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본의 중세 예능을 읽다 ㅣ 문화와 역사를 담다 22
마쓰오카 신페이 지음, 김현욱 옮김 / 민속원 / 2020년 9월
평점 :
‘중세 예능을 읽다’라는 제목을 듣고 처음에는 제아미世阿弥와 리큐利休, 그리고 꽃꽂이의 이케노보 센오池坊専応 등과 같은 명사 중심의 인물 열전 형식으로 풀어가려고 했지만, 오히려 중세 예능에 대한 통상적이지 않은 문제나 주제를 설정한 후에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쪽이 흥미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따라 ‘권진勸進’ ‘천황제天皇制’ ‘렌가連歌’ ‘선禅’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정하고, 각각의 측면에서 중세의 예능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1쪽
내용에 앞서서 서두에 밝힌 구성의 방향부터 인상적이다. 일본의 전통 예능, 그중에서도 노能의 전문가인 저자는 자신에게 가장 효율적, 안정적인 구성이 무엇인지부터 짚는다. 그 자신이 언급한 제아미(노), 센 리큐千利休(다도), 이케노보 센오(꽃꽂이)처럼 일본 예능 각 분야의 시조격인 인물을 축으로 내세워서 그들의 삶과 해당 분야의 초기 역사를 교차시키고, 또 그런 대가들의 서사를 병치시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전형적인 구성은 과거의 대가들을 현재의 대가인 저자가 대중에게 소개한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가 있음을 최대한 이용해 보는 것이다.
이 책이 저자의 대중 강의 녹취록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런 효율적 구성의 측면을 더욱 의식하게 된다. 제아미, 센 리큐, 이케노보 센오처럼 일본인이라면, 특히 이런 강의를 들으러 올 정도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인물과 그가 세운 분야에 대한, 현재의 대가다운 깊이 있는 지식과 통찰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청중들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저자 자신이 결국은 택하지 않은 당초의 구성에서 굳이 효율성을 찾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반면에 저자가 중세 예능의 특성으로 짚은 “‘권진’ ‘천황제’ ‘렌가’ ‘선’”은 그야말로 추상적인 개념인데다가, 현재의 대중들로서는 중세 예능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도 짐작하기 어렵다. 이 강연에 참석할 정도의 청중들이 당연히 아는 노나 다도 등에 관한 소양은 큰 소용이 없는, 온전히 저자, 강연자의 고유한 관점에서 시작하는 강연이다. 물론 저자가 다루는 내용의 수준은 한국인인 내 입장에서도 크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자신이 이미 이 분야가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생각한 일본인은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우선 낯설다고 여길 수 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등장한 때의 유홍준이 이와 가깝고, 성공적인 사례일 것이다. 현재의 그는 그때의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에, 더 이상 그때의 그와 같지 않다고 여긴다. 즉 이때의 한국에선 그때의 유홍준 같은 전문가가 썩 떠오르지 않는다. 독자가 친한 주제를 낯선 관점으로 어렵지 않게 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대중을 고려하면서도 대가다운, ‘자극적인’ 독서 경험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런 책에 대한 만족도는 수렴하기보다는 분산되기가 쉽다. 물론 수렴되더라도 나쁘지 않다. 다행히도 저자의 의도를 파악한 독자가 모였다는 뜻이어서다.
이 책을 저자가 당초에 생각해 보았던 중세 예술가 열전 식으로 구성했다면, 그들 각각에 대한 저자의 지식, 통찰의 밀도와는 별개로 이들을 한 자리에 모은 한 권의 책으로서의 틀과 축은 모두 헐거울 수밖에 없다. 밀도가 높고, 아는 인물에 대한 몰랐던 정보들을 얻어서 전반적인 만족도가 높아지므로, 이 전체 인물들이 모인 이유와 효과에 대한 측면을 생각할 독자의 동기나 공간이 희미해질 뿐이다. 그런 헐거움 자체는 그대로 남는다. 개별 독자들의 그런 기분의 측면보다도 그들에게 전하는 주제 자체를 숙고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는 내내 깊은 인상을 받았다.
