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헌재에서 수도이전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 선고를 했다. 통상 선고까지의 기간이 180일 정도는 걸리는 것에 비추어볼 때 3개월여만에 선고를 한 것은 사안의 중대성과 파급효과를 고려하여 헌재가 여러가지 재판 내,외부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인 듯하다.

헌재의 결정은 결과적으로 8대1의 위헌 결정이었다. 전효숙 재판관 1인은 각하의 소수의견을 내었고 김영일 재판관이 별개의견으로 위헌의견을 내었다.

당초에 나는 왠만하면 기각이나 각하결정이 나오겠거니 하고 예상을 했다. 위헌 결정의 엄청난 파급효과를 고려할 때 헌재가 논란의 한가운데에 뛰어들면서까지 정치적 요소를 고려하여 위헌 결정을 내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헌법적 논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개인적으로는 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내가 20년이 넘게 서울 시민으로 살면서 온갖 문화, 경제적 특권을 향유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의 반대가 객관성을 갖기 어렵겠지만 여당과 정부에서 추진하는 수도이전 사업을 바라보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수도 이전과 같은 국가의 중대사를 왜 그렇게 성급하고 시간에 쫓기면서 강행하려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마치 다음 정권을 기약할 수 없으니 정권을 잡았을 때 하나라도 많은 개혁사업을 추진해 놓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었다.

수도이전이라는 문제는 국가의 장래와 국민 실생호라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이 수도이전 특별법을 하나 통과시켰다고 사후에 많은 문제점과 반대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밀어부치기 식으로 처리해서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수도를 이전해 놓았는데 이게 아니다 싶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노대통령은 정권의 명운을 걸고서라도 수도이전 사업을 추진시키겠다는 발언까지도 했다. 하지만 수도이전이 국가의 장래에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상당한 개연성(단순한 머릿속의 전망 혹은 한두개의 국책 연구소의 연구결과만으로는 이 거대한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지)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수도이전 사업은 정권의 명운 따위(?)를 걸고 좌지 우지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특별법이 통과된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아마도 선거에서 충청표를 얻기 위해(100% 그 목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도권 과밀해소라는 선의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여권에서 특별법을 발의하였고 아무런 생각없이 충청권에 밑보이지 않으려고 한나라당도 찬성을 한 듯하다. 여당도 여당이지만 당시에는 멀쩡하게 법을 통과시켜 놓고 지금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 반대한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 한나라당도 최초의 사업계획보다 수도이전의 규모나 체감범위(천도라는 단어의 사용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가 훨씬 확대되었다는 점을 고러혀더라도 정말 궁색함 그 자체다.

수도이전에 관한 내 개인적 생각은 수도권 과밀해소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서울이 수백년간 가져온 수도와 국가, 국민생활 중심지로서의 계산할 수 ㅇ벗는 유, 무형적 가치와 그런 세월을 거쳐 현재에 이른 ㅅ수도 서울을 충남지역으로 이전하는 도박(수많은 연구 결과가 상충할 것이고 당초 목적의 달성여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도박이 아닌가?)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라는 다소 안이한 현실론을 고려할 대 논의의 가능성은 열어두되 현정권하에서 기본계획이나 수도이전 여부를 확정짓는 다든지, 20-30년 안에 수도를 모두 이전하겠다는 식의 발상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결국은 수도권 이익집단과 보수(^^;;?)세력의 논지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현재 내 생각은 그렇다.(역시 자신의 이익이 걸린 문제에는-이 경우는 정말 막연한 이익임에도 불구하고-초연해지기는 정말 어려운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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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수도 이전에 관한 나의 견해가 아닌데 내용이 좀 빗나갔다.

