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이 어떻게 지금과 같이 되었는지에 대한 인과적 설명은 혼란스러운 공간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 때문에 특히 매력적이다. - P14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자연주의 전통은 차츰 ‘실험에 기반한 동물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바뀌어갔다. 자연주의와 실험생물학experimental biology이라 할 수 있는 이 새로운 접근법의 차이를 명확히 밝히기 위해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고자 한다. 진자시계가 주어지고, 그 작동 원리를 알아내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상상해보자. 먼저 우리는 자연주의적 접근 방법인 관찰과 추론을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시곗바늘의 규칙 적인 움직임과 그 방식, 각 바늘의 회전과 다른 두 바늘의 회전 사이에 나타나는 연관성, 초침과 분침과 시침의 주기가 1:60으로 일정하다는 점 등등. 그러나 시계의 작동 원리, 즉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원인이나 바늘 사이의 물리적인 연관성에 대한 질문을 받을 경우, 관찰만으로는 고작해야 추측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계를 열어 내부를 들여다보고 그 메커니즘을 명확히 이해할 때까지 부품을 만지작거리는 것뿐이다. - P3132

(배아의 발생 경로를 밝힌) 그 우연의 주인공은 박사학위를 취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2세의 과학자 한스 드리슈Hans Driesch였다.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던 드리슈는 1889년 논문을 완성한 뒤 극동으로 여행을 떠나, 자신이 성장한 독일에서와 달리 전체론적 관점에서 자연 세계를 바라보는 철학을 흡수했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가던 중 그는 당시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가 "천국의 꽃"이 라 묘사한 베수비오산 근처의 도시 나폴리에 닿았고, 잠시 쉬어가려 했던 이곳은 이후 10년 동안 드리슈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나폴리는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가장 활기찬 도시 중 하나였을 뿐 아니라, 그즈음 건립된 생물의학 연구 센터인 동물학 연구소Stazione Zoologica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이 연구소는 새로운 연구 패러다임을 구축하여, 마치 예술가에게 스튜디오와 물품을 빌려주듯 과학자들에게 실험 공간과 장비를 대여하고 있었다. 그 모델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대학 생활의 경쟁적인 요구에서 벗어나 연구에 몰두하고자 하는 과학자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었다(운 좋게 휴직 허가를 받을 수 있는 경우라면 말이다). 게다가 나폴리만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연구에 필요한 해양 생물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에, 연구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드리슈는 대학교수 자리를 갈망할 이유가 없었고, 이러한 자유로움은 두말할 것 없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번거로운 교수직이 기다리고 있는) 연구소의 다른 동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이탈리아에 남기로 한 그의 결심에는 연구소의 과학적 명성이 주요한 몫을 했겠지만, 나폴리의 밤 문화 역시 하나의 즐거운 이유가 되었다. 그는 나폴리를 거점으로 삼아 지중해는 물론 북아프리카 및 아시아 전역을 여행했으며, 독신남이라는 자신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 P3940

(빌헬름) 루Wilhelm Roux와 드리슈가 실험을 수행할 당시 세포의 가소성이라는 개념은 직관에 반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세포가 갑자기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이 개념의 설계자인 드리슈가 누구보다 강력하게 이 개념에 문제를 제기했다. 세포의 운명처럼 중요한 요소가 우연에 맡겨진다고 상상하기에는 배아발생 과정이 너무도 정확하며 재현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포가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적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드리슈는 다른 설명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명력‘ 또는 ‘영혼‘이라는 의미로 만든 엔텔레키entelechy라는 용어를 끌어와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설명했다. 어떤 신비로운 영향이 아니라면 어찌 세포의 행동이 그리도 극적으로 바뀔 수 있을까? 1910년 무렵, 드리슈는 실험생물학을 완전히 포기하고 남은 생애 동안 철학, 초심리학, 심지어 심령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바이스만의 모자이크 모델을 뒤흔들었지만,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모델을 찾지 못했다. 그는 이제 정신을 놓은 듯 보였다. - P4445

(한스) 슈페만Hans Spemann은 배순세포가 가진 힘을 포착하기 위해 이 작은 조직에 형성체onganizer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였다. 유도현상이 발생학의 핵심 개념 으로 굳어지면서 그는 1935년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결정적인 실험을 수행했던 제자 (힐데) 만골트Hilde Mangold는 노벨상 수상에 참여하지 못했고 자신의 발견이 과학계에 미치는 영향도 보지 못했다. 1924년 9월, 부엌의 휘발유 히터가 폭발하면서 만골트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논문이 발표된 직후였다. - P51

