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미디어가 세상을 바꾼다
이창호.김은국 지음 / 한누리미디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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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셜미디어가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는지에 대해 최일선에서 바라보고 경험한 이야기를 끌어낸다! 과연 우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끌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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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란 무엇인가 - EBS 교육대기획 초대형 교육 프로젝트
EBS <학교란 무엇인가> 제작팀 엮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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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구시렁거림부터.

이른바 (경제적으로) '쫌' 사는 나라들의 계모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뭔 국제적인 통계만 나온다 싶으면, 들먹이는 게 'OECD 중 몇 위', 이런 거다. 최근 몇 년 간, 우린 줄기차게 들었다. 또 듣고 있다. 인구 10만명 당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율(자살 사망률) 1위. 불명예뿐이랴, 슬프고 아프다. 겉으로 드러나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실체적 진실은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경우가 훨씬 많으리라. 아마도.

 

OECD의 저주(?)는 계속된다.

최근 보도를 보면, 한국 사람들, 여전하다. 죽어라 일'만' 한다. 놀 줄 몰라서, 놀면 죽으니까,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다. 이 사회가 가진 심약한 지점. OECD 나라 중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한다.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이 무려 2193시간(2010년). 1등 좋아하는 나라라고 티내고 싶은지, 10년째 1위란다. 참고로, OECD 평균은 1749시간이다. 25% 가량 더 일한다. 미친 거다. 대형마트는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설날에도 '정상'영업한다고. 이걸 떳떳하게 자랑질하듯 붙여놓은 '비정상'의 나라. 쉬파, 이땅엔 개미들만 사나?

 

뭐, 그게 끝이 아니다.

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도 최하위권이다. 2009년 기준, 우리나라 공공의료비 기준은 58.2%. 칠레 47.4%, 미국 47.7%, 멕시코 48.3% 등을 제외하고 가장 낮다. OECD 평균은 71.5%. 쉬파, 아프면 죽으라는 거지? 비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죽도록 일한다. 병을 얻는다. 건강보험 혜택도 별 못 받는다. 뒤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나 더 들까?  

곧,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주역(?)이 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느끼는 행복수준 역시 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란다. 앞서 얘기한 것만 봐도, 그래, 아플만 하다. 미안하다, 아이들아. 아무리 '세상이 빅엿' 같아도 행복해야 할 아이들마저 이렇다는 건, 이 나라가 미쳤다는 거다. 전체가 병적인 불행감에 싸여 있고, 집단 우울증에 걸려있다는 징표다.

 

이 집단 우울증의 근원은 무엇일까.

물론 하나의 이유로 귀결하고 싶진 않다. 허나, 이것 하나는, 걸고 넘어져야 하겠다. 지금의 교육(이라 쓰고, 사육이라 읽는다). 그것을 대변하는 학교. 학교,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오로지 입시 위주로 세팅돼 돌아가는 그 시스템.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모두를 불행에 몰아넣는 구렁텅이.

 

누군가가 그러더라.

지금의 한국 교육 시스템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고진감래'라고. 빙고. 당신도 생각해 봐라. 중고등학교, 지금은 초등까지 포함해야 할 텐데, '대학만 가면 넌 자유야'라는 감언이설. 대학을 위해 '쫌만 죽도록' 고생하란다. 그러면 세상을 얻을 것인양 꼬드긴다. 그렇게 대학을 가면? 이젠 취업이다. 취업을 위해 또 죽도록 고생하란다. 어딜가도 낙원은 없다.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데 어디 낙원이 있단 말인가. 

 

이 말도 바꿔야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신분 상승이나 계층 업그레이드가 비교적 쉬웠던 과거엔 틀린 말,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바꿔야 한다. 고생 끝에 병이 온다. 시대에 맞춰 제대로 알려줘야 아이들, 착각하지 않는다. '고통 없이 무엇도 얻을 수 없다(No Pain, No Gain)'. 지금, 이건 나쁜 이데올로기다. 학부모나 교사, 학생 의심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길들여졌고, 지금도 그리 길들인다. 그러니 고통은 당연한 것이고 즐기란다. 지겹도록 들었던 이 말.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개뿔. 고통이라면,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한다.

