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이경훈 지음 / 푸른숲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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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였다. 도시. 내게 급작스레 던져진 화두. 태어나서 지금까지, 도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 없었다. 부산과 서울. 군대조차도 행정구역상 서울이었으니, 나는 저 두 곳에서 줄곧 서식하고 있다. 스물 셋, 잠시 미국에서 6개월을 꿈처럼 보냈던 외에는. 

 

부산과 서울. 이 도시(들), 딱히 좋아한 것 같진 않지만, 익숙했다. 물론 언젠가 이 도시를 떠날 것이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고는 있다. 평생 살고 싶은 곳은 아니거든. 서울은 너무 빡빡하고 대체로 권위적이다. 드물게 반짝반짝 빛나는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부암동. 그곳은 서울(의 일부)이라기보다 그냥 부암동이다. 나는 그저 이 도시가 그닥 매력적이 아니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내 사는 곳이 도시가 아니라고 말한 적, 없었다. 당연했다. 나는 '도시'에 대한 사유를 진지하게 해보지 않았다. 고작해야 시골의 대척점으로서 도시를 떠올린 정도?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이 말, 그래서 도발이었다. 아니, 왜? 강하게 궁금증을 유발한다. 제목, 섹시했다. 들추고 싶고, 벗겨내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봉인을 풀었다.

 

책을 읽는 내내, 덮고 나서,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나는 도시에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왜? 서울은 걷는 것을 박탈하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요즘 걷기 열풍이라 서울에서 걸을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걷다가 나자빠지는 소리냐고? 그러게. 그럼에도 서울은 걷기에 우호적이지 않다. 아니, 걷는 자들을 종종 능멸한다. 자, 이야기를 풀어보자.  

 

'걷고 싶은 거리'를 처음 접했던 건 이십대 초반. 파리가 그렇다고 했다. 내 이십대 민무늬 정신에 주름을 새겨준 고종석 선생의 파리 예찬 이유 중 하나였다. 궁금했다. 걷고 싶다는 생각을 부르는 거리라니. 부산에서도, 서울에서도, 그런 느낌, 가져보질 못했다. 되레 그곳들은 걷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곳에 가까웠다. 차가 장악한 공간이니까. 사람은 차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 


고종석 선생은 『도시의 기억』에서 다시 파리를 꺼냈다. "파리는 걷기를 유혹하는 도시였다. 오밀조밀한 볼거리들만이 아니라, 그 도시의 공기 전체가 걷기를 유혹했다." 그는 파리를 허송하면서 도시 한쪽 끝에서 맞은 편 끝까지 걷는 날도 있었다고 했다. 해찰하며 느릿느릿 걸었다고 했다. 오래 전, 짧게 들른 파리를 다시 가고 싶었다. 파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나도 그런 걷기를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파리를 걸으면서 낭비하고 싶기 때문이다.


서울 곳곳에 '걷고 싶은 길'이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다. 오세훈이 '디자인'했던 서울은 그런 풍경을 낳았다. '걷고 싶은 길'을 통합해서 관리하겠다고 했었다. 헌데 걷고 싶은 길, 참 애매한 말이었다. 시민들이 걷고 싶은 것인지, 시민들에게 걷고 싶어지도록 만들겠다는 것인지. 자동차에 점령당해 걷기 힘들게 만들어 놓을 땐 언제고. 변덕쟁이들.

 

더 큰 문제. 걷기 혹은 보행환경에 대한 진단과 해결 차원이 아니었다. 오세훈은 거리 특성화나 디자인, 보도 포장 교체 등 보여주기 식 사업에 치중했다. 걷기 혹은 도시에 대한 진중한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오세훈의 '디자인 서울'은 그랬다. 도대체, 서울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차들이 자꾸만 인도로 올라오는 것이 불편했는데, 책은 역시나 그것을 꼬집는다. 그것이 도시를 망가트리는 것임을. 인도에 주차를 하는 야만적인 행위부터 규제하는 것이 디자인 거리 조성의 첫걸음이란다. 인도가 주차장으로 변모하는 현실. 그것, 걷기를 소외시키고, 도시 디자인에 삑살이를 놓는다.

 

도시를 판별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있다. <섹스 앤 더 시티>. 네 명의 여성들이 펼치는 뉴욕라이프와 스타일을 보여주는 드라마. 그 가운데,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가 구두에 유독 꽂힌 이유는 뭘까? 마놀로 블라닉의 명품적 권위 때문에? 패션의 종결은 구두라서? 천만에. 구두는 곧 걷기다. 멋진 구두로 거리를 폼 나게 걷고 또 걷는 일. 도시의 본질이자, 도시성에 대한 애정임을 책은 말한다. 즉, 걷기야말로 도시 생활의 필수이자 상징이며 기쁨이란다. 그래서 묻는다. 당신의 서울은, 걸어 다닐 만합니까?

