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부터 이맘 때면, 

심장이 시켜서 하는 일이 있어요. 

느닷 없이 닥쳐온 사건에 심장은 때론 격하게 반응을 하죠. 

그리고 특정 시간을 품은 심장은 때가 되면 몸과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 말을 다시 되씹어야 했던 그날. 2004년 8월4일.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먼저 꺾어 식탁을 장식하듯, 

신은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데려가 천국을 장식하신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울었습니다. 

당시 울면서 썼던 누나에 대한 추모.   

라디오시대 마지막 스타가 떠났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는 일. 

슬픔을 참고 견뎌내는 일 외에 그 사람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 

추모바자회를 열고 있습니다. 

매년 8월4일, 1년에 단 하루,

심장이 시켜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 추모바자회를 열고 있어요.

아름다운가게의 도움을 받아서. 

 

올해도 열립니다. 

행여 집에서 팽팽 놀고 있는 책이나 CD 등이 있다면 보내주세요. (무료택배 방법 있슴다!)

아님, 추모바자회 행사 당일 '아름다운가게 광화문책방'에 오셔서 자원봉사나 물건을 사주셔도 되고요.

뭐, 별로 보고 싶진 않겠지만, 행사 당일 저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ㅋ 


참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사람입니다. 정든님 정은임. 

<냉정과 열정사이>는 그랬습니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다."

 

아무렴요. 

누군가, 정은임은 누군가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있을테니 행복할 거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렇게라도 정든님을 우리는 기억하고 삽니다.

살아남은 자의 숙명이자 슬픔.

 

영원한 나의 누나. 

이젠 늙지 않는 나의 누나.

안녕, 은임 누나. 잘 있나요?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아름다운 하루

8월4일(토) 아름다운가게 서 제7회 정은임 아나운서 추모바자회 열려


8년여 전, 그날 즈음,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하늘도 슬퍼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불의의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며칠 뒤, 비가 많이 오는 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4년 8월4일. <정은임의 FM영화음악> 등을 통해 ‘라디오시대 마지막 스타’였던 그녀가 떠난 자리, 그녀를 기억하고 사랑했던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정든님, 정은임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청춘의 어느 한 시절을 정은임에 빚진 사람들, 그 사람과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아름다운 하루를 열기로 했습니다. 매년 8월4일,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날입니다. 추모바자회를 열고 있습니다.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오는 8월4일(토) 모입니다.

아름다운가게 광화문책방에서 추모바자회를 엽니다. 우리 세상과 사회를 조곤조곤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 아직 기억합니다. 지난 2011년을 제외하고, 매년 8월4일 연 추모바자회는 올해로 7회째를 맞이합니다.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가게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하루’입니다. ‘정은임 아나운서 팬페이지’(www.worldost.com)의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아름다운가게’(www.beautifulstore.org) 등과 함께 열고 있습니다. 


바자회는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기부와 참여로 이뤄집니다.

행사 당일 아름다운가게에 모여 봉사활동도 하고 수집된 물품을 판매합니다.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누구나 참여 가능합니다. 수익금은 아름다운가게에 전액 기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렇게 해왔습니다.

지난 1회 바자회 수익금 전액(200만원, 특별후원금 70만원 포함)은 아름다운가게 수해지원금에 포함됐습니다. 2회 때는 바자회 행사와 추모 영상회를 가졌으며, 바자회 수익금 전액(182만7천원)은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성금으로 활용됐습니다. 3회(136만2천원), 4회(155만4450원) 5회(187만2010원) 6회(111만원) 바자회 수익금 전액은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 성금에 보태졌습니다.


이번 바자회도 자발적인 기증과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품을 보내고자 하는 사람은 무료택배(1577-1113)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가게 광화문책방은 도서, 음반 등을 주로 받으며, 옷을 제외한 가로*세로 30cm 정도의 잡화류도 가능합니다. 무료택배 기증은 8월1일(수) 도착 분까지 가능하며, 직접 갖다 주셔도 됩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분은 당일 아름다운가게 광화문책방에 오셔서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 봉사활동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정든님 정은임, 우리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합니다. 

안녕, 정든임 정은임.

 

다음은 8주기 추모행사 내용입니다.