 

놀지 말고 공부하라.

대수롭지 않게 부모가 아이에게 툭 던지는 이 말. 재미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고, 이 말이 그렇다. 왜냐! 노는 것과 공부하는 것, 그것을 대립으로 놓는다. 잘못된 인식을 박아놓는다. 노는 것은 즐거운 것, 공부하는 것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그러니 이 말, 되레 위험하다. 즉, 아이에게 공부는 재미없고 괴롭지만 나중을 위해 참아 내야 하는 고통이 된다. '공부=고통'으로 만들어 놓은 결과. 아울러, 가학적인 취향까지 곁들인다. 그 고통, 누가누가 잘 견디나 게임을 한다. 집단적으로 고문 게임에 빠졌다. 이 땅의 교육은, 미.쳤.다!

 

그래, 학교를 다시 생각해보자.   

학교는 근대의 유산이다. 큰 건물 하나에 벌집처럼 똑같이 생긴 방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아이들을 모아놓는다. 교사가 있다. 교육이 이뤄진다. 그리고 거기,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개입한다. 그 교육의 진짜 목적은, 임금 노동자를 길러내는 것이다. 국가가 개입하고 주도한 의무교육의 요체였다. 그것은 수리와 언어 관련 과목이 다른 과목보다 서열상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언어와 수리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임금 노동자로서 요구되는 자질이다. 이른바 '문명'국들에선 하나 같이 비슷한 양상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자질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지만, 학교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더구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학교는 곧, 관계(망)가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해관계가 철저히 얽힌 장소이기도 하다. 학교에 대한 고민,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 《학교란 무엇인가》는 학생, 교사, 부모 등 그 이해관계자의 고민을 담았다. 교육이 불가능해진 시대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놓을 수는 없다. 임금노동자가 세상의 99%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EBS의 시도.

1년 2개월. 국내외 교육 현장 취재. 학생 200명 심리 실험. 현직 교사 혁신 프로그램 도입. 초·중·고를 포함한 4,000명 학생들의 설문 참여와 다양한 교육 실험. 늦었지만, 당연히 했어야 할 시도다. 우리에게 학교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교육현장에서 길어낸 이야기들은 그동안 자본(기업)과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학교에 대한) 관성에 금을 가게 한다. 다큐로도 방영된 이 책의 미덕이다.

 

우리는 진즉에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다.  

교육이 불가능해지도록 우리는 무력했다.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만당했다. 끌려다녔다. 학교(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면서도, 우리에겐 우리의 시선이 없었다. 책은 그것을 다시 조명한다. 학생, 교사, 학부모, 각자의 관점에서 학교를 고찰한다. 재조명한다. 교육은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점수에 목 매단 지금의 교육은 잘못됐다! 

 

사교육은 '배움'이 아니다.

지금의 학교를 무너뜨린 장본인 중의 하나, 사교육이다. 물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교육'이라고 일컬어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건, '사육'이다. 국가에 의해 주도된 학교가 그나마 임금 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자본이 은밀하게 주도한 사교육은 '노예'를 길러내기 위한 것이다. 배움(의 즐거움)? 사(교)육에 그런 항목은 없다. 사육하면서, 사육당하는 것들의 권리와 입장을 생각하는 것 봤나? '배움의 역주행'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적절하다.

 

뭐어? 선행학습? 

