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만화경
김유정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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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 소설집의 인상이 정해지는 흐름은 다양하다. 가장 탁월한 하나의 작품이 한 권의 기억을 상징할 수도 있고, 맘에 드는 작품이 여러 편이어서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 물론 한 편의 너무나 시원찮은 작품을 기어이 언급해야 직성이 풀릴 단편집이나, 가장 탁월한 한 편이 있음에도 나머지는 모두 내키지 않아서 통째로 잊거나 생각할 때마다 뒤숭숭한 책도 있을지 모른다. 이 흐름 간의 우열은 무의미하다. 그런 게 있어 봐야 어느 방향으로든 생각을 몰고 가는 동력이나 될 뿐이다.

 

나는 세상의 에너지체, 기억정보, 세상의 모든 언어와 지식. 시인들은 내가 기억과 기도로 이루어졌다 하고, 학자들은 내가 데이터만 충분하면 무엇으로든 변용할 수 있는 정보의 총합이라 한다. 나는 계속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필요한 모든 것을 모아 왔어.” (용의 만화경) -230

그들은 꼼짝도 않은 채 눈을 감고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우주 끝에서 간신히 당도한 지구의 밤이 사막과 그들을 내려다보며 파랗게 흘러가고 있었다. 우주 시대는 미신을 사랑한다. 사람이 여전히 사람을 사랑한다는 미신을. (우주 시대는 미신을 사랑한다) -94

 

 이 용의 만화경에 탁월한 작품들이 존재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며 확실하다. 자신이 빚은 설정과 가정을 기정사실로 전개하는 태연함이 맘에 들었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다가갈지 망설이는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이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얼마나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작가 자신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더 크고 굳게 믿고 있다. 스스로 안심하기 위해 애쓴, 안전하지만 지루한 구석이 없다. 정면돌파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도, 정면돌파도 없다. 그저 자신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데만 집중한다.

 

 이 책의 표제작인 용의 만화경은 영원불멸이라는 단어보다도 나이가 많을 용이 지금 이 시점 한국의 대학원생 김용으로 복학하는 이야기다. 여기 가장 필요한 것이 설득력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믿고 쓰기는 얼마나 어려울까. 생각할 수 없다. 내게 허락된 담대함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믿고 쓰는 사람의 탄탄한 세계를 한껏 맛보며 졸졸 따라갈 뿐이다. 그래서 얼마나 좋은지! 석박사 통합 과정 7년차로 김용의 21세기 최적화를 도와야 하는 구은진도 결국 이 용의 이야기를 흡입했고, 허공에 펼쳐진 그 비늘들 사이사이를 거닐었다. 상상할 수 있지만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형태의 머리를 한 대학원생이 앉아 있는 현재의 한국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것은 전적으로 내 앞에 있는 대학원생 구은진의 존재 덕이다. 그저 그를 따라가고 따라하면 된다. 쉽고 즐거웠다.

 

이 안은 너무 어두컴컴하고 저 밖은 아프도록 환하다. (소모품 마법사) -331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은진은 미래였다. 은진 또한 빠르게 시간 뒤로 밀려나 과거가 될 때까지는. 어쩔 도리 없이 흩어지는 우리는 가끔은 뜻하지 않게, 이렇게 필연적으로 연결되나 보다. 인간이라서. (용의 만화경) -248

 

 물론 용의 존재를 이해하고 수용한 대학원생 구은진이 결국 닿은 삶의 후반까지 온전히 그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는 어렵다. 이질적인 존재와 그 의미를 최선을 다해 궁리하며 귀애한 사람과 그의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지 짐작할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총합의 경이에 기꺼이 애정을 일으키는 작은 마음을 엿봤으니까. 결국 용의 만화경에서 가장 경이로운 지점은 김용이라는 존재와 그 구성 방식보다도 그 어처구니없는 대상을 결국 자신의 한계 안에서 받아들인 구은진이다


 인간은 자신이 상상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했는데도 그 상황을 자신의 서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모든 인간이 그렇지도 않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방식도 인간과 상황마다 제각각이다. 심지어는 받아들인 것 자체가 반드시 긍정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경이롭거나 경악스러운 갈등에 더 찬란하게 감응하는 인간은 있다. 그것이 얼마나 희귀한지조차도 중요하지 않다. 그 감응의 가능성이 다채로울 뿐이다. 이 책의 모든 이야기에서 거듭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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