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문을 열었다.
문 리버(Moon River), 새벽 5시45분, 맨해튼, 티파니, 커피 한 잔, 데니시 페스트리, 오드리 헵번...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그 유명한 장면이 등장한다. '첫 번째 싱글걸'이 그랬던 것처럼 첫 손님에겐 커피 한 잔과 데니시 페스트리를 건넨다.
그리고 이날의 커피 메뉴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오드리 헵번 때문이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오드리 헵번. 문 리버의 달콤한 선율. 그것으로 충분했지만 오드리가 분했던 홀리 골라이틀리. 그 흥미로운 전복적 공기 때문이다. 모던 싱글걸의 탄생, 그리고 여성상에 대한 전복. 홀리는 당대의 공기를 바꾼 장본인이었다.
미국 이야기지만, 물론 한국에선 이것도 한참한참 뒤의 이야기지만,
"<티파니에서 아침을> 이전에는 나쁜 여자들만 섹스를 즐길 수 있었다."
영화학자 샘 왓슨이 쓴 [오드리와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했던 전언처럼, 1950년대의 미국 사회에서 '혼자 사는 여자'는 배드걸이었다. 말하자면, 싱글걸은 색안경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오드리 헵번의 홀리 골라이틀리,
이 배드걸을 굿걸로, 더 나아가 '워너비'로 만들었다!
영화감독 빌리 와일더는 "혼자 힘으로 풍만과 육감의 시대를 바꿨다"고 표현했다.
대개의 경우, 시대가 여성상을 만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백은하 기자의 말마따나, 어떤 여성들은 등장만으로 새 시대를 열어젖힌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홀리가 그랬다.
한 마디로 홀리는,
예기치 않게 자유와 반권위의 60년대를 열어 젖힌 아이콘 중 하나가 됐다. 이전에는 없던, 아니 있었으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억압 당했던 여성(상)을 봉인에서 풀었다.
당연하게도 오드리 헵번이 아니었으면(마릴린 먼로가 캐스팅 0순위였다),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베스파를 전 세계로 퍼뜨린 귀여운 공주로 나온 <로마의 휴일>보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헵번을 더 좋아하는 이유다.
커피쟁이로서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가 나온 1961년은 에스프레소 머신의 레전드인 Faema E61이 등장한 해다.
간략하게 Faema E61은,
지금 볼 수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의 원형이다. 9Bar 정도의 압력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추출이 가능해졌다. 그룹 헤드 형태가 나타났고, 기존 보일러의 결점이 극복된 이중 보일러가 사용됐다. 수직구조였던 머신을 수평형으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도 됐다. 커피사업의 대형화, 프랜차이즈를 가능하게 만든 계기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니,
1월 20일의 커피는 Faema E61에서 뽑아낸 커피 한 잔과 데니시 페스트리, 그리고 티파니와 함께(음, 티파니는 비싸서 어렵겠군ㅠ).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같이 로맨틱, 성공적, 이면 더욱 좋겠고.
오드리와 함께 티파니에서 커피를.
모쪼록 이날의 커피를 만들면서 작은 바람이라면,
훗날 새 시대를 열어젖히는 홀리 같은 여성에게 커피를 건네는 것.
문 리버를 배경음악으로 커피를 내리는 것.
아 물론,
함께 기억해야 할 사람이라면, 트루먼 카포티. 영화의 원작자.
망원역 가까이에 '오드리 헵번' 카페가 생겼다.
이곳엔 1월 20일 어떤 '특별한' 메뉴가 나올까.
1993년 이날, 일찌감치 영화계를 떠나 유니세프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아프리카 등지에서 아동인권 보호를 위해 헌신했던 오드리는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3월 8일까지 동대문 DDP에서 열리는 오드리 헵번 전시회 ‘뷰티 비욘드 뷰티’에 가는 것도 강추. 특별히 22주기인 오늘,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천원만 기부하면 전시회에 입장할 수 있다. 모금된 금액은 전액 오드리 헵번 어린이 재단에 기부된다.
지금 이 시대,
노동 윤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내일을 위한 시간>이 3만을 돌파했다.
주연인 마리옹 꼬띠아르는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올랐다.
마리옹은 정말 예쁘다. 내게는 포스트 오드리 헵번이다.
마리옹이 아카데미상을 탄다면, 그녀만을 위한 커피를 만들고 싶다.
무엇보다 잊지 말 것. 용산. 6주기.
오드리도 용산에게 추모와 애도를 보냈을 것이다. 지금은 하늘에서 함께.
오드리와 함께 용산에서 커피를.
오늘도 그렇게,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쓴다.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일과 기억하는 방식이다.
나는 그렇게, 당신과 커피 한 잔을 나눈다.
당신은 내게 홀리 같은 사람이니까. 오드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