 

그러니 걷고 싶은 거리는, '둘레길'처럼 산책이나 운동을 위한 길을 일컫는 게 아니다. 도시 안에서 걷도록 만드는 일이다. 다양한 상점이 늘어서 있는 다양한 구경거리가 있는. 차들이 인도 곳곳에 포진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시는 즉, 걷는 것에서 비롯돼야 한다. 걷는 것에서 도시를 사유해야 한다. 혹은 걸으면서.  

 

“걷기는 도시라는 공적 공간을 즐기고 공동체에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 벤야민은 “도시는 이야기책이며 걷기라는 언어로서만 해독이 가능하다”고 했다. 《걷기의 역사》의 저자인 솔닛은 “도시를 점유하는 방식은 걷기”라고 단언한다.”(p.244)


저자인 이경훈 교수에 의하면, 도시성의 최전선은 '걷기'다. 헌데, 걷고 싶은 것에 대한 오해의 지점을 잠시 지적하자. 길과 거리에 대한 구분의 모호함. 길과 거리는 다르다. 이는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않는 우리의 언어적 몰이해와도 연관된다. 


“길은 목적지향적 통로이나, 거리는 길의 일종이나 걷는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한 도시의 영역이다. 영어로 보면, 길은 로드(Road)고, 거리는 스트리트(Street)다. 그런데 우리는 길과 거리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해서 쓴다. 뭘 까다롭게 그러냐고 하는데, 길과 거리를 섞어 쓰는 건, 단순한 용어상의 혼용일 수 있지만, 도시에 대한 몰이해를 나타내는 방증이다.”


즉, 길은 이동과 도착이라는 목적 지향적이다. 반면 거리는 경험이라는 과정 지향적 성격을 띤다. 도시를 잘 모르니까, 서울시는 걷고 싶은 길과 걷고 싶은 거리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도시적 걷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어딜까? 가로수길이다. 길과 거리를 명확히 구분하자면, '가로수거리'가 돼야 할 곳. 압구정동 로데오길과 폭이 같음에도, 두 거리는 차이가 크다. 이 교수는 가로수길에 없는 두 가지를 든다. 


하나. 차가 인도에 주차하지 않는다. 인도 폭이 넓지 않아 차가 올라오기 애매하고 가로수가 촘촘하게 있어서 인도에 주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둘. 공원이 없고 상점이 연속돼 있다. 그것이 가로구길을 대표적인 도시 거리의 모습으로 보게 한다. 거리는 자연보다 상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가로수길의 처음과 끝까지 700m를 걷는 동안 힘들지 않다. 쇼윈도의 구두와 옷을 보고 카페 손님을 보는 동안 가로수길은 끝난다.

 

맞다. 옳소. 차가 왜 인도를 점유하는가. 인도에 차가 있는 건 특히나 불법임에도. 우리는 별다른 불만없이 차를 모신다. 왜? 다들 차를 가진 사람들이라서? 차를 인도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권리이자, 도시의 권리다. 자연스럽게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길. 그것이 도시의 모습이다. 그래서 가로수길에서 만난 유모차가 나도 참으로 반가웠다.

 

 

“‘서울은 자동차에 의해 살해된 도시’라는 프랑스 사진작가 얀 베르트랑의 말처럼 서울에서 걷기란 고행에 가깝다. 인도가 없는 좁은 이면도로에서는 차에게 길을 내주고 눈치를 보며 걸어야 한다. 인도가 비교적 넓은 대로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자동차가 인도에 올라와 주차하려고 낑낑거리고 있어서 차를 피해 조심히 걸어야 한다.”(p.24)


서울에 살고 있다면, 당장 당신 주변을 둘러보라. 건물 앞에 차를 주차하도록 만들어서 인도를 잡아먹는 행위가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는지. 서울은 그런 면에서 차와 사람과의 관계가 여전히 반도시적이다. 건물-자동차-사람-자동차의 배열. 서울에서 걷기 위해서는 자동차의 눈치를 봐야 한다. 끔찍한 일이다. 더 많은 가로수길을 만들자는 이 교수의 주장은 그래서 반갑다. 가로수길과 같은 비싼 거리를 조성하자는 것이 아니라, 차에 종속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걷고 싶은 그런 거리.  

 

“자동차를 피해 조심스럽고 불편하게 걸을 필요가 없는 안전한 거리는 상점의 쇼윈도와 어우러져 지루하지 않은 ‘진짜 도시의 거리’를 만든다.… 나는 서울의 모든 거리가 가로수길처럼 바뀌길 바란다. 가로수길과 같은 ‘우리 동네’에서 이웃들과 인사하며 지내는 삶을 꿈꾼다. 진정으로 걷고 싶은 거리, 진정으로 살고 싶은 도시를 말이다.”(p.43)

 

아울러, 공원 등 녹화 공간에 대한 과도한 집착. 서울의 녹지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자연을 별로 존중하거나 경배하지도 않으면서 자연, 자연 노래를 부르면서 공원 만들기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 꼴불견이다. 

