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음식문화박물지
황교익 지음 / 따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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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라고 하면 으레 치를 떠는 사람들, 있다. 특히 먹을 것 놓고, 정치가 어쩌니 저쩌니 하면 화제를 돌리자거나 짜증 내는 사람들, 역시 있다. 정치를 저 여의도나 파란 집에서 벌어지는 그들만의 리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예, 정치라면 무관심하다고, 어떤 것도 모른다는 양 자랑스레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닥치고 정치다. 정치는 저들의 리그에만 있는 게 아니다. 당장 무엇을 먹을 것인지 택하는 것부터 정치는 이미 이뤄지고 있다.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그러니 정치에 관심 없다며 치부터 떨고 보는 일은, 거칠게 말해, "난 일자무식쟁이"라는 커밍아웃이다.

 

내 작은 커피하우스는 공정무역커피를 다루고, 유기농산품과 비정제당을 쓰며, 가급적 화학첨가물과 트랜스지방이 들어가지 않은 제품을 쓰고자 노력한다. 세상을 위하고 손님들 건강을 챙기기 위함이다, 라고 한다면 이유의 10%밖에 담지 못한다. 우리가 그리 하는 건, 정치적 노력이다. 비록 완벽하진 않으나, 우리는 그렇게 애를 쓰고 있으며 계속 그런 기조를 유지하고자 먹거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

 

정치적 노력이라 함은, (거대)자본에 의해 기획된 먹거리를 멀리하고 노동의 가치와 지속가능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와 내 동료들은 그것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기존 자유무역체제의 폐해와 구멍을 고민하며, 같은 노동자라는 관점에서 커피 생산(노동)자들을 생각한다. 더불어 자연이 만든 커피의 유기적 흐름을 떠올린다. 커피 한 잔을 위해 지불하는 돈이 농민과 노동자에게 잘 전달되는지, 지속가능성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따지고자 한다.

 

그것은 간단한 것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먹는 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가. 누구에 의해 생산되고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가. 그런 사유가 정치적이야? 하고 묻는다면 나는 '올커니 정치'라고 대답하겠다. 정치는 그렇게 모든 일상과 조응한다. 거친 비유지만, 노스페이스 착용 여부는 물론, 어떤 노스페이스를 입느냐에 따라 '계급'을 나누고 있다는 초딩들의 형태를 보라. 아이들에게도, 입는 것에서도 정치는 작동하고 있다. 

 

하나 더 예를 들까?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는 먹거리. 뻔하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좀 짜증나지 않던가? 황교익 선생의 이야기를 빌자.

 

"한국 사회는 거대 자본이 시장을 완전히 잠식하여 영화관에서 먹는 음식 하나에까지 이것 먹어라 저것 먹지 마라 하고 간섭을 한다. 영화관이란 겉은 세련된 문화의 공간이지만 그 안은 영악한 속물들이 소비자의 주머리를 강탈하기 위해 꾸며 놓은 공간이다. 팝콘이 표상하는 세련된 미국적 삶이란 대체로 이런 것이다."(p.261)

 

황 선생이 《한국음식문화박물지》에서 음식문화를 논하면서 '정치'를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결국 방점을 찍기 위함이리라. 정용진이 소비자를 위한다는 명분을 걸고 내놓은 '이마트 피자'를 놓고, 동네 피잣집 죽이네살리네 할 필요도 없다. 통큰 치킨도, 이마트 커피도 마찬가지다. 소비자를 위한다는 명분은 명백하게 거짓이다. 쥐어짜내기가 가능한 자본은 가격 뒤로 다른 악행을 모조리 숨긴다. 황 선생의 말대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오로지 '손해'밖에 없다.

 

'싼값'에 홀라당 넘어가고 마는 '실리적' 소비자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것이 정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통은 단순히 경제의 영역이라고 볼 뿐이다. 무식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그래, 솔직하게 멍청해서다. 싸니 좋은 거다. 다른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싼값'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반값혁신'이라고? 무슨 호랑이 잡초 뜯어먹는 소린가.

 

이걸 한 번 씹어보자.