개뿔이다. '선행'이라는 레떼르를 붙인 것은 앞서 가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을 자극하기 위함이다. 그저 남들보다 앞서고, 남들을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가치관에 오염된 이들을 현혹하는. 내일을 위한답시고, 오늘을 지운다. 희망? 그전에 절망이 올 뿐이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 까닭이다. 불안을 심어주는 것이 권력자들의 간교한 계략이었다. 책은 사교육을 받지 않으면 불안한 학생들과 부모들의 실태가 드러난다. 불안한 부모들이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교육과 선행학습! 스스로 공부하는 즐거움을 알게 하라. 책은 그 당연한 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되면, 사교육을 지금처럼 거대한 괴물 아닌 한갓 액세서리로 전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학교란 무엇인가》의 미덕, 이것으로 일단 충분하다.

사교육의 무쓸모를 자꾸 이야기해야 한다. 학교를 말하면서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분명하다. 악화가 구축한 양화. 그것에 금을 가게한다는 것. 나쁘지 않다. 물론, 칭찬의 역효과를 보여줘 양육에 대해 사유하게 하고, 부모와 자녀의 끈끈한 스킨십과 관계맺기(사랑)가 영재를 만든다는 것 등을 보여준 것도 미덕이다. 책을 통해 배움의 즐거움을 알고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항목 또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책 읽기는 도구나 수단이 아니다. 그것 자체로 목적이고, 더 넓은 세계를 항해하는 길임을 보여주는 것 또한 좋다. 무엇보다 알아서 훌쩍 크는 아이들. 교육이, 학교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대목. 남의 욕망이나 타인의 삶이 아닌, 나로서, 나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교육이어야 한다. 학교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학교에게 의문을!

자꾸 물어야 한다. 학교야, 넌 무엇이니? 지금의 학교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니? 산업혁명으로 임금 노동자가 탄생하고, 이어 등장한 근대교육, 특히 20세기 이후, 학교는 대인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잘못이다. 고대와 중세, 지금의 학교 형태는 아녔으나, 그것을 빼먹지 않았다. 수천 년 동안 그것은 이어지고, 그것을 핵심에 뒀다. 관계맺기. 즉, 대인관계를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으로 여겼다. 그래서 후세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도록 했다. 그것은 또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학교, 그것을 잊었다.

회피일까, 망각일까. 글쎄, 그건 모르겠다. 인간관계에 대한 교육을 상실한 지금의 학교는 폭력이 자연스럽게 고착화됐고, 분리하고 구획 짓는 것이 일상화됐다. 관계맺기의 파편화. 학교는 미쳤고, 서로 미워하고 무시한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지옥도, 그것이 학교에서 아이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뭔가 부족하고 답답한 느낌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땅히 배웠어야 할 관계맺기의 중요성과 기술에 대한 배움이 없었으니까. 대인관계 능력, 떨어질 수밖에!

 

나는 늘 이 생각을 한다.

교과 과목 바꾸기. 서열 뒤집기. 임금 노동자 양성을 위해 강조된 근대 교육의 핵심인 수리와 언어 관련 과목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등이 아닌, 내가 원하는 과목은 이런 것이다. 사랑, 우정, 이별, 가족 등과 같은 관계맺기를 위한 과목과 더불어, 음악, 미술, 문학, 낭만, 아름다움 등과 같은 인생의 목적을 다룬 과목 앞세우기.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詩와 현재의 중요성(카르페 디엠)을 알려준 키팅 선생님은 극중에서 그랬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해. 하지만 시詩와 미美,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이야." 영국의 교육학자 켄 로빈슨, 무용이나 미술이 주요 과목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학교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왜 인생의 목적인 무용이나 미술이 수학이나 영어만큼 강조되지 않는지. 그것은 과학으로도 설명된다. 다중지능이론에 의하면, 음악지능이나 신체운동지능, 시각지능 등 모두 다 독립된 인간 고유의 지능이며 동등하게 가치 있는 본성이다. 《학교란 무엇인가》는 말했다. "교육의 목표는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삶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이런 지능과 본성 모두를 훈련시키고 개발해야 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 모두가 의사와 검사·변호사가 돼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학교에 의문을 제기하자. 그리고, 학교는 그 물음에 답해야 한다. 왜 지금 학교는 희망이 아닌 절망의 본거지가 돼야 하는가 말이다.

