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5일,

거리를 거닐 때도, 미디어를 만날 때도, 온통 한 사람의 얼굴이 도배질하고 있었다. 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앞으로 5년 잘하길 바란다는 이성을 비집고 나오는, 저 지겹고 구린 얼굴과 쇳소리 비슷한 목소리가 싫었다. 그가 오십 차례 이상 내뱉은 '국민'이라는 카테고리에 나는 포함이 안 됐으면 하는 지극히 편협하고 옹졸한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진짜, 이땅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어설프게 형성된 '국민'이기보다 자주적인 근대화 과정을 섭렵한 '인민'이나 '시민'이고 싶으니까. (물론 알다시피 이 땅에 자주적인 근대화 과정은 없었다!)

 

그런 꿍한 마음을 치유해준 것이 아카데미 시상식이었으니.

이땅을 아주 이상하게 만들어놓은 미국(정부)이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아니 아주 무관할 수는 없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은 내게 하루 힐링이었다.

 

 

눈물이 찔끔.ㅠㅠ

 

내게서 줄리아 로버츠를 은퇴시킨 여신,

앤 헤서웨이(여우조연상)부터 시작된 힐링 릴레이는,

<레미제라블>팀의 감동적인 군무와 노래로 감정을 고조시키더니.

 

 

 

연기가 곧 '운명'이었던 십대의 소녀에게 혹했던 기억이 아직 짠하건만,

 

스물 셋의 나이, 마침내 오스카 트로피를 치켜 든 '꽈당' 제니퍼 로렌스.

 


 

새로운 영화를 내놓을 때마다 늘 나를 놀래키는 사랑과 이야기의 연금술사인,

아시아, 그리고 대만의 감독 이안과 그가 만든 눈과 마음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랍고 감동스러운 이야기 <라이프 오브 파이>. 땡큐, 쉐쉐, 나마스떼! 이안 감독님의 천진난만한 수상 표정은 그야말로 압권.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미친 연기술사 <링컨>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그 포스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최초의 3회 수상! 앞으로 우리는 링컨을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얼굴로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방점을 찍은 건, 미셸 오바마의 깜짝 등장에 이은 최우수 작품상 호명!

그의 입에서 <아르고>가 툭~ 나올 줄은 전혀 일절 네버, 와우~

 

감독 벤 에플렉의 기쁨 한 바가지를 우물에서 길어올린 듯한 속사포 랩 소견 발표와

그 옆에서 므흣하고 웃고 있는 제작자 조지 클루니의 그보다 아름다울 수 없는 모습.


 

할리우드의 시상식이 내 마음의 앙금을 깡그리 없애버렸다.

제 나라 대통령보다 남의 나라 영화와 배우들에게 마음을 뺏기고 힐링된 나를 욕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나라는 인간이니까.

 

2월25일, '원 배드 데이'에서 '원 파인 데이'로 바뀐 어느 날.

그래, 나는 어쩔 수 없이 앤 헤서웨이의 노예로다~ㅋ

 

<브로크백 마운틴>, 잭(제이크 질렌할)의 아내 루린에 대한 이야기를 외전으로 만들면 좋겠다. 그전부터 <프린세스 다이어리>로 알았다손 치더라도, 내게 처음 '배우'로 다가온 앤을 발견했던 그때 그 이야기. 그러고보니, 두 사람이 겹치네. 앤 헤서웨이, 리안. 덩달아 5년 전 1월22일 떠났던, 히스 레저.

 

아,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보고 싶다.

제니퍼 로렌스의 반짝반짝 빛나는!!! 구름의 흰 가장자리, 한줄기 빛나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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