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렌디피티 - Serendipit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어느 날 우연히 그 사람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지.
그토록 애가 타게 찾아 헤맨 나의 이상형...

혼자가 힘들어 곁에 있는 여자 친구가 이제는 사랑이 되 버렸잖아. 운명같은 여잘 만났어.
이제 나를 떠나 달라고, 그녀에게 말해 버리면 보나마나 망가질 텐데.
그렇다고 그 애 때문에 그녈 다시 볼 수 없게 돼버리면 나도 역시 망가질 것 뻔한데...

- 쿨, <운명> 중에서 -


웬만해선 운명의 장난을 말릴 수 없다 


그렇다. 운명이란 '넘', 장난을 무쟈게 좋아한다. 웬만해선 그 넘의 장난,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대개의 사람살이, 그 장난에 울고 웃는다. 운명과 맞장뜨다가 ‘울고 넘는 박달재’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렇다면 운명이 치는 장난은 다 받아줘야 하나? 운명을 거스른 자에겐 천벌이? 벼락이? 에이 장난도 정도가 있지! 운명이 뭐길래?

그런데, 태생적으로 운명이라는 말, '닥치고 복무'를 내포한다. 즉, '따라야 할 무엇'이다. 때론 그 복무가 좋을 수도 있으나, 개척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솔깃한 측면도 있다. 운명이랍시고, 질질질~ 끌려다니기만 하는 건 억울하다.

뭐하다 안 되면 운명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사실 운명이란 넘, 실체는 불분명하다. 모호한 대상이다. 이 넘도 뜬금없이 덤태기쓰는 건 억울할 터. “지가 잘못해 놓고선 왜 나보고만 그래”하며 눈을 흘길 지도 모른다. 운명은 어쨌든 장난꾸러기. 운명을 개척하라는 말은 장난에 넘어가지 말란 얘기와도 일맥상통할지도 모른다. 

우연이 겹겹이 쌓은 운명

좋다. 질문하나 하자. 당신,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가? 당신 사랑은 운명적인가, 아님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가? 대체 운명이 무엇이기에?


운명은 필연이란 말과 통한다. 필연은 또 우연과 한껏차이의 한통속이다. 운명은 결국 우연의 중첩에 따른 결과물일 수도 있지. 그래서 “난 운명적인 사랑을 할 거야~”라는 말, 우연을 쌓아서 운명으로 치환하겠단 기대의 표현이다. 한편으론 운명의 장난을 받아들이겠단 의지다. 아, 거룩할 손, 장난에 아랑곳 않는 저 대범함. 


<세렌디피티>, 그 ‘운명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운명으로 치장된 사랑을 원하는 이들에게, 운명의 장난을 받아주되 마냥 두 손 놓고 기다려선 안 된다고 속삭인다. 운명이란 넘, 앞서 얘기했듯 어떤 장난질로 우릴 당황하게 만들지 모르니까. 늘 운명의 어떤 장난에도 열려 있을 것!


7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한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 친 조나단(존 쿠삭)과 사라(케이트 베킨세일). 당시 그들 귓가에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이 울린 것일까. 운명이 문을 두들긴다. 그들, 운명을 놓고 배팅을 하고, 숨바꼭질을 한다. 그 과정에서 우연이 겹겹이 쌓인다. 물론 예상 가능하듯, 그 우연(들)은 운명을 위한 깔맞춤이다. 


이런 우연을 보자. 그 사람이 좋아했던 옛 영화 포스터가 갑자기 내 눈앞에 나붙는다. 동명이인이 자꾸 등장한다. 그 사람 이름을 담은 노래도 울려 퍼진다. 뭔가 작위적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우연을 운명으로 치환하려면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영화는 우연을 중첩한다.

하긴 대개의 우리는 어떤 만남앞에서 그런 착각(!)을 부른다. 그저 우연일 뿐인데, 운명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주술을 건다. 운명에 굶주렸다는 얘기다. 혹은 생이 지루하거나 권태롭거나. 태어난 것도 운명이니, 그 정도는 애교겠지.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허나, 조나단과 사라에겐 각기 다른 사람이 있다. 운명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다. 그들의 존재감이라는 게 그렇다. 조나단과 사라를 엮어주기 위한 일종의 희생양. 이 넓은 세상 위에, 그 길고 긴 시간 속에,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그대’를 만나는 일이 어찌 쉽고 대수로울 수 있으랴. 어떤 만남이든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비율 속에 이뤄지는 법이다. 거기에 우연섞인 특별함까지 가미된다면, 그건 로또 당첨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운명론자’ 사라와 ‘개척론자’ 조나단은 어떻게 씨줄과 날줄을 엮어 운명을 만들 것인가. ‘우연히 발견하는 능력’ ‘운수좋은 뜻밖의 발견’이란 뜻의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운명에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도구와 수단을 나열한다.


