과 비슷한 느낌으로 ‘자신의 소우주를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열정을 쏟게 되죠.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접근으로, 아무리 노력한들 악보가 음악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곡가는 자신이 일종의 신의 관점을 지녔다고 오해하기 십상이라, 그 소우주를 창조하는 일을 최종 목적으로 착각하기도 해요.

후쿠오카: 생명과학 역시 마찬가지예요. 유전자에 적혀 있지 않은 것은 생명현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유전자 만능주의가 횡행하고 있으니까요. - P176177

사카모토: (전략) 악보 만능주의가 옳지 않다고 깨닫게 된 건 어느 훌륭한 연주자가 제가 막 작곡한 신곡을 눈앞에서 연주해준 순간이었습니다. 분명 제가 악보 속에 소우주를 만들어놓았는데, 그녀가 연주를 시작하자 제 머릿속의 그림과는 다른, 더욱 근사한 음악의 우주가 펼쳐지더군요. 그때 ‘아, 그렇구나. 음악이라는 소우주를 만드는 건 작곡가만이 아니었어. 연주자도 똑같이 만들어내고, 때로는 작곡 이상으로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구나‘라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었고 그 이후로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바뀌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이번에는 ‘듣는 사람이 없으면 진정한 음악은 성립하지 않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의 현대음악은 들려주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었달까, 청중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예술가답고 멋지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저도 거기에 꽤 영향을 받았고요. 그런 제가 바뀐 건 ‘듣는다‘는 행위가 음악의 중요한 요소임을 강하게 의식한 이후부터입니다. 비록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음악의 원환圓環이란 악보를 쓰는 사람, 연주하는 사람, 듣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성립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죠. - P180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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