 

나는 학교가, 아프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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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이 영화. 

이 장면, 이 영화의 아주 많은 것 혹은 모든 것이 들어있다.

비디오는 라디오 스타만 죽인 것이 아니라, 나도 킬 했다오.ㅋ 


헌데, 자꾸만 추락하는 노동자들의 소식이 슬프고, 슬프고 또 슬프다.

일주일 새 벌써 다섯 명. 심근경색이라는 말이 마음경색을 불러온다. 

죽음만큼은 그 개별성과 구체성때문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러니 오로지 이 말. 함께 살자. 함께 살자. 함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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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중에서

 


크리스마스.


얼마 전, 친구와 크리스마스가 예전같지 않다고 구시렁거렸어. 즉, 크리스마스의 낭만이 사라졌다는 불평이었던 거지. 물론, 우리가 더 이상 예전같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크리스마스의 낭만도가 떨어졌다는 것, 나이를 먹었다는 증명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좀 더 크리스마스에 흥겨이 달뜨고 감흥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크리스마스가 사회적으로도 점점 더 삭막해지고 있다는 안타까움이었어. 본디 크리스마스는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타인의 안녕과 평화를 바라는 그런 시기가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았어? 예수의 탄생은 그런 의미 아니었어?  


그러나, 나는 이제 더 이상 크리스마스를 반길 수가 없게 됐어. 무엇이든, "크리스마스잖아요~"라고 퉁 칠 수 있었던 시대, 완벽하게 끝났어. 올해는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했어.




어제(21일) 한진중공업 복직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른 다섯, 두 아이의 아빠는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며 "돈이 무섭다"고 유서를 남겼어.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덧붙여. "사랑하는 내 가족. 먼저 나쁜 생각해서 미안합니다. 나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힘듦입니다. 이제야 내가 많이 모자란 걸 압니다. 슬픕니다." 눈물이 났어.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눈물이 뚝뚝.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슬프건만, 오늘(22일), 현대중공업하청지회 노동자가 19층 아파트에서 투신했어. 한중 노동자의 소식을 듣고 많이 힘들어했다고 했어. 무섭다. 슬프다. 


과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상, 우리가 살아갈 만한 곳인가.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드는 사회라니. 정치교체는 언감생심, 유신적 정치로의 회귀를 우려하며 '죽음의 번호표'가 발부되는 것 아닐까, 라는 트친의 염려가 산산이 흩어질 언어가 될 것 같지가 않아. 이게 그저 우려로 끝났으면 하지만 말이지.


그럼에도 이 국가는, 이 나라의 정치(권력)는 묵묵부답이야. 젊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응답하라고 부르짖건만 말이야. 넌, 아니? 국가는 대체 왜 있는 것일까. 이 사회는 왜 남의 고통에 무덤덤하기만 한 것일까.


그래, 너와 나의 크리스마스가 다 무색해졌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크리스마스였었어. 크리스마스라는 그 이유만으로 흥겹고 즐거우며 벅찼던 시간은 모두의 것이었어. 그러나 이젠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는 부류와 그렇지 못하는 부류로 나눠지나보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자본(화폐)의 자장 안에 들어간 까닭에 온 누리에 선물을 베풀지 못하나 봐. 크리스마스가 슬퍼.ㅠ.ㅠ 


이 땅의 노동자에게, 크리스마스는 없어!   


이 엄혹한 세상, 커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나는 고민하고 고민해.

커피 한 잔으로 이 모든 슬픔을 달랠 수 있을까. 위로할 수 있을까. 아니, 차라리 이 커피로 세상의 각성을 깨우고 혁명을 추동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혁명 커피'가 필요한 것 아닐까. 커피에 시대의 통증이 고스란히 담겼다. 커피에서 느낄 수 있는 통각이란 이런 것일까. 


그러니까, 궁금해요. 

