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라이프를 위한 슬로플랜
쓰지 신이치 지음, 장석진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지금, 도서 목록만 살짝 뒤져봐도 안다. 세상은 온통, ‘해야 할 것’ 천국이다. 하나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을 한다. 실은 윽박지르는 모양새다. 10대부터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 20대에 해야 할 것, 30대에 꼭 해야 할 것, 4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죽기 전까지 꼭 해야 할 것. 당장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 투성이. 윽박지르는 형태도 가관이다. OO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OO가지, OO대에 경험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OO가지, OO대에는 사람을 쫓고 OO대에는 일에 미쳐라. 도무지 틈이 없다. 10대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뭔가 ‘해야 하’는 강박에 둘러싸인 존재 같다.


이것, 나는 불만이다. 온통 하기만 하란다. 안(못) 하면 낙오자요, 루저, 손쉽게 대수롭지 않게, 낙인을 찍는다. 이것은 일상에서도 마찬가지. 일정한 나이대가 되면 이 사회, 개인이 ‘해야 할’ 일을 친절하게도 정해주신다. 학교를 가고, 졸업을 한다. 회사에 들어가며, 결혼을 한다. 아이를 낳고, 죽어라 뒷바라지를 한다. 그 모든 것,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일까? 글쎄, 그런 것 같진 않다. 세상에 그 나이가 되면 꼭 해야 할 일 따윈 없다. 


사람들, 혼자 바쁘다. 아니, 세상이 바쁘라고 재촉한다. ‘바쁘지 않은 사람은 사람도 아닌’ 세상이다. 그러니 “바쁘다 바빠”를 외쳐야, 사람답게 사는 것처럼 착각한다. 바쁜 게 좋은 거라고? 의중은 알지만, 나는 그런 말, 싫어한다. 


쓰지 신이치, ‘슬로라이프’의 대명사. 그를 통해 나는 ‘부탄’이라는 나라를 알게 됐다. 그가 전해준 부탄은 독특했다. 특히 세계관과 가치관, 격하게 공감했다. 그곳은 느리고 행복하다. 다른 사람, 다른 나라와 비교하지 않는다. 이른바 문명보다는 행복. 빠름보다는 느림. 슬로라이프 전도사의 구미에 딱 들어맞는 나라였다. 쓰지 신이치는 여전히 슬로라이프 전도에 힘을 쏟고 있다. 이 책, 《슬로라이프를 위한 슬로플랜》이 증거다. 슬로라이프, 사람한테 참 좋은데, 설명할 수는 없고... 이런 것이 아니다.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뭐, 그것이 이토록 빠른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구시렁거릴 수도 있겠다.


슬로라이프. 단순히 느리게 행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선, 빨라야 했던 이유를 알아야 한다. 남과 비교했기 때문이다. 남의 눈치를 봐야했기 때문이다. 남보다 앞서야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경쟁을 삶에 내면화된 가치로 삼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송두리째 남에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남의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래서, 이번 책을 통해 ‘할 일’을 내려놓자고 말한다. 덧셈으로만 점철된 삶을 내려놓자고 말한다. 오사다 시로시의 「시인의 죽음」의 일부를 인용한다. “사람은 ‘무엇을 하였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로 평가받는다.” 그가 보는 세상의 풍경은 과잉이다. 물건의 과잉, 생산의 과잉, 상품의 과잉, 욕망의 과잉, 경쟁의 과잉, 정보의 과잉. 이 모든 과잉을 지탱하는 것이 ‘할 일’의 과잉.


그럼에도, 우리는 내치지 못한다. 과잉에 중독됐기 때문이다. 워커홀릭(일 중독자)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까지도 부지기수다. 나도 한때는 그런 줄 알았다. 워커홀릭이라는 타이틀, 이 현대문명 사회의 자랑스러운 표식인줄 알았다. 그렇게 ‘할 일’이 많아야 인정받고 출세하는 줄 알았었다. 개뿔이었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 자본이 조작한 ‘경쟁주의 사회시스템’을 생각 없이, 저항 없이 받아들인 형벌이었음을. ‘바쁘게 산다’는 것,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바쁘다고 힘들어하면서 돈 많이 받아들면 행복한가? 백이면 백, 아니다.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억지 자위한다면 모를까.


우리 인간은 태생적으로 바빠선 안 될 DNA를 타고 태어났다. 인류의 수천 년 역사를 살펴봐도 그렇다. 대부분의 시간, 인류는 ‘할 일’에 속박돼 살지 않았다. 때(시간) 되면 움직이고 뭔가를 한 것이 아니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싸고 싶으면 쌌으며, 잠이 오면 잤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삶을 지켰다. ‘할 일’의 과잉에 부대낀 것은 불과 몇 백 년 되지 않는다. 그 ‘할 일’도 ‘하고 싶은 일’이 아니고,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을 만든 것도 바로 산업혁명이 스타트를 끊고 신자유주의가 정점에 이르게 한 경쟁원리였다.