1. 행사일 : 2012년 8월4일 토요일 오전 10시~오후 7시

2. 행사장소 : 아름다운가게 광화문책방 (서울 종로구 종로1가 24번지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지하2층 B215, 연락처. 02-732-6006)

3. 아름다운가게 기증 방법 : http://www.beautifulstore.org/Join/Giving/Process.aspx

 

관련사이트

http://www.worldost.com  정은임 추모사이트 ‘정든님’

http://www.cyworld.com/bastian2004  정은임 미니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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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이웃, 함께 사는 마을, 살고 싶은 서울

단골집이 있다는 것의 즐거움에 대하여

(* 일정 등에서 일부 '오타'가 있어서 다시 보냅니다. 미안합니다. 저, 여름 꼴딱~ 먹었나 봐요. ㅠ.ㅠ)

이탈리아 볼로냐. 협동조합 도시로 널리 알려진 그곳은 대학도시, 아동도서전으로도 유명하고요. 뭣보다 제가 가장 끌리는 건 '미식'의 고장이라는 점인데요. 1954년 볼로냐를 배경으로 한 영화 <마게리타 바의 친구들>. 이 영화, 마게리타 바를 찾는 별의별 인간 군상이 다채롭게 등장합니다. 한마디로 '단골'들. 결혼식 전날 다른 여자에게 뿅 가서 파경에 이른 남자, 사기죄로 감옥 간 사람, 젊은 피아노 선생에게 빠져 개인교습을 받는 영감님, 가수의 꿈을 가진 친구를 골려 먹는 꼴통. 그 이력하곤, 휘유~ 화려합니다.

헌데 이들의 관계, 재밌습니다. 마게리타 바를 중심으로 지지고 볶는 건 일상다반사. 그런 와중에 이 단골들, 1년에 한 번 단체사진을 찍어 유대감을 유지합니다. 이런 마을 단골집, 절로 웃음이 나고, 생각만 해도 포근해요. 볼로냐의 숨겨진 매력인가 싶기도 하고요. 역시 단골집 하나 정도 있어야 삶이 눅눅해지지 않을 것 같아요. 건축가 황두진은 말합니다. "술집이건 밥집이건 찻집이건 단골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게다가 그 집이 오래되었거나 적어도 앞으로 오래될 거시라면 그 행복은 더욱 커진다." 

어때요? 동감? 콜? 말 없어도 내 취향과 기분을 알아서 커피를 내놓고, 지금 돈이 없어도 부담없이 외상을 하며, 오래 죽치고 있어도 딴지 안 거는 단골집. 나도 결국은 그 집의 풍경이나 소품이 되는 단골집. 공간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단골집. 거대자본 프랜차이즈의 획일화된 것보다 마을의 필요와 요구, 정서가 고스란히 반영된 단골집. 

마을공동체엔 그런 단골집, 있겠죠? 한 번 둘러보세요. 당신에겐 어떤 단골집이 있는지. 혹시 없다면 그런 단골집 만드는 건 어때요? 마을평상에 소개한 <카모메식당>도 한 번 보시고요. 볼로냐에 가면 마게리타 바에도 들러 봐야겠어요. 볼로냐의 미식도 꼭 맞보고요. 참고로,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에 의하면, 탐식은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는 것"이며, 미식은 "음식에 담긴 삶을 맛보자는 것"이래요. :) 

제 기준이지만, 함께할 때 가장 행복한 세 가지! 
아름다운 마을공동체,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맛있는 커피! 
당신에겐 어떤 세 가지가 있나요? '네 가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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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이웃, 함께 사는 마을, 살고 싶은 서울

여기 마을이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

지난 주말, 서울광장에서 열린 '도시농업박람회'에 다녀왔어요. 다양한 식물(채소)들과 여름 인사 나누면서 룰루랄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요. 제 옆을 스치며 지나가던 한 여성, 이런 혼잣말을 하더군요. 
"시장 한 명이 바뀌니까, 서울이 이렇게 많이 바뀌네." 

그말 듣고, 주억거렸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부는 마을이라는 산들바람, 마을공동체라는 꽃을 피우기 위한 노력들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그 모든 것, 시장 한 사람 때문이 아니죠. 우리네 마음이 바로 '서울시장'의 형태로 드러난 것일 테니까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마음! 그래서, 이 말을 끄집어냈습니다. 

