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을 (아마도 자발적으로) 임대한 대한민국은, 

도대체 이리 비싸디 비싼 임대료를 내면서도 지옥도를 탈피할 생각을 않는 것일까.


사망자, 실종자, 구조자. 

모든 것이 숫자로 성큼 다가온다. 지옥은 그렇게 단순하게 숫자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이다. 



그제의 영화<한공주>에 이어 진도해상 '세월호' 침몰 앞에, 

아이들은 꼭 내게 물어오는 것 같다.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이 죽고 또 죽어가야 어른들은 정신을 차릴 것인가요?"

"어른이란 작자들은 왜 이 모양인가요? 잘 봐둘게요." 


적당한 망각은 삶의 축복이다. 

'유쾌한 망각의 철학'을 설파한 니체의 잠언에는 의당 고개를 끄덕인다. "망각한 자에겐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다."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의 적당한 망각에 대한 예찬이었다. (그럼에도 기억을 지우면 내가 나 일 수 없음을 확인한!) 


문제는 망각의 과잉이다. 

지옥의 유황불에 익숙해진 우리는 과잉의 망각을 통해 현재의 노예가 됐다. 삶의 의미와 방향을 상실했다. 그것은 되레 현재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침몰하고 붕괴하며 절멸한다. 


봄은 누구에게나 소리와 향기, 색채 등으로 다가오는 것이지만, 겨울의 꽁꽁 얼어붙음에서 소생과 부활의 기회가 평등하게 스며들지만, 


누군가에겐 그 봄이 없다. 

자연의 세계에 봄은 평등하게 다가오지만, 인간의 세계에서 봄은 그렇지 않다.

소생의 기회는 평등하지 않고, 부활의 가능성은 들쑥날쑥이다. 불평등과 불공정이 난무한다. 그 불평등은 이곳을 무간지옥으로 타오르게 만든다. 


살아야 할 것은 살지 못하고, 피어나야 할 것은 피어나지 피어나지 못한다. 

일어나야 할 것은 일어나지 못하고, 구조돼야 할 것은 구조되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질서'다. 이 질서가 인간 세계를 초라하고 천박하게 만든다. 어른은 어른답지 못하고 책임을 회피하기에 바쁘다. 망각은 어른의 가장 큰 특징이다. 어른을 믿지 않고, 사회를 믿지 않는 아이들은 그래서 당연하다.   


도정일 선생님의 질문을 되새김질한다. 봄은 어디에 와야 하는가. 

자연의 봄은 왔지만, 인간의 봄, 사회의 봄을 결국 망실하고야 만 희생자들에게 나는 봄을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세월호만 침몰한 것이 아니다. 또 침몰한 것은 우리의 봄이요, 그들의 봄이다. 

나는 이 지옥도를, 이 격한 아비규환을 물려받아야 할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며 한 없이 미안하다. 


이 지옥은 또 망각할 것을 강요할 것이기에, 

기억해야 한다. 4월의 봄이 잔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리고 당신도 함께 기억해주길 바란다. 최소한 우리는 망각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음을. 나도, 당신도 저 침몰에 분명 책임이 있다. 우리는 이 지옥도에서 구조되지 못할 것이지만, 아이들 다음 세대에까지 그것을 강요할 순 없지 않는가. 물귀신 작전을 펴는 것도 비겁하지 않은가. 


우리는 지옥을 임대한 채로, 그것도 비싼 임대료를 치러야 하겠지만,

그 자발적 임대차 계약은 우리에게서 쫑내야 하지 않겠는가.   


부디,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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