나는 그날 오후에 결재를 받을 것이 있어 텔레비전을 켜 놓은 채로 2시 10분전쯤에 사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업무를 보고 사무실로 뛰어들어오면서 사무실 사람들에게 헌재결정이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사실 내가 속한 곳의 특성상 관심이 없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는 텔레비전으로 가서 긴장되는 마음으로 화면을 지켜봤고 화면에서는 윤영철 헌법재판소 소장이 결정문을 읽고 있었고 그 내용은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이 역사적 관행으로 인정된다고 할지라도 이를 관습헌법이라는 규정으로 인정하기 어렵고 설사 이를 관습헌법으로 인정하더라도 관습헌법에 성문헌법과 동일한 규범적 효력을 인정할 수 없으며 이를 변경하는 것에 관한 명시적으로 헌법적인 제한이 없는 이상 이를 법률의 형식으로 변경하는 것이 불허된다고 할 수 없고 국회의원의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의결된 수도이전특별법이 국민의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국회의원 개개인이 정치적 책임을 짐은 별론으로 하고 그러한 법률을 위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아쉽지만 역시 기각되었구나. 그래도 헌법재판소는 참 논리적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윤영철 소장이 '그러므로 헌법에 위반되었음을 선언한다'고 말을 하며 선고문 낭독을 끝마쳤고 그때서야 나는 내가 들었던 것이 1인의 각하 소수의견이었고 7인이 헌법 제130조 위반을 이유로, 1인이 헌법 제72조 위반을 이유로 위헌결정을 내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애써 헌법재판소 결정을 법리적으로 합리화하려는 내 자신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이 참 묘했다. 조금전까지 '역시 헌법재판소야. 아쉽지만 할 수 없지.'라고 생각하던 내가 '그래 헌법재판소가 잘 판단한 거야. 서울이 수도라는 것은 헌법적 효력을 가질 정도로 굳어진 관습이라고 할 수 있잖아.'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내 마음속의 생각을 바꾸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권위(이경우는 헌법재판소 다수의견이라는)에 맹목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고는 있지 않은지 누군가에게 치부를 들켜버린 것처럼 부끄러워지는 것이었다.

3차례에 걸친 텔레비전 토론을 보고 여러가지 신문기사를 읽고 난 지금 헌재결정에 대한 종합적 평가는 이렇다. 정부와 여당이 국민적 합의없이 밀어부치는 수도이전사업에 대해 사법부가 견제의 의미로 위헌결정을 한 것은 결과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수도의 문제가 관습헌법이라는 것에는 여러 이론이 있겠지만 헌재가 정책적으로 위헌결정을 정해놓고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창설해낸 이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까지는 불가피하다 할 지라도 관습헌법을 헌법 제130조에 따른 헌법개정절차(국회의원 1/2의 발의, 2/3의 의결 후 국민투표)에 따라 변경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억지같다. 관습헌법을 해석하는 것은 헌재이고 모든 관습헌법에 대해 헌법개정절차를 거치도록 강요하는 것은 사실상 헌재에게 성문헌법규정을 제정하는 것과 같은 권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김영일 재판관의 의견처럼 대통령이 수도이전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의하지 않은 것이 현저한 재량권 일탈로 위헌이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은 법적 기속력이 있기 때문에 정부와 여당은 어쩔 수 없이 헌재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을 둘러싼 혼란은 당분간은 계속될 것 같다. 법리적인 판례비평은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겠지만 제발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을 탄핵하겠다는 등의 정말 말도 안되는 꼴*은 떨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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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지젝과 '진정한 삶'으로의 길

지난 12월초에 미국의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D. Rumsfeld)가 영국의 한 시민단체인 PEC(바른 영어쓰기 캠페인)로부터 ‘올해의 횡설수설상(Foot in Mouth)’을 받았다. 수상의 빌미가 되었던 2003년 3월의 한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There are known knowns. These are things we know that we know. We also know there are known unknowns. That is to say, there are things that we know that we don't know. But there are also unknown unknowns. There are things we don't know we don't know."

이 연설은 지난 10월에 방한했던 슬라보예 지젝의 한 강연문(<생물유전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에서도 인용된바 있는데, 지젝의 분석에 따를 때, 럼스펠드는 여기서 일종의 지식의 유형학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에 따르면, 우리에겐 (ⅰ) known knowns(이미 알고 있는 걸 아는 것) (ⅱ) known unknowns(아직 모르고 있는 걸 아는 것) (ⅲ) unknown unknowns(아직 모르고 있는 걸 모르는 것)이라는 3가지 종류의 지식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분류에서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최강국의 국방장관이 (무)의식적으로 억압/배제하고 있는 마지막 한 종류의 앎이 있는바, 그것이 바로 (ⅳ) unknown knowns(이미 알고 있는 걸 모르는 것)이다. 지젝은 바로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지식(knowledge which doesn't know itself)”으로서의 프로이트적인 무의식이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부인된 믿음과 가정들이다.

2003년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라크전쟁’(이런 중립적 표현은 사실 부적절하다. ‘이라크공격’ 혹은 ‘이라크침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의 해로 기억될 것인바, 그 전쟁을 주도했던 부시행정부(와 미국인들)에 의해서 간과된 이 타자적 앎으로서의 ‘무의식’은 최강국의 이성, 혹은 초자아가 놓치고 있는 어떤 앎이자, 실재의 중핵이다. 9.11과 이후의 국제정세를 다룬 책들은 제법 나와 있지만, 이러한 중핵을 건드리고 있는 책은 지젝의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Verso, 2002)이다. 그리고, 9.11 1주년을 맞이하여 그와 관련된 다섯 편의 에세이를 묶은 이 책의 국역본이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란 제목으로 지난 10월에 나온바 있다. 하지만, 이 우리말 번역본은 대개의 지젝 번역서들과 마찬가지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책이어서, 유감스럽게도 지젝의 고뇌와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책읽기의 고난 속에서 허우적거리게만 할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원저가 좋은 책이라 한들 이 번역본을 추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내가 바라는 바는 제대로 된 번역본이 다시 나오는 것이다).