노 <세미마루蝉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천황제 내부의 부정이 왕자의 기형적인 신체로 표현된 것이라는 시점에서 보고자 한다. 세미마루(쓰레ツレ)의 경우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누나인 공주는 머리가 곤두서는 ‘사카가미逆髪(시테シテ)‘라는 기형이다. 머리는 여성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곤두서버린다는 것은 결정적인 결함일 것이다. 이러한 기형을 가진 공주가 사가카미이며, 그녀가 경계 지역에 버려졌다. 그에 앞서 앞 못 보는 왕자 세미마루가 경계 지역인 오사카야마逢坂山로 유기되는 부분부터 노 <세미마루>는 시작된다. -78쪽
또는 이에 관해 ‘사신설四神説‘이라고 하는 신화적 원형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자나기, 이자나미가 낳은 아이는 처음이 아마테라스天照大神이며, 쓰키요미노미코토月読命가 두 번째로 태어난다. 세 번째로 히루코ヒルコ라는 다리를 저는 아이가, 네 번째로 스사노오スサノヲ가 태어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 신의 자손이 천황으로서 일본을 통치하는데, 네 번째 왕자인 스사노오는 저항하고, 세 번째 왕자 히루코는 바다에 떠내려 보낸다. 이 유형으로 해석하면 히루코의 계보에 있는 것이 사카가미이며, 스사노오의 계보에 해당하는 것이 세미마루라고 하는 이해도 가능하다. 양자 모두 부정이라는 것이 신체장애로 형상화되어 경계 지역으로 유기되거나, 배제되거나 하는 일이 실제로 노 <세미마루>에서 나온다. 노 <세미마루>는 전쟁 중에는 공연이 금지되었던 곡이다. 메이지 이후의 천황제는 이러한 부분을 허용하지 않는 천황제였다. 그러나 그 이전의 천황제는 천황의 권위가 약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부분을 허용하는 천황제였다. -79쪽
중세 일본에서 서민들의 자원을 대형 불사(佛事)로 유도하는 선교 활동인 ‘권진’의 핵심 수단으로서 노의 원형인 공연 예능이 형성된 측면과 이 예능이 현재까지 일본 문화의 일부인 노로 이행해 온 동인動因으로서 천황제와의 연관성을 짚어 가는 흐름이 이 책에서 특히 인상적이다. 먼 과거의 중세 예능이 어째서 현재와 같은 양식으로 여태 살아남았는지 생각하도록, 그래서 결국은 중세 예능이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현재를 독자가 스스로 새롭게 인식하게끔 돕는 까닭이다. 지금 이 주제를 알아야 하는 가장 본질적인 지점을 치밀하게 파고든다.
이 책이 노아미와 같은 개별 인물을 중심으로 짜였다면, 노 ‘세미마루’의 맥락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과거 천황 존재의 이중성—가장 정결해야 하는 존재여서, 공연을 올리는 떠돌이 예인藝人과 같은 여항閭巷의 존재들과 그들이 주도하는 예능 활동의 부정不淨을 어떻게든 의식, 포섭해야 하는—을 지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굳이 그렇게 전개할 이유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중세 천황의 이중성이란 지점에서도 좀 더 나아간다. 바로 이런 이중성 자체를 은폐, 부정한 메이지 이후 천황제의 근본적 취약성이다.