오해 마시라. 경쟁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도 말하는 것, 아니다. 쓰지 신이치의 말을 인용하자. “물론 내가 돈벌이를 목표로 한 삶의 방식을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전적으로 경쟁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경쟁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식의 사회는 결국 누구나 살기 힘들며, 오래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p.41)


슬로라이프. 단순히 삶의 형태나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정치적인 태도이자 삶을 능동적으로 가꾸고자 하는 자세다. 곧 정치적인 슬로건이기도 하며, 세계를 바꿀 정치적인 구호이기도 하다. 가령, 슬로푸드. 그것이 패스트푸드의 반대의미로 느리게 만든 음식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슬로푸드는 음식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된, 지구상 모든 생명과의 연결 혹은 인연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의 태도다. 그것도 모르고, 한국 음식이 슬로푸드라고 세계의 음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개소릴 시부렁대는 멘붕(MB)정권(과 식품대기업)의 움직임은 무식의 극치이자, 이권에 치우친 행태다.  


저자가 강조한 슬로라이프는 ‘지금 이 순간을 살자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그 자체에도 집중하자는 것. 그리하여, 미래의 불안이라는 명목으로 현재를 담보로 하지 말 것. 지금의 자신을 부정하도록 만드는 불안증폭사회에 휘둘리지 말 것. 


“현대 사회는 수많은 부정 위에 성립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지금의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이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교육도, 매스미디어도 하나같이 ‘지금의 나는 (적어도 충분하다고 할 만큼) 갖춰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끔 우리를 유도한다.”(p.114)


그렇다면 이 불안증폭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뺄셈의 사고’를 권한다. 깊이 공감한다. 철철 흘러넘치는 과잉에서 얼마나 줄여나가느냐가 관건이라는 것. 뺄셈을 통해 우리는 좀 더 여유롭게 세상과 만나고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슬로는 그래서 곧 ‘관계망’의 확장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명목,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계로 전락한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 무연사회에서 탈피하기 위한 태도이자 자세, 슬로. 천천히 가야, 우리는 옆사람을 보고 옆사람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서로의 체온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법이니까.


쓰지 신이치의 슬로플랜은 곧, 인류의 관계망 회복을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머무르는 일과 함께 사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한다면,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음을 우리는 획득할 수 있다. “Life is slow. 즉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느릿한 과정이다.”(p.184)


나는 빨리빨리도 싫고, 열심히도 싫은 사람이다. 그것이 지금의 멘붕사회를 만든 주요인의 하나라고 본다. 열심히 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빨리빨리 하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주홍글씨를 새기는 것이 바람직한가? 좋은 것인가? 세상에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은 딱 하나다.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 일.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잃고 있다. 용산 참사는 그런 면에서 우리의 영원한 트라우마다. 그러면서도 다큐영화 <두개의 문>이 4만 명을 넘어섰다는 것은 우리가 그저 외면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증명일 것이다.


“올바른 사회란, 강한 사람도 약한 사람도, 건강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거침이 있든 거침이 없든 간에 누구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존중할 줄 아는 사회다.”(p.227)


다시 말하지만, 내가 읽은 ‘슬로라이프’는 단순하게 ‘느리게 살자’는 방식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슬로라이프는 정치의 문제요, 세계의 변혁을 이야기하는 주제다. 이 책을 ‘느린 것에 대한 예찬’으로만 봤다면, 심각한 인지장애를 가졌다는 얘기다. 멘붕 독서론. 어떻게 살 것인가. 슬로라이프는 그것을 자극한다. 우리 각자의 슬로플랜이 필요한 시대다. 멘붕(MB)의 시대를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에 대한 서평은 ‘해야 할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래서 기꺼이 이렇게 쓴다. 맹꽁이 소리가 그런 나를 행복하게 한다. 맹꽁이에겐 ‘해야 하는 일’ 따윈 없을 것 같다. 물론 나라는 인간, 회사인간에서 “오늘 할 일도 내일로 미루”는 인간형이 됐다. 그래서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격언 따위 개무시한다.


그런 내가 부끄럽지 않느냐고? 천만에. 대신 나는 맛있는 커피를 내릴 줄 아는 인간이 됐다. 커피 중에서도 느리게 내리는 드립 커피를 더욱 좋아하는 인간이 됐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조금은 헤아릴 수 있는 인간이 됐다. 마을공동체도 그렇게 슬로하게.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오늘 하지 마라.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내일도 할 수 있다.” 쓰지 신이치의 이 바람직한 말에 좀 더 덧붙이고 싶다. “내일 안 되면 그만두는 걸로.”

 

이 책에서 내가 격하게 공감했던 말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어쩌면 아무도 울지 않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남자가 울보로 지낼 수 있는 사회’를 마음속으로 그려본다.”(p.80) 나는 제대로 울 줄 아는 남자가 되고 싶다. 당신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아울러, 정희진의 이 말, 격하게 동의한다. “이젠 무엇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안 함으로써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 무엇을 안 할 것인가? 무엇이 가장 올바른가보다 최소한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가 화두가 돼야 한다.(…) 무엇인가 꼭 해야 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이 계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살길이다. 여름 세끼, 하는 것도 먹는 것도 고역이다. 30도 날씨에 생계 노동은 말할 것도 없고 잠드는 것조차 힘에 부친다. 개인의 기력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구가 망가지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 것도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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