대신에 여기서는 이 책에서의 인상적인 주장 하나만을 뭉뚱그려서(약간은 번안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그저 그런 삶(mere life)’을 ‘진정한 삶(real life)’과 대비시킨다. ‘그저 그런 삶’은 자신의 삶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며,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자자손손) 보존되기를 매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인바, 지젝이 보기에, 자유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일이다(미국의 대통령은 한달씩 여름휴가를 떠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이다”(Liberal democracy is the party of non-Event).

그러한 ‘그저 그런 삶’의 경제적 버전은 ‘아무일 없는 삶’(흔히 ‘여유로운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열심히 일했다고 저 혼자 ‘떠나는 삶’이며, 무료한 삶을 명품 브랜드들로 치장하느라 등골이 빠지는 ‘럭셔리한 삶(luxurious life)’이다(이상은 지젝의 용어들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본질적으로 아무런 이벤트도 없는 삶을 끊임없이 이벤트화하고 스펙터클화하기 위해 난리법석을 떠는 것이 포스트모던한 후기 자본주의의 삶이다.

사실, 지난 한해 우리사회에서 유행어가 되었던 ‘10억’은 이 ‘럭셔리한 삶’에 진입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을 지시하는바, 어느 사이에 ‘진정한 삶’에 대한 기대나 열망 대신에 우리 삶의 풍경이 된 것은 여기저기서 억! 억! 하는 ‘10억의 삶’, ‘럭셔리한 삶’에 대한 집요한 탐욕이다(물론 여기서의 ‘10억의 삶’은 지극히 서민적인 레벨에서의 목표치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호사스럽다 하더라도 ‘럭셔리한 삶’의 본모습은 아무일 없는, 더불어 의미도 없는 ‘그저 그런 삶’일 뿐이며, 그것은 살아 있지만 이미 죽어 있는, 산송장(living dead)들의 적극적인 가장(假裝)이자 자기연출에 불과하다.

이러한 풍경을 두고, 지젝은 그가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묻고자 한다. “당신은 진정 살아있습니까?” “(유복한 나라의 국민들이여!) 9.11 이후에도 진정 당신들은 살아있습니까?” 그러한 물음이 전제하는 것은 ‘그저 그런 삶’과 ‘진정한 삶’의 존재론적 차이 혹은 거리이다. 단순히 ‘그저 있는 것들’(=얼빠진 것들) 혹은 ‘좀 있다고 하는 것들'(well-being족들)은 ‘정말로 있는 것’이 아니며, 멀쩡히 숨쉬고 두발로 걸어 다닌다고 해서 정말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열린책들)의 러시아 작가 자먀찐의 표현을 빌면, 인간 중에는 ‘살아있고-죽어있는’ 인간과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이 있다. 그는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고 기계처럼 행동하는 ‘살아있고-죽어있는’ 인간과 달리 실수와 탐구와 질문과 고통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을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분류한다.

이 차이에 대한 예민한 의식,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곳에 안주하며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로 있어야 할 곳에 나는 있지 않구나라는 의식에서부터 ‘진정한 삶’으로의 이행을 위한 준비는 마련될 수 있다. ‘진정한 삶’이란 사건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들의 실수와 탐구와 질문과 고통을 대가로 얻어지는 사건이란 러시아말로 ‘싸브이찌에(sobytie)’, 곧 ‘함께-있음(being-together)’이란 뜻이다. 때문에 그것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력공격과 같은 유사-행위와는 가장 거리가 멀다. 진정한 행위(action)란 ‘그저 그런 삶’에서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는 결단을 담지하고 있는 행위이다.

그러한 이행의 길(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초자아의 길(the way of superego)과 행위의 길(the way of the act). 제국주의의 압제에 대항하기 위한 9.11의 테러리스트들의 행위나 <죄와 벌>에서 19세기 러시아의 전제주의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라스콜리니코프의 노파 살해가 (부정적이면서도 불가피한) 초자아의 길을 보여준다면(‘살아있는 삶’(zhivaja zhizn')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진정한 행위의 길이며, 함께-있음의 윤리이다. 이것이 9.11의 교훈으로서 우리가 깊이 새겨두어야 할 ‘unknown knowns’이다.

