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에 대한 여러 견해 (p325)
임나일본부란 5세기 말에서 6세기 중반까지 김해지방에 두었던 일본의 기관을 말한다.
막연히 임나일본부를 가지고 일제가 일본이 예전에 한반도를 지배하였다는 논거로 삼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에 관련해 무수한 견해대립이 있었다. 학설 이름을 읽으면서 잠시 예전 공부할 때 학설대립과 판례가 떠오르기도 하였다. -0-;; 저자가 마지막에 밝히고 있듯이 사실 그렇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논점은 아닌 것 같은데(학설대립에 비해서는) 일제(일본이라고 해야하나?)가 무리하게 그것을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점령해서 식민지로 삼았다는 근거로 삼으려고 시도하였고 그에 대해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반박하면서 치열한 학설대립이 발생한 듯하다. 간단히 각 학설의 내용을 정리해보자면
기마민족설 - 스키타이, 흉노, 선비 등의 기마민족의 영향을 받은 부여족 계통이 마한 땅에 백제를 건설하고 김해지방에 진출해 있던 왜인들을 정복함. 그후 3세기말에서 4세기초 동아시아 민족이 대이동을 할 때 지배층이 왜국의 본거지로 옮겨갔고 이들이 왜세력을 정복하여 왜한연합왕국을 수립함. 이들이 다시 동쪽으로 진출하여 기나이 지방에 세운 왕권이 야마토정권임. (천황의 뿌리가 한민족이라는 주장은 황국사관에서 보면 놀랄 일이지만 왜인들이 김해지방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오히려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도 함. 그래도 일본학자의 주장치고는 급진적인 것 같다.)
출선기관설 - 일본이 4-6세기 사이 한반도 남쪽을 근대 제국주의적 식민지와 같이 경영하였는데 그 중심기관이 임나일본부였음. (너무나 인위적으로 짜맞춘 듯한 느낌의 학설이다. 그 옛날에 근대 제국주의적 식민지와 같이 경영하였다니...)
분국설 - 삼한, 삼국의 주민들이 일본열도로 옮겨가 살면서 각기 자신들이 살던 나라와 같은 나라를 건국함. 히로시마 동부와 오카야마에 이르는 지역에 가야사람들의 임나국이 있었음. 임나국을 중심으로 백제, 신라, 고구려의 분국이 각 존재했을 것임. 임나일본부는 신라, 백제, 고구려, 왜국이 서로 차지하려 했던 곳으로 가야의 분국으로 봄. (출선기관설을 뒤집어 놓은 북한 학자의 주장. 멋지군~)
가야왜설 - 임나일본부는 가야지역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자치기관 성격을 띠는 요즈음의 영사관과 같은 기관. 임나일본부는 왜인이나 왜인과 한족 사이의 혼혈인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었을 것임. (문헌학과 고고학적 뒷받침이 부족하고 중국기록을 잘못해석한 약점이 있다고 함. 그런데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는 것이 좀 아쉽다. 그래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하고 저자도 결국 이 견해를 일부 따르는 듯하다.)
백제군사령부설 - 일본 대신 백제를 주체로 넣어 해석한 학설. 임나일본부는 이 학설에 따르면 백제가 가야지역을 점령하고 군사 목적으로 설치한 사령부와 같은 기관이 됨. (근데 왜 일본대신 백제를 주체로 넣지? 그렇게 하면 말이 잘 된다는 것만으로는 좀...)
왜교사절설 - 임나일본부를 임나지역에 파견된 왜국의 사절로 봄.
검토 - 임나일본부의 관련 기록을 보면 정치군사적 지배나 조세징수, 부역 동원 따위의 통치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가야의 왕들과 보조를 맞춘 외교 활동이 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와 함께 신라가 가야의 나라들을 통합하였을 때에도 왜국이나 백제가 이에 맞서 직접적으로 군사활동을 벌인 기록이 어디에도 전해지지 않는다.(p330) 가야의 나라들은 동부의 신라와 서부의 백제가 침략하거나 위협을 가해올 때 군사로 맞설 힘이 부족하므로 왜 또는 일본부를 이용하여 독립을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임나일본부는 가락국 또는 가야의 나라들 시각에서 보아야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동안 일본이나 백제의 시각으로 보아 초점이 어긋났다.(p332)
무언가 임나일본부라는 기관이 있었다고 하면 현재와 같이 정비된 국가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았던 그 시절에, 특히 통일국가도 이루고 있지 못하던 일본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근대 제국주의적 식민지기관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가야와 교류를 하던 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기관쯤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기관을 가야 입장에서는 신라와 백제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해 이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임나일본부의 군사활동에 관한 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군사적인 면보다는 교역이나 왜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기관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배경지식의 부족으로 결과적으로 저자와 유사한 견해를 취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0#
그냥 오래간만에 학설대립을 정리해보고픈 충동에서 한 번 정리해 보았는데, 역시 예전의 3년 경험에 내가 영향을 많이 받긴 받았나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