 

"먹을거리를 선택하는 문제가 비정치적인 일인 듯이 여겨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의 먹을거리 유통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다. 2010년대 한국의 상황에서 보자면, 재벌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강자로 군림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그들에게 이득을 주는 먹을거리에 탈정치적인 포장을 한다. “서민들이 먹기에 합리적으로 싸다”는 것이다. 싼값으로 만들기 위해 빠져나간 돈이 결국은 농민과 노동자의 피땀임을 그들은 숨기고 있는 것이다."(pp.275~276)

 

'통큰'이니 '착한'이니, 거짓부렁으로 소비자를 현혹하는 제품의 먹거리를 선택하는 건, 결국 '대량생산 대량유통의 재벌 중심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이것은 정치적 행위다. 그러니 더 이상 '정치'라고 외면할 것이 아니다. 내 일상과 생활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치를 몰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음식문화박물지》는 먹거리의 정치를 어렵지 않게 핵심만 콕콕 찝어서 말한다. 사실 세상은 좀 웃기다. 어딜가도 맛집이고, 맛집 블로거랍시고, 뻐긴다. 슈거와 화학조미료로 사람들 입맛을 길들여놓고, 그렇게 길들여진 입맛으로 사진 잘 찍어서 올리면 그만인줄 안다. 먹는 것이 왜 중요하며, 어디서 어떻게 온 먹거리인지는 관심이 없다. 한심하다. 조미료로 맛의 평등을 이뤘으니 민주화라도 이룬 줄 아나보다.

 

《한국음식문화박물지》는 장담건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것이다. 황 선생은 비록 그것을 '일리'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 일리는 오랜 취재와 연구, 분석에 따른 금과옥조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손쉽게 먹는 삼겹살, 소갈비, 치킨 등이 사회적으로 어떤 함의를 품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고관대작들의 먹거리가 아닌 인민들이 일상에서 먹는 '한국음식'에서 지금-여기의 삶을 쓰고 다룬다. 그래서 '음식'이 아닌 '음식문화'다. 그속에 한국인의 삶이 있다. 한국음식을 한국인의 삶 속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선생의 노력이 물씬 묻어나온다. 음식문화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전통음식은 역시 그들만의 것이다.

 

우리가 먹는 것을 위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한국의 자연이다. 중국산이 판을 친다지만, '한국음식은 전적으로 한국의 자연에 기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황 선생은 권유한다. 한국음식은 한국 땅에 사는 사람들이 일상으로 먹는 음식이다. 그 일상에서 우리는 좀 더 우리가 먹는 것에 예민하고 감각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자연에서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어야 하는 존재다.

 

그러니, 음식의 정치를 외면해선 안 된다. 모든 것을 조작하고 싼 먹거리를 통해 소비자에게 다가서는 자본의 립서비스는 우선 의심부터 해야 한다. 먹거리는 맛있고, 윤리적이고, 정상적인 마케팅으로 나서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먹거리 자본은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들에겐 이익과 손해 외에 다른 고려사항이 없다. 먹는 것에서부터 깨어나는 것,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좋은 세상의 단초가 될 수 있다. 당신의 정치를 먹는 것에서도 펼쳐라.

 

"정치는 먹는 것을 나누는 행위이다. 누가 더 먹고 누가 덜 먹을 것인가, 누가 좋은 것을 먹고 누가 나쁜 것을 먹을 것인가가 정치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한국인은 먹는 것이 정치적인 일과 관련이 없는 듯이 여긴다."(p.274)  

 

커피 만드는 사람인 나는 황 선생(의 말씀)을 감히 지지한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내가 먹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 그것이 우리의 생의 감각을 깨우고, 우리를 삶의 주체로 서게 만들 거라고 믿는다. 그것은 가깝게는 좀 더 좋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만들고, 멀리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 또한 그것이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믿는다. 내가 내 인생의 자유 주체로 서는 것.

 

어머니는 어릴 때 말씀하셨다. 니가 먹는 밥에 얼마나 많은 농부의 노력이 들어가 있는지 아니? 그땐 새겨듣지 않았다. 그러나 뒤늦은 각성으로 이제는 안다. 나는 커피 생산(노동)자의 노력과 땀을 눈으로 보고 접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커피와 먹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군가의 입에 들어가는지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한다. 먹거리를 진지하게 선택하는 일이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일과 무관하지 않음을 안다. 

 

그러니 늘 되새긴다. 먹는다는 건, 먹혀지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의 응원을 받아 힘껏 사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의 말마따나, 그건 어쩔 수 없이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일'이지만, 나의 태도와 자세를 어떻게 취할 것인지 사유해야 한다. 먹는다는 건, 참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다.

 

《한국음식문화박물지》, 먹는 것에서도 당신의 우주를 넓히는 길을 안내할 것이다. 뿌잉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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