20세기의 위대한 생물학자 중 하나인 시드니 브레너Sydney Brenner는 발생이 유럽식 계획과 미국식 계획 중 한 가지 방식을 통해 진행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유럽식 계획에서는 계통lineage이 모든 것이므로 세포가 ‘어디에 있는지‘보다 ‘어디에서 왔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반면 미국식 계획은 보다 평등주의적이어서 세포의 출처sources보다 위치location가 더 중요하다. 브레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럽식 계획에서 세포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반면 미국식 계획에서는 "이웃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브레너의 은유는 가소성과 그 반대 개념인 전념성commitment의 차이를 드러낸다. 계통에 의해 정체성이 정의되는 세포(유럽식 시스템)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궤적을 위해 다듬어져 있기 때문에 선택지가 제한적이다. 반대로 그러한 제약 없이 태어난 세포(미국식 시스템)의 경우, 선택지가 열려 있어서 경험에 따라 미래 경로가 결정된다. 배아는 가소적 세포와 전념적 세포의 혼합물로, 그 균형이 발생 초기에는 가소성, 나중에는 전념성 쪽으로 기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세포도 나이가 들면서 그 방식이 고정되는 셈이다. - P5152

실제로 배아를 밀어붙이는 무형의 발생력developmental force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드리슈가 상상했던 엔텔레키나 ‘영혼’과 다르다. 오히려 발생에 추진력을 부여하고 전념성과 가소성 사이의 균형을 조정하는 실체는 화학과 물리학의 모든 법칙에 예속된다.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드리슈가 인식한 그 신비한 외력external force은, 수십억 년에 걸쳐 각 접합체에 ‘발생 청사진‘을 부여한 진화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말하자면, 단일세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의 유전자에 내재되어 있었다. - P53

‘흰색 눈‘이라는 표현형의 유전 여부를 확인하려면 짝짓기가 필요했다. 소중한 표본을 잃지 않기 위해 신중을 기해가며, (토머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은 흰색 변이 파리와 붉은 눈을 가진 정상 파리의 짝짓기를 시도했다. 맥 빠지게도 이 1세대 잡종, 이른바 ‘F1 세대‘의 모든 파리는 붉은 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멘델이 실험한 완두콩의 열성형질—작은 키와 흰색 꽃—이 한 세대를 ‘건너뛰는‘ 듯 보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는 계속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F2 세대에 이르러 실망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F1 세대의 자손들이 멘델의 예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결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붉은 눈을 가진 파리 세 마리마다 달처럼 창백한 눈을 가진 파리가 한 마리씩 끼어 있었다. - P7273

모건은 이 결과에서 두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첫째, (휘호) 더 프리스Hugo de Vries가 식물에서 보여주었듯, 동물에서도 변이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 식물과 동물은 동일한 유전 규칙을 따르는 우성 및 열성 대립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유전 패턴에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으니, 파리의 눈 색깔과 성별 사이에 예상치 못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즉, F2 세대의 암컷 파리는 모두 붉은 눈을 가졌지만, 수컷 파리는 절반이 흰 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수컷과 암컷을 합쳐야만 3대 1의 비율이 분명해졌다). 이 형질은 멘델의 열성 대립유전자처럼 작동하는 동시에, 파리에서만 관찰되는 특이한 방식을 보였다. 어떤 식으로든 성별이 흰 눈의 유전을 제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 P73

(앨프리드) 허시Alfred Hershey와 (마사) 체이스Martha Chase는 바이러스의 DNA와 단백질 중 어떤 것이 바이러스 전파를 담당하는지 알아내고자 영리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한 실험 설정에서는 방사성 황radioactive sulphur이 있는 상태에서 파지가 복제되도록 함으로써 바이러스의 단백질에 표지를 붙이고(황이 없는 물질인 DNA는 이 조건에서 표지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어 별도의 실험에서는 방사성인radioactive phosphorus이 있는 상태에서 바이러스를 배양함으로써 DNA에 표지를 붙였다(이 경우 일부 단백질에도 방사능이 표지되지만, 대부분의 방사능은 DNA에서 파생된다). 마지막으로, 허시와 체이스는 각각의 바이러스 배양액을 신선한 세균과 따로따로 혼합했다. 그러면 바이러스가 세포를 감염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 세균세포에 ‘표지된 황‘, ‘표지된 인‘, 또는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지 확인하기만 하면 되었다. 결과는 너무나 명확했다. 세포에 들어간 유일한 물질은 방사성 인이었고, 방사성 황은 내부로 들어가지 않은 채 표면에 남아 있었다.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기 위한 모든 지침은 오로지 DNA만이 가지고 있었다. - P87