천황제 내부에도 결함, 부정, 기형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중세 예능에서 기원한 노는, 이런 부정한 존재를 배제, 배출하려면 먼저 이 존재를 의식, 포섭할 수밖에 없는 제정일치적 역설의 합리화라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메이지 이후로 제2차 세계 대전 패전까지 일본의 천황제는 만세일계의 청정함만 일방적으로 강변했다. 최소한의 중세적 역설마저 거부한 것이다. “그(메이지) 이전의 천황제는 천황의 권위가 약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부분을 허용”했다는 저자의 표현은, 그렇다면 천황제 내부의 이런 결함, 부정, 기형에 대한 대응, 표현, 인식 자체를 금지한 메이지 이후 천황의 권위가 과연 강고했을지 의문을 일으킨다. 자연스러운 방향이다. 그런 서사의 측면조차 막아야만 하는 권위란 외피와는 무관하게 내용이 너무 박약하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의 천황제는 이 메이지 유신 후의 과도한 권위주의와 거리를 두었다는 점에서, ‘세미마루’의 공연 금지에서 보인 이런 자신감 결핍이 현재의 천황제에도 그대로 반영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천황제가 여전히 지속되는 이상, 중세적 성격뿐만 아니라 메이지 유신 이래의 근대적 성격도 현재의 천황제에 여전히 반영된 까닭에, 천황제가 고결함, 청결함을 고수하기 위해 불결함에 대응한 방식뿐만 아니라, 그런 대응 방식 자체에 역사적으로 대응해 온 2차적, 메타적 방식은 여전히 주목할 가치가 크다. 이처럼 노 ‘세미마루’에 천황제의 존재 방식, 즉 중세와 현대를 관통한 일본 역사와 사회의 단서가 있다는 통찰은, 일본 중세 예능이 지금 존재하고 그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세 예능의 구체적 내용, 사실을 말하는 것 이상인 셈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던 선의 유게遺偈에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선종, 특히 임제선臨済禅의 기봉機鋒의 날카로움, 속도, 순간 지향성 등과 같은 것이다. 이는 그때까지의 일본인이 체험한 적이 없는 신선한 감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전광 운운하는 번개 치는 순간의 이미지는 그때까지의 일본문학에서는 중심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 말경부터, 특히 남북조기의 『다이헤이키太平記』 시대가 되어 그러한 것이 대거 등장한다는 것은, 선이 유입됨에 따라 새로운 감각이 일본문화 속에 주입되고, 그것이 일본문화의 일부가 되어 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3쪽
일본이 중세 시대로부터의 예능을 현재까지 존속시켰다는 사실과 함께, 그 예능의 형식과 내용은 지금까지 항상 변해 왔고, 그 시초로부터 따지면 현재는 크게 변했다는 점을 이 책은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현재 보는 과거의 문화가 근원적, 본래적으로 지금과 동일했으리라는 내 일방적 확신이 너무 깊고 강하다는 점도 자연스럽게 돌아본다. 2025년의 시점에서는 아무리 오래전부터 내려온 예능, 문화라 해도 처음부터 전통적, 중세적이었던 예능은 없다. 어느 시점에든 낯설고 새로운 감각이었기에, 그 감각이 지금 이 시점까지 ‘중세로서’ 남았다.
이제 일본에서는 눈이 먼 황자가 버려지는 노 ‘세미마루’를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그 무대의 경지를 열심히 즐기는 것만으로는 전혀 충분하지 않다. 그에 담긴 약점만 잽싸게 알아채서는 기어이 찍어 누른 퇴행적 시대를 겪은 이상에는 더더욱 그렇다. 중세와 전통 문화에 각인된, 중세만도 못했던 근현대의 역행도 그 일부로서 기억, 포섭해야만 한다. 중세는 중세 당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같은 중세로 읽히지 않았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가 읽은 나름의 중세가 있었던 셈이다. 이 사실을 중세보다도 더 중세적이었던 메이지의 중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세보다 소란하며 박약한 권위주의가 납작하게 누른 ‘진정한’ 중세, 전통에 마음 놓고 싶은 사회적 욕구는 내 생각보다 항상 강하다. 맥락이 풍성한 관점을 접한 덕분에 박절한 관점의 갑갑함까지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