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마구마구 카페에 가고 싶어진다. 비가 올 때, 낙엽이 우수수 쏟아질 때, 햇볕이 넘쳐날 때, 구름이 멋진 날, 너무 추운 날……. 모든 날씨는 카페를 부른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거기에 있다.                 - 이명석, 《모든 요일의 카페》 중에서 -

 

그들은 이곳에서 모이곤 한다. 

한꺼번에 함께 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둘 따로따로 온다. 

물론 때로는 혼자, 커피를 즐기는 경우도 있다. 자연스러운 모임이다.

여긴 일종의 아지트인 셈이다. 무슨 현안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친목 모임도, 비밀 결사체도 아니다. 그냥, 그들은 '따로 또 같이'다.  

 

때론 그들은 격론을 펼치기도 한다. 

몇 주 전에는 아예 새벽을 넘길 기세여서, 커피하우스 클로징을 맡겼다. 옛다, 문 닫고 가세요. 

다음날 이야길 들어보니, 꼴딱 새벽을 샜단다. 동이 틀 때까지 다양한 토론과 격론을 펼쳤단다.

무슨 혁명을 꾀하는 혁명가들 같은 면모도 있다. 

 

가만 들어보면, 주제도 다양하다.

선거와 민주주의, 사랑의 종말, 학교(교육)의 불가능성, 공정무역과 경제체제, 음악과 나가수, 아이돌의 품평회, 여자와 남자의 차이, 그야말로 종횡무진, 종횡사해다. 

다양한 담론이 오간다는 것, 견해의 다름(차이)을 인정한다는 것.

이들이 느슨하게 계속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요인이 아닐까, 이 커피집 아저씨는 생각해 본다.  

 

오늘은 3명이 모였는데, 두 여성 이야기로 꽃이 핀다.

커피를 가져다주면서 잠시 껴들었었는데, 코코 샤넬과 전혜린.

말하자면, 20세기 여성해방에 기여한 사람들이다.

어제가 두 사람의 기일이었다. 전혜린은 1965년에, 샤넬은 1971년에. 각기 47주기, 41주기.

물론 차이는 있다.

전혜린은 31세에  스스로 세상에 절연을 선언했고,

87세로 생을 마감한 샤넬의 마지막 말은, "결국 사람은 죽는구나!".

 

 

 

 

 

우선 코코 샤넬.  샤넬, 스타일 혹은 혁명의 또 다른 이름

커피 하는 내 입장에서 비약하자면, 그녀는 테이크 아웃 커피점을 융숭시킨 시발점이다. 

무슨 말이냐고? 

생각해 봐라. 이른 아침, 머리를 찰랑이며 회사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는 여인이 있다.

검은 트위드 자켓을 걸치고, 무릎을 약간 넘기는 적당한 길이의 치마와 레깅스로 조합한 그녀,

숄더백을 어깨에 걸치고 있다.

그녀, 회사 부근에 위치한 공정무역 커피점에서 마다가스카르 천연바닐라빈라떼 한 잔을 시킨다.

잠시 향과 맛을 보더니,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회사로 들어선다. 천연바닐라빈과 커피의 조합이 향기롭다.

 

그 모습, 코코 샤넬 덕분이다.

그녀는 여성의 몸과 마음을 죄던 코르셋으로부터 여성들을 탈주시켰다.

장례식에만 입던 검은 옷을 일상화시키고, 거리를 빗자루질하던 드레스를 무릎 위로 업했다.

핸드백에 끈을 달아서 두 손을 자유롭게! 두 손으로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 수 있게 한 것이다.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저지드레스, 카디건 슈트, 샤넬 슈트, 나팔바지, 단발머리, 트렌치코트, 터틀넥스웨터, 리틀블랙드레스, 샤넬 No.5 등.

하나로 정리하면, 이른바 샤넬 스타일의 시작이요, 독창적인 시그니쳐 룩. 불필요하고 허세 가득한 쓸모없는 복장은 꺼져라!

20세기 복식 혁명을 일군 장본인, 샤넬.

 

에브리바디, 샤넬 스타일!

여성을 옷뿐만 아니라, 시대의 속박으로부터도 해방시킨 그 스타일.

당신에게 샤넬 제품이 없을지 몰라도, 샤넬 스타일은 있다.