"공동체를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공동선을 논의하고 정의할 수 있고, 공동선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경제 민주화와 같은 자기 관리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우리는 민주주의 정치에서의 경제적 의사결정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유토피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기구와 정치는 이미 멕시코의 치아파스와 오악사카에서 자율적인 공동체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원칙과 과정으로 정치·경제적 조직을 만든 수많은 공동체가 있고, 이것은 우리에게 다른 세계는 가능함을, 그리고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의 증거를 보여줍니다." (폴리투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임) 

아, 오해는 금물! 마을공동체는 '무조건 하자'는 형식이나 주장의 것, 아닙니다.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사항을 행동으로 옮겨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도 아니에요.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말했죠. "배고픈 자가 책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화폐가 똥 싸지른 경제위기 혹은 공황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절, 마을공동체를 향해 손을 뻗는 것, 어쩌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 당신과 맞잡은 손이고 싶어요.

6월 20일.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떠올립니다. 탄생 110주년.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마을을 떠올립니다. 참, (사)마을 사무실에 오시면, 폴리투스가 언급한 공동체, 멕시코 치아파스의 공정무역 커피를 드실 수 있어요. 커피스토리텔러 '미쓰(터) 킴~(킴양아~)'하고 불러주세요. 여름엔 씨원한 아이스커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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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서울 - 2000년대 최고의 소설과 함께 떠나는 서울 이야기 사전
김민채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옛날부터 이런 표현들, 가끔 궁금했다.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간다. 서울은 오르는 곳이었다. 위에 있는 곳이었다. 지도를 놓고 보면, 서울이 위에 있다는 것은 알겠다. 물론 그것도 북반구 기준에서다. 남반구 기준으로 보면, 서울도 위에 있질 않다. 어쨌든 재밌는 건, 서울보다 위(위도 상)에 있는 곳에서도 서울에 가는 것에 대해, 저런 표현을 쓴다는 거다. 서울은 어떻게든 올라야 하는 곳이고, 위에 있는 곳이었나 보다. ‘상경(上京)’이라는 관성적 표현도 그런 것을 증명한다.


때론 거슬렸었다. 아마 서울을 고향으로 두지 않았고, 서울을 일상적 애정의 장소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도 서울을 동경했었다. 촌놈에게 서울은 뭔가 휘황한 곳이었다. 서울, 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방학을 맞아 서울 친척집에라도 갈라치면, 어찌나 좋아했던지. ‘서울’ 노래를 불렀다. 서울은 그렇게 어떻게든 촌놈이 가야할 곳 같았다.


그리고 나는 서울에 발을 디뎠다. 진짜 서울에 올라왔다. 부산촌놈, 서울내기가 된 것이다. 대학이 문제가 아니라, 서울에 발 디뎠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세상을 얻은 것 같았다. 바다가 그리워도, 두고 온 여자친구가 보고 싶어도, 내가 서울에 있다는 것만으로 뿌듯했다. 촌놈다웠다.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조용필의 노래, 아름다웠다. 뭣도 모른 채.


그러니까, 촌놈에게 서울은 공간적 개념이라기보다 정서적 개념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큰물에서 놀고 싶었던 촌놈의 욕심이 향한 곳. 서울을 사랑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서울을 더 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서울은 촌놈이 정복해야 할 곳이었던 게지. 그저 자신의 욕망이 이룰 장소였을 뿐이었다.


물론 그 치기어린 욕망, 오래가지 않았다. 청운의 꿈이라고 여겼었던 것, 한낮 허황된 욕심임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서울을 애정한 것, 아니었다. 이미 익숙해진 곳. 그냥 내 몸뚱이가 서식하는 곳이었다. 타인의 욕망을 자기 것처럼 포장한, 비루한 욕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얼굴이 바뀌었다. 욕망은 점점 비대해졌다. 삶은 강을 경계로 나뉘어졌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사람의 가치는 외려 떨어졌다. 서울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되었다. 서울은 자신의 진짜 얼굴을 잃었다. 성형미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더 서울》의 저자 김민채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에서 뉴요커를 흉내 내고 파리지앵을 부러워하며, 런더너를 지향하는 것. 그것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서울의 비굴함이 싫었다.