하지만, 럼스펠드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 ‘unknown knowns’가 국제사회에서 진지하게 공유될 가능성은 아직 희박해 보인다. 불운하고도 유감스럽게도, 9.11이라는 실재의 충격에 의해서 ‘진정한 삶’으로의 이행이 촉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저 그런 삶’에 대한 집착이 더 강화되고 미국의 패권주의만 더 심화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한 패권주의에 동참하기 위해서, 아니 그러한 패권주의에 한 대 얻어맞지 않기 위해서, 새봄엔 이라크에 한국군이 파병된다고 한다. 이건 좀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살아있지만-죽어지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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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 이해인 산문집
이해인 지음, 하정민 그림 / 샘터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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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해인 수녀님의 짧은 편지나 삶에 대한 단상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이다. 우리가 평소에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바쁜 생활에 찌들어 잊고 지내는 소중한 사람들과 삶의 가치들. 이 책을 읽으면 '내가 너무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구나. 맞아, 내가 소중한 사람들을 충분히 소중하게 대접하고 있지 않구나. '는 등의 생각이 든다. 그냥 이렇게 살면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놓쳐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것을 항상 상기하며 삶으로 실천하고 또 그런 생각과 마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이쁜 글로 표현하는 것 - 그래서 이해인 수녀님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고 간직해 두면 좋은 구절들을 몇 개 적어본다.

고운 말씨 수첩 - 왼쪽엔 내가 평소에 하는 말 중에 부정적이거나 고치고 싶은 말을 적고, 오른쪽엔 좀더 긍정적이고 남에게 기쁨을 주게 될 아름다운 말을 적어놓고 기회가 올 적마다 연습을 해봅니다. 또 어떤 페이지에는 내가 실수해서 남에게 상처를 준 말, 남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말을 적어두기도 합니다. 문득 잊고 있던 우리나라 고운 말을 어느 대화나 책에서 발견하면 이것도 적어두었다가 적절히 사용합니다.(p214)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구체적 방법임을 알아듣게 됩니다. 함께 사는 이들에게도, 밖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도 시간의 허비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가능한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어야 서로 마음이 트이는 계기가 되기에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내어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p110)

'무엇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자신과의 약속을 잘 실행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행복은 스스로 가꾸어가야 하는 것.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격언을 나는 자주 기억합니다. '(p113)

'손님맞이를 할 때는 자신의 시간이 축나고, 하려던 일들이 더러 밀려나기도 하지만, 이 때문에 끌탕을 하거나 초조해지기보다는 마음을 평온히 갖는게 좋습니다. 시간을 빼앗긴다기보다는 오늘을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사랑을 나누는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시간을 쓰면 마음 안에 조용히 피어나는 기쁨이라는 꽃.'(p35)

'판단은 보류하고 먼저 들어주는 사랑의 중요성을 다시 배웠습니다/ 잘 듣는 것은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기다리고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 편견을 버린 자유임을 배웠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고 주제넘게 남을 가르치려고 한 저의 잘못이 떠올라 부그러웠습니다'(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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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 전2권 세트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요즘은 베스트셀러인지 여부가 책을 선택하는 주요한 기준이 되어버린 것 같다. '느낌표'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이후 책일기 열풍이 불었고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증거의 법칙'에 따라 베스트 셀러를 책 선택의 기준으로 삼고 있고  나 역시도 종종 그런 기준에 따라 책을 고른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고 반드시 좋은 책이라거나 독자 개개인에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책은 적어도 베스트셀러의 이름값은 충분히 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성배, 기독교 예술사, 루브르 박물관, 기호학 등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적 진실과 소설적 허구의 장치들을 완벽하게, 그것도 영화적인 스릴과 재미를 가미하여 배열하고 있다.

이 소설이 출간된 이후 벌써 소설에서 제시된 사실들 -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혼인한 사이였고 그 후손이 존재한다는 것, 교회가 권력유지를 위해 역사적 진실을 은폐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교도로 몰아 박해하였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신의 아들이 아니고 예언자인 인간일 뿐이었다는 것 등 - 의 진위에 관해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성경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에 대해 왈가불가할 자격도 없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어린시절부터 교회에 관해 품었던 한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것은 신의 자녀인 예수님이 하필이면 '백인인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보편적인 신의 아들이라면 무언가 더 큰 공통분모를 가진 모습이 아니어야 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한국인으로 탄생하면 어떠했을까라는 소박한 의문말이다.

수천년에 걸쳐 이룩된 역사적 축적물들의 무게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파격적이고 불경스러운 가설이 어쩌면 답이 존재하지 않을 내 어린시절로부터의 의문에 대한 수많은 답들 중 한가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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