 

 

"아저씨, 샤넬을 어떻게 그리 알아요?" 

 

"내 안에 샤넬이 있거든. 하하. ^^;; 샤넬이 세상을 휩쓸 땐, 이런 말도 있었어. "샤넬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여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여자가 아니다." 몰랐지? 니들에게도 샤넬이 있어! 너 안에 샤넬 있다!"

 

"이 아저씨, 여하튼 예쁜 여자라면 다 알아요. 밝힘증이라니까. 호호."

 

"야, 니들이 날 제대로 아는구나." 

 

"샤넬도 살아있을 때, 너희들처럼 커피하우스를 들락거리고 그랬어. 다른 사람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세계를 생각하느라."

 

"아, 그래요?" 

 

"그럼. 샤넬의 유명세만큼 사교계 거물이었거든. 다들 그녀를 만나려고 안달이기도 했지. 장 콕토, 피카소, 달리, 스트라빈스키, 헤밍웨이, 콜레트, 그레타 가르보, 마를레네 디트리히... 숱하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교류를 나눴거든. 돈이 많으니까, 그들을 후원하기도 했고."

 

"우와~ 우리한테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호호."

 

"이 아저씨가 있잖아. 하하. 샤넬은 장 콕토가 알코올 중독이 됐을 때 치료비를 부담해주기도 했고,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작곡할 수 있도록 후원도 했어. 대신,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겐 도움을 안 주고, 자신이 도와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들한테는 드러나지 않게 도왔대. 나는 완전히 다 드러나게 도와줄게. 하하." 

 

"에이, 밤9시가 넘으면 1000원에 커피 팔면서, 아저씨가 뭘 도와요?ㅋㅋ"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였다. 

 

샤넬이 그들과 교감을 나누고 토론했던 커피하우스, 혹은 카페, 또는 살롱.

1875년에 문을 연 이 곳은, 원래 중국산 비단을 파는 가게였다.

그 비단 가게의 이름이 레 되 마고였는데, 카페로 바뀌면서도 그것을 유지했다.

19세기에는 베를렌느, 랭보, 말라르메 등 상징주의 시인들이 단골이었고,

20세기 들어와서도 바타이유, 브로통, 피카소, 생떽쥐베리, 자코메티 등이 이곳을 찾았다.

사르트르, 보부아르 등도 단골이었는데, 1933년에는 레 되 마고 문학상이 제정될 정도로 이곳은 하나의 문화적 유산이 됐다.

 

재밌는 건, 커피하우스도 이념에 따라 구분됐다.

20세기 초반 유럽에 파시즘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지식인들은 레 되 마고에 모여 파시즘을 성토하거나 대책을 논의했다. 

이른바 진보주의자들의 아지트였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도 이곳의 단골이었다.

두 사람이 날마다 독서와 토론으로 열을 올리자, 그들을 보기 위한 구경꾼도 들끓었다. 

그런데, 여기에 반발한 진보진영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레 되 마고 대신 옆의 드 플로르를 찾았다. 

당시 보수파들이 주로 드나들던 드 플로르에, 진보진영 지식인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점령했다. 

더 재밌는 건, 사르트르도 레 되 마고의 난방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드 플로르로 둥지를 옮긴 것.

자신들의 진영을 뺏긴 보수주의자들은 레 되 마고로 건너갔다.

 

두 카페, 정체성(?)이 바뀌었다.

레 되 마고는 보수주의자들의 아지트가 됐고, 드 플로르는 진보주의자들의 아지트가 됐다.

물론 다소 기계적인 구분이지만, 공간을 만드는 것이 결국 사람이다보면,

사람들이 커피하우스라는 공간을 그렇게 규정하는 일도 생긴다.

오늘날도 그런 전통(?)이 좀 남아있단다.

진보 지식인들은 레 되 마고는 피하고, 반대 진영은 카페 드 플로르를 꺼린다는. 사소하고도 강박적인 전통.

 

 

 

"그러니까, 니들도 여길 만들 수가 있어. 너희들 보고 사람들이 몰려들 수도 있고."

 

"와, 그럼 여긴 우리 같은 얼치기 진보들의 놀이터가 되겠네요. ㅋ 아저씨, 괜찮겠어요?"

 

"나는 대세를 따르는 사람이라서 상관없어. 하하."