“지금의 서울은 서울다운 고유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가장 서울답던 풍경은 근대화 이후 사라진 지 오래고, 그렇다고 고층빌딩숲을 서울의 고유함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어느 순간, 서울은 고유성을 잃어버렸다. 새로 만드는 공간이나 건물들은 ‘유럽풍’. ‘서양식’ 등을 최고의 수식어로 여기는 듯 설계되고 홍보된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 습관이나 문화가 생겼는지 알지 못한 채 ‘파리지앵’이나 ‘뉴요커’의 행동 방식을 열심히 따라한다.”(pp.100~101)


그럼에도 서울‘턱별시’는 사람을 조금씩 매혹시켰다. 서울, 하면 드러나는 것 외에도 또 다른 별천지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곳은 내가 알던 서울이 아니었다. 아파트숲으로 둘러싸여 있지도 않고, 높은 고층빌딩을 사람을 위압하지도 않았다. ‘지갑을 열어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계명도 없었다.


부암동이 그중의 하나였다. 내가 아끼는 그곳에는 커피가 있고, 운치가 있다. 낭만이 있고, 걷고 싶은 길이 있다. 쉬고 싶은 장소가 있으며, 자연이 살아 있다. 물론 안타깝게도 조금씩 그것을 해치는 요소들이 틈입하긴 하나, 그래도 부암동은 부암동. 그곳에서도 나의 사랑하는 장소 한 곳은 윤동주 시인의 언덕. (행정구역상으론 청운동이다.)


《더 서울》의 김민채 저자가 휘날레로 장식한 곳. 그래서 반가웠다. 그도 이곳을 사랑하는 구나. 동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 나도 그도, 그곳에 마음을 두고 있구나. “내리 3일을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올랐지만 전혀 지겹지 않았다. 갈 때마다 새롭고 경이로웠다. 두 발에 닿는 언덕의 경사가 즐겁고, 두 뺨에 닿는 언덕의 바람이 사랑스러웠다.”(p.327) 


처음 그곳을 갔을 때는 여럿이 함께였다. 일종의 소개를 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혼자 찾았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기도 했다. 갈 때마다 마음이 좋았다. 그 야트막한 언덕, 사랑스러웠다. 아무나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너와 함께 걷고 싶었다. 그래서 김민채의 마음에 공감했다.

 

“누군가와 함께 다시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찾는다면, 내가 누렸던 순간들은 사랑하는 이에게 내어주고, 난 그저 그의 뒤에서 말없이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 걷고 싶다고.”(pp.327~328)


거기에 덧붙여, 윤동주 시인의 詩를 연인을 위해 읊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을 위한 시 낭송회를 연다면 그곳으로 하고 싶다. 바람에 스치는 별을 함께 바라보면서. 나는 그녀만의 윤동주가 되고 싶다.


김민채의 서울이야기는 지극히 감상적이다. 더 서울, ‘the’이기도 하고, ‘more’이기도 한데, 때론 그 감성에 공감하면서도 너무 개인적이라 뜬구름 잡는 것 같았다. 약간은 실험적인 형식인데, 혼자만의 감성만 너무 넘친다. 이해하기보다 느껴야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쉬이 그 느낌에 젖어들지 못했다. 다시 책을 본다면 모를까, 처음 본 감상은 그렇다. 꼭 소설가 지망생 혹은 작가 습작생의 글을 본 느낌이다. 서울이 지닌 보편적 감상보다 개인의 감상만 줄줄 흐른다.


‘서울과 친해지는 30가지 방법’이라지만, 자신의 경험과 느낌만 늘어놨을 뿐, 서울을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은 많지 않아 보인다. 혼자만 친해졌을 뿐, 다른 사람은 파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더’ 서울이라고 했을 때의 기대감이 꺾여서 그럴 것이다. 나의 필요와 요구에 맞지 않을 뿐이다. 문학(소설)과 어우러진 글은 감각적이다. 누군가에겐 참 좋은 시도이자, 즐거운 책 읽기일 것이다. 


그의 시선은 따스하다. 서울을 애정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개미마을의 이야기에서도 그것을 느낀다. 마을공동체의 하나인 그곳. ‘철거’라는 멘붕(MB)시대의 시대정신이 할퀸 그곳. 물론 그전부터 철거는 개미마을 사람들의 삶을 위협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철거로부터 자신을, 삶을, 마을을 지켰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이 쉽게 사라지고 없어지는 서울에서.  


