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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 김경욱 소설집
김경욱 지음 / 창비 / 2011년 9월
평점 :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 김경욱 / 창비 (2011)
김경욱에 대해 제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구효서의 그것과 김영하의 그것을 반반씩 섞어놓은 모양새입니다. 탄탄한 문장으로 써내린,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사를 꼼꼼히 쫓아가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인물지 단편을 꾸준하게 발표하는 작가라는 점에서 구효서가 이천년대를 살았다면 이런 단편을 썼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가만 살펴보면 김경욱에게는 구효서랑은 조금 다른 구석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단순히 다른 시대에 나고 자란 탓이라고 하기에는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제법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구효서의 작품들이 철저히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마지막에 가서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따뜻함을 지녔다면, 김경욱의 단편들은 철저하게 현실을 냉소하며 좀처럼 희망의 단초를 내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형식적인 부분에서도 쉽게 드러납니다. 구효서가 완벽한 기승전결을 갖춘, 특히 명확한 결말을 통해 소설 속 인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작가가 종래에 하고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모던한 소설가'라면 김경욱은 마치 이야기를 하다만 것처럼 갑작스럽게 끝을 맺어버리거나 결말을 모호하게 흐림으로써 작품 속 인물의 정체는 물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조차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포스트모던한 소설가'인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세대의 차이라기 보다는, 작가 개인의 근본적인 성향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역시 김경욱은 구효서 보다는 동세대 작가인 김영하를 더 많이 닮은 것일까요? 얼핏 생각하면 틀린 말이 아닌 듯 합니다. 김경욱의 작품들 또한 김영하의 작품들처럼 현대인들의 욕망과 이기심,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잔인함과 냉혹함에 대한 냉소로 가득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읽고나면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같은 막막함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김경욱과 구효서가 같을 수 없듯이 김경욱과 김영하 또한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김영하가 인물 자체에 대한 묘사보다는 파격적인 소재와 사건을 보여주는데 집중하며 현대인과 현대사회가 가진 모순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면, 김경욱은 아무리 짧은 단편이라도 한 인물의 총체적인 인생사를 압축해서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생 자체가 가진 숙명적 아이러니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김영하가 횡으로 과실의 단면을 드러내 그 알맹이만 쪽 빼내 건네주는 요리사라면, 김경욱은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종으로 그 껍질을 꼼꼼히 벗겨내 통째로 입에 넣어주는 요리사인 것입니다.
이 역시 단순한 스타일의 차이라기 보다는, 작가 개인의 근본적인 성향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저는 김경욱이 그 누구보다 특별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선배 작가인 구효서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인지 꼼꼼히 살펴볼 수 있고, 동세대 작가인 김영하와의 직접적인 비교 분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김경욱은 이 둘보다 훨씬 더 드넓은 토대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작가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김경욱이 없었다면, 구효서와 김영하에게 과연 어떠한 접점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김경욱은 그렇게 누구의 적자나 누구의 아류가 아닌, 김경욱일 뿐인 것입니다. 김영하가 될 수 없는 구효서, 반대로 구효서를 따를 수 없는 김영하가 아닌...구효서도 될 수 있고 김영하도 될 수 있으나 그 누구도 아닌, 김경욱이 된, 김경욱 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소설집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특히 반가웠습니다. 최근에 선보인 장편인 '동화처럼'에 이어 '김경욱이 된 김경욱'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거든요. 수록된 작품들 중 기존 작품들 처럼 전통적인 인물지 단편에 머무른 '99%'나 '허리케인 조의 파란만장한 삶'이 조금은 아쉬웠다면, 표제작인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와 '하인리히의 심장'은 김경욱의 가장 큰 장점인 탄탄한 기본기를 유지하면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낸 작품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소재와 사건 자체에 집중하면서도 인물의 생생함 또한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김경욱표 단편'이 이제 형식적으로 거의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담담하고 꼼꼼하게 이야기를 엮여가는 듯 하다가 돌연, 모호한 결말로 읽는 이들을 아연케 만드는 지점은 가히 압권이었습니다. '소설 속 그'가 느낄 수 밖에 없는 막막함과 슬픔이 책장을 덮고나서도 계속 남아 저 자신을 파고드는 경험, 소설 속 세계가 계속 연장되어 밤새도록 그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고 또 상상하는 경험을 김경욱의 단편이 아니면 어디서 또 할 수 있을까요?
이처럼, 비로소 '김경욱이 된 김경욱'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단편집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