 

"근데, 샤넬은 어떤 진영이었을까요? 애매해. 애정남이 있어도 정하질 못할 거 같애."

 

"장 콕토가 한 말이 그에 대한 답이 될 것 같은데... 이랬거든. "매력적이면서 호감을 주고, 인간적인가 하면 잔인하며, 때론 너무 지나쳐 보이기도 하는 여자. 분노, 변덕스러움, 친절함, 유머, 반짝이는 생각, 검소함, 그리고 관대함이 샤넬이라는 다시 없을 독특한 여자의 모든 것이다." 캬, 멋지지 않아? 다시 없을 독특한 여자의 모든 것! 니들도 좀 그래봐라. 그럼 내가 커피 후원은 '학실히' 할게."

 

"칫, 뭐야. 그럼 아저씨, 전혜린 알아요?"

 

"응, 그럼 알지, 당연히!"

"우와~ 아저씨 같은 사람도 알아요? 호호."

 

"야야, 말도 마라. 한참 열풍이 지났을 땐데, 나 때만 해도 전혜린, 하면 자지러지는 여자애들 많았어.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지. 요절 때문에 신화가 된 거고.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캬. 감수성 돋는 소녀들이 어찌 뻑 가지 않겠니."

 

"장 콕토가 했던 그 말을 한국에 적용하면, 전혜린이 그럴 것 같아요."

 

 

전혜린은 문학소녀들의 만신전 같은 존재였다.

나는 그 여자를 스무살 초반에야 읽었다. 멋도 모르고 읽었고, 강렬했다. 어찌 이런 글을.

열정과 광기 사이. "1세기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 평가에 비해 그녀가 세상에 남겨 놓은 유산은 터무니 없이 부족해 뵌다.

인식의 갈망으로 불타올랐지만, 그녀를 감당하기에 세상은 지나치게 견고했다.

그녀의 재능을 받아줄만큼 세상은 대범하지도, 과감하지도 못했다. 아니, 쫌생이였지.

 

그녀는 스스로 휘발했다. 

이 빌어먹을 가부장적이고 경직된 사회의 견고함을 깨부수고자 했으나, 그녀 이전의 혁명적 여성들도 그러했듯. 제길.

그녀는 지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느 조용한 황혼에 길가의 주막에 쓰러져 있는 집시가 있거든 나라고 알아줘!"

집시에겐 머물 곳이 없다. 혁명을 용서하지 않는 이땅은 그녀를 애써 무시한 것이 아녔을까.

 

 

"오늘 우리 주제가 그거였어요. 어떻게 세상과 싸울까. 여성은 어떻게 이 견고한 세상과 싸워야 하나."

 

"와우, 이 아저씨도 도울게. 뭘 해줄까? 찐한 커피 한 잔, 더 줄까? 하하."

 

"좋아요. 그게 어디야. 커피로 혁명하는 거지, 뭐. 우리가 잘 되면 여기도 뜬다니까요. 아저씨, 우릴 믿어봐요."

 

 

 

전혜린의 단골 커피하우스, 학림.

그녀가 죽기 하루 전, 1월9일.

하늘은 맑았지만, 날씨는 영하 10도 밑으로 떨어질만큼 추운 날이었다.

그녀는 당시 서울대 문리대 앞의 동숭동 학림다방 오른편 맨 구석 창가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밤색 코트를 입고 검은 혈액을 마시면서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혼자 있었다.

지금도 학림은 그 자리에 있다. 1월10일, 전혜린이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한파가 몰아치는 오늘.

전혜린과 샤넬을 떠올리고 이야기하는 청년들에게, 나는 은근슬쩍 혁명의 꿈을 싣는다.

부디, 너희들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다오. 못난 어른들이 땡깡으로 허술하게 만든 세상에 함몰되지 말고.

'남들만큼, 남들 보기에'를 들먹이며, 똑같아지기를 원하는 어른들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길.

몰개성 말고 스타일. 샤넬 스타일. 전혜린 스타일.

 

 

 

내 커피는 그런 너희들을 위한 것이거든. 바로 이 순간의 샤넬을 위해, 전혜린을 위해.

내가 커피하우스를 하는 이유. 커피아저씨로 남아있고픈 이유.

 

1월10일의 메뉴는, 그래서 '샤넬 No.전혜린'.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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