“무허가촌이었다는 개미마을은 오랜 시간 동안 몇 번의 철거 사태를 겪어냈다고 한다. 마을은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그렇게 낡아왔다. 언덕 위의 무허가촌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었다. 2009년, 금호건설의 후원을 받아 100여 명의 대학생들이 개미마을에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 벽화를 즐기고, 사진으로 홍제동에서의 추억을 남긴다. 이제 그곳은 사람들의 마을이 됐다.”(p.45)


그리고 도시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 ‘걷고 싶음’에 대한 단상도 꺼낸다. 맞장구 쳤다. 걷고 싶은 서울을 향한 마음. 자동차에 잠식당한 인도에 대한 안타까움. 나도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람을 위한 다리가 아닌, 차를 위한 다리에 대해 늘 가졌던 불만이었다.


“한강은 아름답지만, 한강의 다리들이 어색한 이유. 한강의 다리들은 사람의 다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강의 다리들은 철저히 자동차 위주다. 인도는 최소화되어 있다. 길이 좁아 두 사람이 겨우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정도다. 다리에 오르는 길을 찾기 어려운 다리도 많다.”(p.293)


분리되고 격리됐으며, 외따로 떨어진 서울의 삶에, 마을공동체가 꿈틀대고 있다. 나는 그것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이다. 20년을 넘은 서울생활에서 가장 큰 변화다. 때리고 부수어서 바뀔 줄만 알았던 서울이 얼굴보다 마음을 신경 쓰겠다고 나서고 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과 살고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이웃을 돌아보게 하고, 내 삶터를 사유하게 한다. 그것은 곧, 타인의 욕망을 내 것으로 착각하고 내 삶의 자치권을 남에게 넘겨준 것에 대한 반성이다. 삶의 관계망을 다시 회복하고자 함이다. 이웃과 주변을 돌아보고자 함이다.


김민채의 서울에도 그런 단초가 담겼다. 저 담장 너머의 당신을 이해하는 것. 우리는 다시 서울을 살아내야 한다. ‘더’ 서울을 살아가는 태도. 서울을 다시 생각한다. ‘더’ 서울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각박한 서울이 마을공동체로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 그것이 지금의 서울에게 ‘더’ 주어진 과제다. 


“젊은 날 함께 같은 꿈과 희망을 나눴었어도 결국은 타인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

시간이 흐르면 존재의 형식은 변한다.

예전의 우리만을 기억해서는 타인의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저 담장 너머의 당신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우리 존재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p.51)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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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후... - 할인행사
대니 보일 감독, 나오미 해리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인간 잔혹사의 발자취

 

이성(理性)을 동력으로 삼았던 근대는 인류문명의 지속적인 발전을 약속했다. 이성중심주의의 굳건한 구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 근대성의 발현, 세계의 주체를 신에게서 인간으로 옮겼다. 즉, 패러다임의 전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식민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근대성은 물질적 풍요까지 등에 업었다. 이성의 힘은 더욱 탄탄해졌다. 유토피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찬란한 문명의 건설을 청사진으로 내세울만 했다. 그리고 인간도 변화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근대이성, 어느 순간 도전에 직면했다. 그동안 유래없이 쌓아왔던 물질적 풍요를 단숨에 허물어뜨릴 뿐 아니라 이성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광기 혹은 야만이 출현했다. 계량화와 각종 수식과 이론을 통해 '경제적 효율성'을 자랑하던 자본주의는 대공황의 물살에 휩쓸린다.

 

 

정치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이 등장했다. 인류의 생존과 이성의 힘은, 전방위로 위협당한다. 만신전에 오르길 그토록 열망하던, 혹은 장담했던 인류는 그렇게 나락을 경험했다. 이성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이 가져온 결과물이었다. 

 

그토록 믿고 싶었던 근대이성의 총체적 결과물은 인류문명의 허구성에 대한 직시였다. 우리(인간)는 만물의 영장인가, 지구라는 혹성의 지배자인가. 회의와 의문. 실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계기, 만들어졌다. 이성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리란 근대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한계와 역기능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도구적 이성이라 명명된 근대이성의 한계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른바 ‘비판 이성’을 주장, 이성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강조하면서, 믿고 있는 듯하지만. 


어쨌든 인류는 첫 번째 이성주의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생채기를 발판삼아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실패가 반드시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것, 아니다. 실패는 반복되기 마련이며, 실패를 교훈으로 삼는 것은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얘기다. 