당신은 이 슬픔을 어떻게 견디나요?... 이 환멸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나요?...


우리의 커피, 우리의 음악, 당신과 함께 이 음악, 나누고 싶어.

우리의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우리의 아름다운 시절이 언제 올지는 몰라도. 그래도. 그래도.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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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안단테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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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달리 보이는 계기는 무엇일까? 

세상을 달리 보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런 계기나 순간,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형태로든. 가령,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로, 애써 문제의식을 외면하고 달리던 내가 ‘일단 멈춤’을 택한 것은 그 어느 해 가을날의 햇살 때문이었다. 햇살은 고왔는데, 내 삶은 질척거렸다. 뭔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어떤 간극이 자꾸만 생을 좀먹고 있는 것 같았다. 갑갑했고, 우울했다.


그런 날, 내 목을 타고 내려간 커피 한 잔. 어쩌면 뜻밖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곧, 나는 ‘다른 세상’을 보게 됐다. 관성처럼 바라보던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됐다. 달리 보였고, 달리 보게 됐다. 내 생을 칭칭 동여매고 있던 붕대를 벗어던지기로 했다. 허위로 날 지탱하던 직업을 그만 뒀고, 나는 커피를 만들기로 문득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커피를 만드는 남자가 됐다. 최고의 커피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최고의 커피를 만들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나는 ‘당신’이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한 커피를 만드는 남자가 됐다. 커피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사유하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나는, 에스프레소나 인스턴트커피가 아닌, 드립커피를 내리는 속도로 발걸음을 옮기게 됐다. 간극은 좁혀졌고, 나는 이전보다 좀 더 행복한 사람이 됐다. 나의 원래 속도를 찾았다. 커피, 아 템포(본래의 빠르기로).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그가 세상을 달리 보게 된 첫 계기는 질병의 역습이었다. 서른네 살의 유럽여행, 심각한 신경장애 증상을 유발하는 미확인 바이러스성 또는 세균성 병원체가 그를 덮쳤다. 자율신경계가 망가졌고, 모든 신체기능들이 고장 났다. 그가 할 수 있는 일, 순간순간을 참고 이겨내는 것밖에 없었다. 질병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앗아갔다. 행간을 보건대, 절망으로 도배된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세상이 도래한다. 제비꽃 화분에서 일어난 뜻밖의 사건. 달팽이가 그에게 왔다.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에게 느림보 생명체가 느닷없이 다가왔다. 세상 모든 속도가 급하게 멈춘 그에게, 달팽이는 유일하게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였다. 두 생명은 의기투합했다. 《달팽이 안단테》는 그러니까, 두 생물의 동거의 기록이다.


흥미로웠다. 세상의 주류 속도에서 생래적 혹은 불가항력의 사고로 이탈한 두 생명의 교류와 교감. 물론 저자의 일방적인 관찰처럼 보이지만, 내겐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생명은 눈을 맞추고 속도를 맞추는 순간, 서로가 영향을 미치고 받는다.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생명들이 형성하는 생물 환경. 생물 환경은 그것이 둘러싸고 있는 생물과 함께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곧, ‘공진화(coevolution)’인 셈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달팽이의 세계가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나와 관계된 인간 세계는 반대로 점점 더 멀어졌다. 나와 같은 종은 너무 크고 너무 경솔하며 너무 혼란스러웠다.”(p.55) 


그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됐다. 어느 날부터는 방문객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하는 데 몰두하는 자신도 발견한다. 달팽이와의 동거와 관찰이 야기한 새로운 시선이다.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녀석의 호기심과 우아함은 나를 평화와 은자의 세계로 점점 더 가까이 이끌었다.”(p.57)


내게 커피가 그랬다. 커피의 우아한 맛은 나를 평화의 상태로 이끌었고, 커피의 역사와 유통을 통해 나는 세상의 불공정한 교역실태를 새삼 깨달았다. 커피의 다양한 맛과 다양한 변수에 의한 변덕(?)은 사소함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뭣보다 나는 내 생에 맞는 속도를 찾았다. 모두 똑같은 시간을 살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생에 묻은 시간의 결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책을 보면서, 그에게 있어 달팽이가 내겐 곧 커피임을 알았다. 

