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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민주화 -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과 헤게모니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최장집 교수가 지난 3년 동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관하여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책 전체의 내용은 우리사회가 절차적 민주주의는 성취하였지만 민주주의가 국민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내용은 크게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국내정치적 상황과 민주주의,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구축까지를 포함하는 한반도의 평화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국내정치적 민주주의의 퇴보
김대중 정부 때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는 민주화 세대(소위 운동권 세대)가 국회에도 대거 진출하여 역대 어느 때 보다도 민주화 세력이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정치적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현정부는 역량부족을 드러내며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민주주의에 대한 절망, 회의로 바꾸어 놓았다. 그 주요 원인으로 저자는 민주화 세력이 기득세력에 대항하여 새로운 헤게모니를 제시하지 못하고 기존의 헤게모니에 포섭, 통합되었으며 정치권에서의 논의가 사회의 다양한 이익의 충돌 및 갈등상황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소모적인 이데올로기 논쟁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는 후진적인 정당구조, 민주주의 외부에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 등을 들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냉전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노무현 정부가 민주화 세력에 의하여 정권을 창출하고도 역설적으로 가장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정책노선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저자의 지적대로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주도적인 헤게모니로 자리 잡아 가고 있음을 의미하고, 현정부는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흐름을 맹목적으로 쫓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을 우리나라만 홀로 역행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사회에 맞도록 이를 순화하고 그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여건이 있었는데 이를 방기했다는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공감이 간다.
이와 함께 저자는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는 한미 FTA 협정에 대해서도 우리나라를 신자유주의 체제 속으로 완전히 편입시키는 일이 될 것이라며 비판하고 대안적 개념으로서 유럽식 경제모델을 제시하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통치체제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갈등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갈등이 표출되는 것은 바람직하고도 자연스럽지만 현재 정치권에서의 갈등은 이와는 동떨어져 소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그렇지만, 갈등을 합리적이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규칙 하에서 해결하는 것을 도외시한 채 무조건 갈등의 표출을 장려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자가 그런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겠지만, 빈발하는 시위와 법보다는 위력에 의존하려는 우리사회의 갈등해결방식에는 분명한 개선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편 저자의 기본적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모든 문제 상황을 기득세력 vs 민주화세력(또는 노동자집단으로 대표되는 민중)의 대립구도 속에서 인식하려는 태도는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저자가 기득세력으로 인식하는 한나라당, 거대언론(조중동을 지칭하지 않나 싶다.), 재벌 등이 과거 수십년간 특권을 누려온 기득권층임에는 틀림없지만, 소위 민주화세력이 집권을 하여 행정부의 주요 직위를 차지하고 기업들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면 그들 역시 기득세력이 된 것 아닌가. 이를 반드시 민주화세력이 기득세력에 포섭되었다고 해석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독재정권에 대한 반정부투쟁 경험이 있다고 해서 영원히 변치 않는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개념으로서의 민주화세력과 그에 대응하는 집단으로서 타파대상인 기득세력이 저자의 인식처럼 항상 구분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의 구축
저자는 기존의 당위론을 바탕으로 한 통일론에 대하여 평화공존의 우선을 주장한다. 남북한중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자신의 가치체제를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닌 각 주권국가의 장기적, 자발적 노력에 의한 평화공동체를 주장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논리 자체는 타당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칫 지나친 가치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물론 이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한쪽의 가치를 강요하는 것이라는 순환론적 재반론은 물론 가능할 것이다). 저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필요최소한도의 개념조차 갖추지 못하고 주권이라는 개념을 상정하기조차 어려운 북한의 현 체제와 북한 민중들의 삶에 대한 냉철한 인식 및 비판 없이 단순히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각 주권국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강요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민주화를 추진하며 평화공동체를 이루자는 주장은 자기 모순적이고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싶다.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에 관한 논의는 동아시아와 유럽공동체간 상황의 차이, 동아시아 공동체 구성을 위한 현 담론이 가지는 한계(기능적 이론구성의 한계 및 정치적 결단의 필요성) 및 극복과제, 그리고 이를 위한 일본의 선택 등을 체계적으로 잘 분석해 놓았다. 저자의 지적대로 한국, 일본, 중국간 규모 및 경제발전단계에 있어서의 비대칭성, 그리고 일본의 쉽지 않은 정치적 결단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다. 아직은 문화 및 경제적 차원에서의 논의에 그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우리도 유럽공동체와 같은 한반도 평화의 토대가 되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이룰 날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