 

인류의 문명 발전에 대한 집착은 이어졌다. 숱한 전쟁과 살육 등에 의한 희생을 거치면서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21세기에도 야만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배세력들이 자신의 이권을 위해 협잡과 조작을 일삼는 동안 대중들도 이에 현혹됐다. 지배세력의 이권이 곧 자신의 것인양 착각했다. 노동은 차츰 힘을 잃었고, 자본은 더욱 힘을 불렸다.

 

과거라면 손사레를 쳤을 유전자조작, 복제인간 등 디스토피아적인 발상도 활개를 쳤다. 전지구적으로 생각했던 과거의 합리적 이성마저도, 가출했다. 인류 스스로 집단 취면을 걸었다. 우리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전지구적인 멘붕의 시대. 그것이 마냥 허풍은 아니다. <28일 후...>는 그 뚜렷한 징조를 보여준다. 그것은 은유일 수도 있고, 직유법일 수도 있다.

 

동정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하나. <28일후...>는 인류의 이성을 부정한다.

고귀하고 숭고하며 아름다워야 할 인류문명의 결정체(이성)는 차디찬 돌멩이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인류는 '분노', 그 사소한 감정조차 조절 못하는 족속이다. 인류 따위에게 이성이란? 서류상의 유물에 지나지 않을 뿐! 세상은 분노하지만 인간은 어떤 힘도 없다. 허세였고, 허풍이었다. 고작할 수 있는 건, 서로에게 등 돌리기. 내게 불이익이 닥칠까봐, 서로를 밀어내기에 급급할 뿐이다. 


단초는 바이러스. 그것도 인간에 의해 배양된 것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숱한 바이러스의 기승은 인류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품고 영화는 출발한다. 곳곳에서 펼쳐지는 유혈폭력과 광기의 현장. 영장류들은 이른바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그들에 의해 비극의 종이 울렸다.


바이러스 유출이후 28일이 지난 날, 주인공인 짐(킬리언 머피)이 병원에서 깨어난다.(그가 '퀵서비스 배달원'이란 사실도 재미있다. 분노 바이러스가 20초안에 감염자를 극단적인 분노상태로 이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러나 그가 깨어났을 때, 산업화가 시작된 문명의 땅, 영국은 폐허인 상태다. 거리엔 아무도 없다.(황폐화된 도시의 풍경은 <28일후...>의 영상미가 표현할 수 있는 압권이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힌 불안과 의심을 품은 런던은 장엄한 레퀴엠(장송곡)이다.) 


이 살풍경, 피로 얼룩진 묵시록이다. 이성 따윈 없다. 이미 대피령이 떨어진 도시, 런던에서 짐이 처음 대면한 생명체는 인간이 아니다.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붉은 눈빛의 좀비. 역시 이성은 없다. 오로지 (바이러스) 본능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다. 물론 그 본능, 진짜의 것이 아니다. 인간을 집어삼킨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본능이다. 신자유주의가 전파한 물성 바이러스와 다르지 않다. 경쟁과 성공을 향한 무한질주, 좀비 자본주의가 오버랩 된다.  

 

좀비는 짐을 습격한다. 위기에 처한 짐, 몇 안 되는 생존자, 셀레나와 마크의 도움으로 간신히 이를 모면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왜 이런 상황이 오게 됐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분명한 건, 그들은 고립돼 있으며 살기 위해 한때 같은 인류였던 좀비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뿐. 20초 안에 '승부'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룰은 이성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과 동의어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명제만 뚜렷하다. 그것이 생존의 룰이다.


할리우드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보증수표를 내세우고 참패한 <비치>이후, 대니 보일 감독, 심기일전을 했나보다. 생존 앞에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이성을 들고 나왔다. 감히, 누가 목숨 앞에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장삼이사라면 말이다. 그는 폐허 혹은 연옥의 현장을 짠하게 펼친다. 인간 이성을 철저히 짓밟는다. 그것은 아무짝에도 인류에게 기여하지 못했다는 양.


<28일후...>는 지옥화다. 곧, 현실이다. 과장했으나, 그 실상은 다르지 않은. 마크도 죽고 짐과 셀레나는 또 다른 생존자, 프랭크와 해나 부녀를 만난다.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겠다는 무장 군인의 방송도 듣는다. 얼마나 반가울 쏜가. 지옥에서 만나는 인류의 흔적이라니. 그들, 무장군인이 있다는 맨체스터로 떠난다. 지옥에도 찰나의 행복은 있다. 그들, 유사가족의 형태를 띠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자연에서 행복을 맞본다. 