 

책은 도시에서 상업시설은 필수임을 강조한다. 그게 곧 도시성이다. 도읍 都에 시장 市, 즉, 행정과 상업이 합쳐진 것이 도시다. 고로, 상업도시라는 말은 없는 법. 도시라는 말에 상업이 내장돼 있으니까. 도시는 곧 '상업성'의 다른 말이다. 헌데, 우리는 상업성이라는 말에 묘한 거부감을 가지는데, 이 교수는 그것을 '가식'이라고 규정짓는다.

 

나무만 심는다고 '친환경'이 아니다. 도시에는 도시환경에 맞는 건축과 조경이 있다. 친환경도 말그대로 환경에 어울려야 하는 것이다. 친자연과 혼동해선 안 된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우리나라에선 친환경이라는 말에 대한 오해가 있음을. 특히나 상업성이 있어야 할 곳은 나무나 공원으로 채우고, 그렇지 않아야 할 곳은 광고로 도배질 한다. 시민들의 미감을 해치는 행위다. 개념 없고 품위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쇼핑몰에 대한 비판도 지금 서울이라는 도시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몇 달 전, 신도림에 '디큐브시티'라는 거대 쇼핑몰이 들어섰다. 그런 메가 쇼핑몰이 들어설 때마다 자랑이랍시고 떠벌린다. 한국 최대, 아시아 최대, 어쩌고 저쩌고. 사람들이 그 규모에 압도당하도록, 저들은 자랑하기 바쁘다.

 

그러나 그것, 가짜 도시처럼 만든 것이다. 쇼핑몰은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무엇이다. 거리를 흉내 내고, 도시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곧 도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전원에나 어울릴 상업시설이다. 그러니 도시는 점점 힘을 잃는다. 도시 안에서 쇼핑몰을 사유하지 못한 결과다. 더 넓고 더 크게 만들어 놓기만 하면 장땡인줄 아는 천박함이다.

 

과거, 나는 도시를 외따로 떨어진 개별들의 공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책은 도시성의 중요한 포인트 중의 하나로 공유공간을 꼽는다. 뉴욕의 예를 든다. 뉴욕의 아파트는 매우 좁아서 밥은 식당, 빨래는 빨래방, 야구경기는 바 등에서 해결한다. '홈(Home)'이 도시 곳곳에 퍼져 있는 셈이다. 그러니 바깥의 지저분함에 대해 서로 지적하고, 규율을 한다. 결과적으로 도시가 아름다워진다.   


“이렇게 최소화된 개인 공간은 역설적으로 도시 전체를 ‘나’와 ‘우리’의 공간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아파트보다는 한 도시에 산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도시 전체를 자신의 공간으로 확장하며, 자연스레 공공의 공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나타난다.”(p.125)


도시성의 의외의 발견이다. 헌데, 서울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공유공간의 기회를 숱한 '방'에 뺏긴다. 가령, 노래방에 가는 건, 아는 사람과 함께다. 뉴욕에서 브런치를 먹는다는 건, 이웃과 사귈 수 있는 계기다. 그러나 지금 서울에서 브런치를 먹는다는 건, 과시적이거나 그것이 뉴욕 라이프인양 경험하는 것에 불과하다. 상업시설은 접촉의 기회를 줘야 하나, 우리는 되레 그것을 과시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장담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신의 서울이, 당신의 도시가 달라질 것이다. 책 제목에 완전 공감할 것이다. 서울로만 한정할 필욘 없다. 당신의 공간, 자체다. 당신의 시각과 관점을 달라지게 할 것이다. 이 책은 서울을 비판하는 것보다 서울에 대해 애정한다. 도시를 애정한다. 내가 사는 공간을 사유한다는 것은 곧 애정을 보태는 일이다. 

 

서울이 도시겠거니 살았던 나나 당신이나, 도시와 서울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그만큼 책이 주는 충격이 만만찮다. 낯설게 보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책의 장점은 분명하다. 세계는 넓어지고 감각이 열린다. 눈은 번쩍, 귀는 쫑긋, 말초신경은 아~ 

 

올해, 다양한 책을 읽었다. 사유를 가능케 한 좋은 책들도 많았고, 쓰레기 같은 책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서 올해의 책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를 손에 든다. 도시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마침 서울시장 선거도 있었는데, 나로선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이 도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떤 시장후보가 내 서식지를 도시로서 손색없게 만들 것인가에 초점을 둘 수도 있었다.

 

언제까지 내가 서울에 살게 될지는 모를 일이나, 나는 내 사는 동안 서울이 도시라는 이름을 획득하게 됐으면 좋겠다. 뉴타운으로 범벅된 토건의 공간이 아닌 걷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그런 도시를 꿈꾸는 일, 나쁘지 않다.  

 

건축가 루이스 칸은 말했다. "도시는 소년이 일생 동안 거닐면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교시를 찾는 곳이다." 거닌다고 했다. 교시를 찾는다고 했다. 도시는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 서울이, 혹은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이 각자의 도시가 된 것은 우연이지만, 우리는 그 우연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공간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교시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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