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공지영 지음 / 김영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처음 숙독(熟讀)했던 때는 2002년 겨울, 송광사(松廣寺)의 오도암(悟道庵)에서였다.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그때로서는 뭔가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나마 이 책이 나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남들에게 버림받았다는 비참함을 느끼기 전에 내가 나 자신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참담함을 느끼며 어쩔 수 없이 아무데로나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이유야 어찌되었든 당시 내가 머물던 암자와 적이 비슷한 ‘유럽의’ 수도원으로 떠난 저자의 기록은 어딘지 모르게 내 맘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구석이 있었다. 그때로부터 햇수로 2년이 지났다. 이제 또다시 낯선 곳에 서있다. 물론 이 곳은 새로이 정착할 곳이기에 머잖아 더 이상은 이곳에서 떠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떠돌고 있다는 느낌이 훨씬 더 강하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낯선 길 위에 있는 나에게는 누가 되었든, 어디로 갔든, 나보다 먼저 떠돌아다닌 자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외롭기 때문이다. 떠도는 경험도, 외톨이 생활도 처음은 아니지만, 떠도는 외톨이가 되기는 처음이니까. 그것도 저마다 새로운 시간 위에 서 있다는 동질감으로 함께하고 있는 이 시절에.

 그녀의 여행길은 역시 처음 기대했던 경건함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꿈꾸었던, 때때로 엿보이는 돌발성과 항상 그 밑에 흐르는 잔잔한 호사스러움, 낭만, 무엇보다 정갈함이 감돌았다. 사실 이 여행은 그녀에게는 포상휴가와 같았다. 18년 동안의 번민과 방황을 끝내고 다시금 신에게 돌아온 그녀로써는 수도원만을 찾아다니는 여정 자체가 그러했으려니와 다른 조건들 역시 그녀의 바람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여행의 톤은 시종 밝거나 혹은 진지하다. 때로 슬플 때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향할 때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 여유로움에 취해서 마냥 흘러넘치는 행복의 감탄사나 어설픈 설교를 펼쳐놓지는 않는다. 다만 담담하게 자신의 사건, 생각, 감상을 털어놓는다. 그 목소리 안에는 오랫동안 신의 낙원을 믿지 않고 이 지상에 완벽한 낙원을 이뤄내기 위해서 자신을 전부 바쳐보았던 자의 신산함이 담겨 있다. 솔직히 정작 이제 그녀는 수도원을 찾아다녀야 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신을 찾기 위해서’만이 목적이라면, 더 이상 그녀는 수도원을 찾을 정도로 절박한 처지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이제 찾아낸 신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써야할 일거리가 없고, 때로는 의무적으로라도 돌보아야 할 아이가 있는 ‘일상’에서 벗어난 경건함이 감도는 그 곳이.

 그런 까닭에 그녀가 찾아가는 수도원은 내가 생각하는 기준과는 약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가 오직 ‘신을 찾기 위해서’ 이 여행을 나섰다 해도 나와 꼭 같았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그녀는 다양한 수도원을 찾아 돌아다닌다. 웅장한 중세의 성 같은 수도원에서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수사들의 그레고리안 성가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산 위의 커다란 천막 성당에서 온갖 나라로부터 모여든 젊은이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으며, 더없이 아름다운 호반의 수도원에서는 변변한 이유조차 듣지 못하고 문전박대당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화려함과 조야함, 온화함과 냉담함의 간극이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또는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설령 신의 세계에 닿아있을지라도, 그 속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에는.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이 가야할 정해진 길이라고 느꼈던 이 여정동안, 그녀가 다닌 수도원만큼이나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오랜 이야기를 들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인간은 그 무엇과도 다를 수 없었으며, 그 무엇이나 역시 인간과 다를 수 없었다.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그런 까닭에 우리가 너무 쉽게 아니면 반대로 너무 어렵게 생각한 나머지, 이래저래 아무 생각조차 없이 무작정 시간에 그 해결을 떠넘겨버리거나, 아니면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상투적이고 심지어는 비인간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공허한 말 몇 마디로 넘기고 마는 수많은 일상들이, 그 먼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작가는 그 말을 하는 이에게 어느 누구보다도 따뜻한 수도원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녀는 그들의 고민에 해결책을 주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그들의 문제가 틀렸다고 지적하지도 않았다. 마치 수도원 안에 계시는 예수님처럼, 단지 그들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같음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너는 나와 같아야 한다.’고 하는 건 폭력이지만, ‘나도 너와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해다. 값싼 동정도 얄팍한 계산도 아닌 말 그대로 네 마음에 대한 나의 이해. 그 이해 속에서는 사실, 어설픈 행동이 무의미하다. ‘이해’란 그의 마음을 안다는 것, 그 마음을 안다면 그 마음을 안다면 그 번민의 어려움이 어디에 있는 지도 알 것이고, 그렇다면 지켜보고 들어줄 뿐이다. 기다림이다. 나의 ‘이해’는 그 번민하는 마음에 대한 것이지, 모든 것이 해결된 그 마음을 향한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내 마음도 그와 같은 번민이 있기에 이해하고 기다릴 수 있기에, 그의 번민이 해결되거나 혹은 그럴 경우에 대한 가정은 불가지의 영역일 뿐이다.

 결국 그와 같은 해결은 어떤 조건도 필요하지 않은 더없이 온전한 신의 영역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만약에라도 그러한 전능함이 부여된다면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번뇌를 모두 흩어버리고 비로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아도취에 빠질 것이다. 결국 인간은 번뇌가 있기에 서로를 보다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나약함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그녀에 대한 신의 사랑은 그녀의 말대로 돌아온 탕자에 대한 그것을 방불케 한다. 18년의 기다린 기다림도 부족하셨는지 이런 여행에서의 추억까지 베푸시는 광대한 섭리에는 자신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결국은 자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아닌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받아들일 만 했다. 그런 사랑을 받은 그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나그네 길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이방인으로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고, 그들의 고뇌와 눈물, 평범한 일상을 나누는 모습은 설령 그녀가 신께서 따로이 택하실 만한 자질이 있듯 없든 기꺼이 기다리셨으리라 믿게 했다. 이제는 언젠가 내게 찾아올 유럽의 밤기차를 타고 이국의 산, 들, 강 그리고 도시와 시골을 지나게 될 그날을 새삼 시대하게 된다. 부족하나마 조금씩 더해가려고 애쓰는 나의 따뜻함이 그들을 부르고, 그들과 나는 따뜻한 기억으로 내가 더 따뜻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그 날을 말이다. (2004. 3. 4∼12, 2004. 3. 13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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