돌이켜보면 그것은 젊은 생물학자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최고의 일이었다. 그 일을 통해 친절하고 이해심 많은 교수인 미하일 피시버그Michail Fischlberg에게서 발생학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곤충만큼 (존) 거든John Gurdon을 사로잡지는 못했지만 발생학 또한 꽤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성장하는 배아의 모양과 형태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발생학자들을 지켜보면서, 그는 애벌레와 나비의 복잡한 날개와 가슴 무늬를 떠올렸다. 수업에서 배운 것 외에는 배아발생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때, 피시버그는 거든에게 기회를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스물세 살에 거든은 피시버그의 연구실에 자리를 잡고 배아의 신비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 P100101

모든 요인이 그 추진력에 기여했을 수 있지만, 여느 과학자들이 공감하는 거든의 주된 동기는 일종의 사냥, 즉 남들이 모르는 퍼즐을 혼자서만 풀 수 있는 기회였다. 새로운 자연적 사실을 발견하고, 이름을 붙이고, 그 특징을 설명하는 최초의 사람이 되는 즐거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거든은 교실에서의 주입식 교육을 거부하고 스스로 설계한 지식의 길을 통해 자연 세계에 대한 이해 방식을 깨우치며 자랐고, 이러한 독립성이 그를 초심자에서 실험주의자로 변모시켰다. 피시버그의 연구실에서는 온전히 혼자 일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 P106107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발견의 기쁨은 곧 의심으로 바뀌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환희는 일종의 예외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혹시 실험 과정에서 어떤 실수가 있었던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실험을 실패로 이끈 교란 요인이나 계산 착오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이 특히 심각해지는 것은 자신의 결과가 이전에 보고된 연구 결과와 상충될 때이다. 그리고 기존의 연구 결과가 권위 있는 연구팀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심각성은 두 배로 커진다. - P116

이듬해 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선임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시드니) 브레너Sydney Brenner가 작은 모임을 주최했다. 크릭과 다른 저명한 생물학자들, 그리고 (프랑수아) 자코브Francois Jacob도 그 모임에 초대되었다. 모임은 킹스 칼리지에 있는 브레너의 연구실에서 열렸고, 모든 참가자들이 각자의 생각을 기탄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마치 살인 사건의 증거인 양, 전 세계의 다양한 실험실에서 수행된 실험 결과가 토론의 주제로 올라왔다. 물론 핵심 질문은 이것이었다. ‘유전자와 그 단백질 산물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그룹 내에서 하나의 모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자 X가 그 중심에 있음을 알고 자코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X의 독특한 특성이 점점 분명해졌다. X는 빠르게 생성될 뿐 아니라 빠르게 파괴되었으니, 이는 세포 내에 있는 다른 물질 대부분과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브레너와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은 이러한 특징을 가진 물질—파지인 람다와 유사하나 분명히 구별 가능한 세균이 박테리오파지에 감염되자마자 나타나는 분자—가 최근에 기술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문제의 분자는 특별한 유형의 리보핵산ribonucleic acid, RNA으로, 세포 내 전체 RNA의 아주 작은 부분을 구성하기에 그동안은 무시되어온 DNA의 화학적 친척이었다. 하지만 이 분자의 행동이 X와 완전히 똑같았으므로, 브레너와 자코브는 이 분자에 ‘메신저 RNA(mRNA)‘라는 이름을 붙였다. - P151

식물에서 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기체는 전사 조절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전체에 의해 코딩된 많은 전사 억제자transcriptional repressor 외에도 세포에는 비슷한 수의 전사 활성화자transcriptional activator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활성화자들은 RNA 중합효소의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유전자 스위치를 켜는 역할을 한다. 전사를 조절하는 단백질인 억제자와 활성화자를 통칭하여 전사인자 transcriptional factor라고 하며, 이들의 유일한 목적은 유전자에 발언권을 부여하거나 침묵시키는 것이다. 인간 유전체에는 1500개에 달하는 전사인자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전체 유전체의 5~10퍼센트에 해당한다. 그 주요 목적이 다른 단백질의 생산을 조절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치다.
그렇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조절에 대한 이만한 투자는 생명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정된 지침을 지닌 정적인 유전체는 세포가 환경에 반응할 수도, 다른 세포와 소통할 수도 없게 만들 것이다. 앞 장에서 살펴본 가소성, 즉 세포 손실이나 세포 사회를 형성하는 사건에 대처하는 배아의 능력은 유연한 유전체 없이 불가능하다. 전사 조절은 세포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가장 일반적이며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따라서 성장에서 회복, 감각에서 기억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생물학적 과정은 다양한 DNA 서열이 mRNA로 변환되는 속도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 P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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