<The Three Princes of Serendip>이란 옛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아무리 찾아도 없는 보물을 우연히 발견한데서 유래한 Serendipity. 영화에선 ‘운명의 사랑을 발견하는 능력’이란 뜻으로 포장돼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운명의 퍼즐을 끼워 맞추는데 집중한다. 배팅 치고는 지나치게 센 것 같은데, 5달러 지폐와 [콜레라시대의 사랑]이 동원된다. 전화번호가 그곳에 있다. 모험심, 참 충만하다. 기민 기고, 아니면 말고, 이거나. 나는 운명과 저런 배팅 못한다.

어쨌든 ‘우연’이 ‘운명’이었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치고는 가혹하지만 그건 또한 ‘영화적 운명’이다. ‘우린 운명, 곧 필연’임을 확인하기 위한. 그래서 두 사람은 망가지지 않기 위해 뺑이를 친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불일치가 ‘이끌림’을 희석시킬 수 없듯, 운명적인 사랑을 찾겠다는데 그까이꺼 대수로울 거 없다는 자세다.


운명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쥐~


몇 년 전, 뉴욕을 찾았었다. '보고 싶다, 친구야'가 명분이었지만, 내 욕심 중 하나는 센트럴 파크(의 아이스링크장)에 있었다. 왜 그곳이었냐고? 조나단과 사라가 그곳에서 다시 만난다. 손을 잡는다. 스케이트를 탄다. 사랑이다. 운명이다. 그것을 밟고 싶었고, 결국 밟았다. 내 영어 이름은 조나단(조너~선)이다. 사라. 하긴 그 이름. 한때 사귀었던 사람의 영어 이름이었다. 그녀에게 이 영화를 얘기해줬을 때, 그녀는 우리를 '운명'이라고 했었다. 하하.;;
 


<세렌디피티>. 가슴의 ‘끌림’을 ‘운명’으로 치환하기 위한 적재적소의 요소를 적절하게(?) 배치한다. ‘운명론’의 필요충분조건은 만족된다. 여느 만남이 날줄과 씨줄의 오묘한 엮임이 아니겠느냐마는, 특별한 이끌림은 분명 있다. 이때, 감정의 동요는 좀 더 격렬하게 수반된다. 세월이 꼭 망각과 결부되지는 않는 듯하다. <세렌디피티>는 그것을 말한다. 살다보면 그렇다. 잊고 싶은 기억은 오래 남고, 간직하고 싶은 순간은 덧없이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각자 결혼식을 앞둔 조나단과 사라, ‘한 순간’을 잊지 못해 좌충우돌하는 과정은 우연의 연속이지만, 사실 그 정도는 ‘애교’다. 그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7년이 지난 영수증을 찾아 헤매는 조나단이나 친구를 억지 대동해 지나간 흔적을 더듬는 사라의 애처로움. 작위적인 우연이지만, 그 끈을 연결해주고픈 애틋함을 유발한다. (허나, 케이트 베킨세일 정도의 여자라면, 어떻게든 없는 운명도 조작하고 싶다!)


우연과 운명은 다른 빛깔이 아니다. 우연이라 생각했던 것들, 어쩌면 잘 짜인 각본의 무대에서 시간의 흐름이 상정한 궤도를 따라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 각본을 미리 엿볼 생각은 않는 게 좋겠다. 씨줄과 날줄을 하나둘 끼워 맞추고 “운명아! 덤벼라 내가 간다”며 큰 소리 한 번 내지르는 것도 사람살이의 재미니까. 옥동자는 외친다. “운명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쥐~~~”

그러니까, 지금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며 연말연시다. <세렌디피티>의 시즌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영화는 의미가 없다. 그 시즌이라야 이 영화는 산다.
이 작위와 상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오직 크리스마스 시즌이기 때문이리라.

참, 어쩌다 보니 남자3호가 됐다. 세렌디피티다.
무슨 말이냐고? 글쎄... 세렌디피티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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