하지만 이는 더 큰 재앙을 향한 눈속임이다. 바이러스 감염자, 좀비의 습격보다 더욱 흉포한 존재의 등장. 대니 보일의 진짜 속마음이 드러난다.  잠시의 안도감은 영화의 속도조절을 위한 장치였다. 짧은 잔치가 끝나고, 대니 보일은 진짜 타깃을 향한다. 인간의 진짜 속성을 까발린다. 폭력과 권력의 힘은 어떻게 이성을 배반하는가! 팡야. 속절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인간의 진짜 내면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인간의 본성. 


그런 본성은 무장군인 둘의 대화를 통해서도 발설된다. 철학적인 한 군인은 말한다. "지구상에서 인류의 시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인류의 멸망은 결국 정상으로의 회귀다" 이성에 따를 것을 호소하는 말이다. 반면 부대를 지휘하는 군인의 입장은 다르다. 그에게, "인류사는 폭력의 역사"다. 야만과 광기로 얼룩진 잔혹한 인류의 모습을 대변한다. 


결국 생존자들을 지킨다던 군인(인간), 이성을 시궁창에 처박는다.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겠다"는 약속은 위장술에 불과한 레토릭이었다. 영화는 끊임없이 되묻는 것 같다. 당신은 인간의 이성을 믿느냐? 그리곤 파열음을 내며 대답한다. 그것? 믿을 거 못된다.

 


둘. <28일후...>는 이성의 한계 인식과정에서 나타났던 파시즘(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을 비꼰다.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무렵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갓 지나간 직후였다. 영국은 바이러스가 창궐한 무인도로 전락했고 어디로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는 마스크로 대변되는 바이러스의 공포가 남겼던 어떤 고립감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과 홍콩, 사스가 창궐했던 국가가 당했던 혹은 그 지방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왕따의 순간들. 미국의 음모론까지 유포됐던 고립무원의 현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언젠가 돌아올 부메랑일지도 모른다.


근거조차 희박한 갖가지 유언비어와 침소봉대의 맞춤법은 '피의 순결함'으로 무장해 유대인 학살의 기치를 들었던 나치의 만행과 연결된다. 그 경계가 희미해도, 그 호들갑에 심어진 국가 혹은 민족적 분파의 연결고리는 섬뜩했다.


대니 보일은 아나키스트인 것처럼 보인다. <트레인스포팅>의 주인공이 스코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않은 것처럼 <28일후...>에서도 영국에 대한, 국가에 관한 밀착감은 약하다. 대영제국의 재건을 꿈꾸던 마크는 초반에 죽고, 애국심에 불타는 것처럼 보였던 군인들도 종족 번식과 성욕의 충족에 미친 괴물이었을 뿐이다. 국가를 내세운 이들을 일찍 죽이거나 괴물로 삼는다는 것. 박수, 짝짝짝.  


다만 유순하고 투덜이 스머프였던 짐의 반전은 극적이긴 하나 영웅주의 냄새도 살짝 풍긴다. 증오와 생존을 위한 폭력 전사로 변신한 폭이 너무 컸다는 얘기다. 


뱀발로, 제목과 관련해 들었다. 왜 28일일까. 한달에 약간 못 미치는 4주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의아심, 가질 법한데. 여성들은 어쩌면 빨리 눈치 챌 수도 있었겠다. 28일은 여성의 생리주기. 생산능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다. 극중 미래를 위해 여성이 필요하다는 장교의 말을 떠올리면, '28일후'라는 제목, '세상은 변할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뜻을 품고 있다는 말씀. 그렇다면? 28일후는, '새로운 시작' 혹은 '희망'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희망의 도래'보다 '절망의 지속'에 배팅하고 싶다. 다시 '28일후...'가 지나도, 이성의 개안(開眼)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 문명의 역사는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당장 지금-여기의 우리는 그것을 목도했다. 과거 위정자들과 지배세력은 위선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마저 시궁창으로 처박혔다. 뻔뻔함이 지배하는 시대, 멘붕이 일상화된 시대, 이성은 없다! 있다고 믿고 싶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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