읽는 내내, 그에게 이입이 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질병이 바꾼 저자의 삶은 더욱 격했을 터이다. 삶이라는 질병이 내게도 틈입했지만, 그는 거기에 바이러스의 침공까지 받았으니, 오죽했겠는가. 과거나 지금이나 존재하긴 매 한가지이지만, 그에게 닥친 질병의 무게는 그를 더 고립상태로 이끌었던 것 같다. 그는 종종 그것을 토로한다. 누군가 떠나고 또 누군가는 변하는 상황에서 고립은 그를 더욱 깊이 병들게 하기도 했단다.


그런 상황에서 달팽이는 구원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작고 사소한 달팽이라는 생명이 주는 영향력이었다. 


“우리 달팽이는 내 영혼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우리 둘은 온전히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고립감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었다.”(p.152)


그것에서 나는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다”고 말한,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을 떠올렸다. 저자는 달팽이(들)가 아니었으면 버텨내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과 다른 생명체를 관찰하는 것은 그것의 삶을 돌아보는 일. 그것은 관찰자인 저자에게도 삶의 목적을 부여했다. 달팽이가 작고 느리다고 멸시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오만이다. 다윈이 자신의 일기에 썼다는 한 다짐이 떠올랐다. 어떤 생명체를 논하든, 하등하거나 고등하다고 쓰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


저자는 되레 달팽이의 존재감이 인간보다 더 낫다고 주장한다. 달팽이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것이리라. 달팽이는 주로 죽은 것들을 먹어치우고 배설물로 분비하여 토양에 영양분을 되돌려주고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반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상대적으로 불필요한 존재다. 오히려 해만 끼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과 다른 생명에 대한 오만으로 똘똘 뭉친 채.


달팽이를 다시 생각했다. 속도를 다시 돌아봤다. 이 책, 달팽이의 속도에 대한 찬양복음서 같다. 


“달팽이의 타고난 느린 걸음걸이와 고독한 삶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의 시간 속에서 헤매던 나를 인간세계를 넘어선 더 큰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달팽이는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그 아주 작은 존재가 내 삶을 지탱해주었다.”(p.181)


그것은 아울러 너무 급하게, 너무 빠르게, 관성처럼 달려온 삶이 불러온 파열음을 알아채자는 호소다. 그런 파열음에서 비롯한 균열이 우리 세계와 자신의 삶을 갉아먹지 않도록 하자는 성찰적 호소. 느닷없이 다가온 질병에 이어 달팽이는 저자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꿨음이 분명하다. 또한 그것을 기록함으로써, 독자는 달팽이가 주는 사유에 동참할 수 있다. 암세포의 속도보다 달팽이의 속도가 인류 본연의 것임을 자각할 수도 있다.


작가는 한없이 늦춰진 속도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음을 입증했다. 《달팽이 안단테》, 그것의 명백한 증거다. 커피와 함께 한 달팽이의 속도. 나는 내게 맞는 속도, 나만의 속도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때론 역주행도 하지만, 그렇다고 '건강하게 이 사회에 썩어 들어가라'는 주술을 거부할 순 없다. 그것이 내겐 '달팽이 안단테'이기도 하니까.  


주류 속도와는 명백히 다른 빠르기. 그래도 나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아무렴, 세상이 달리 보이거나 세상을 달리 보게 되는 일은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당신이라는 사람만을 위해 내리는 나의 커피, 아마도 우연이 빚은 사고(?)일 것이다. 《달팽이 안단테》를 만난 것도 마찬가지. 죽기 전 다시 들춰보고, 살아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축복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사물과 동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여전히 당신이 휘말릴 수 있는 우연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1903,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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