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과디아'는 미국 뉴욕 주 퀸즈에 있는 공항이름(LaGuardia International Airport, 약어 LGA)이다. 더 깊이 들어가자면, JFK공항처럼 사람의 이름을 땄다.

 

피오렐로 라과디아, 그는 뉴욕시장을 역임했다. 그것도 무려 세 번(1934~1945). 잘은 모르지만, 진보적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장을 하면서 뉴욕 시민의 사랑을 뜸뿍 혹은 왕창 받았나보다. 예술인이나 대통령이 아닌 일개(?) 시장 출신으로 공항의 이름을 차지할 정도인 것을 보면 말이다.

 

그는 시장 이전에 판사 출신이다. (검사보다는 상대적으로 초큼 낫지만) 판사들의 수준이 영 탐탁치 않은 한국 사람으로선, 그런 사랑,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어디 집권여당에 들어가서 여당 텃밭에서 공천을 받아, 유세 때 평소에 잘 가지 않던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할머니들과 악수하고, 평소 안 먹던 국밥 한 번 먹어주며, 다리를 놔준다든가 지하철 개통을 해준다든가 말로만 떠드는 한편, 사촌에 팔촌까지 뒤져서 상대 후보 진영 약점만 밝히면, 시장이야 어떻게든 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라과디아가 치안판사 시절, 한 노인이 빵을 훔쳐 먹다가 잡혀와 재판장에 섰다. 라과디아가 말했다. "나이도 드신 분이 염치 없이 빵을 훔쳐 먹습니까?" 노인은, "사흘을 굶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라과디아, 이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벌금 10달러의 처분과 함께 방망이를 땅땅땅 내리쳤다. 빵을 훔친 절도 행위에 대한 판결이라며. 

 

그런데, 이내 그는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고 이 한 마디. "그 벌금, 내가 내겠습니다. 그동안 내가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죄에 대한 나 스스로의 벌금입니다." 아마도 재판장은 웅성웅성댔을 것이다. 판사가 피고의 벌금을 대신 내줬다? 

 

그걸로 끝, 아니었다. 방청객들을 향한 또 한 마디. "이 노인은 재판장을 나가면 또다시 빵을 훔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 모인 방청객 중에서도 그동안 좋은 음식 드신 분은 조금씩이라도 돈을 기부해주십시오." 

 

방청객들 '삘' 받았다. 주머니를 열었다. 모금액이 47달러. 1920년대임을 감안하면 꽤 큰 돈이 아녔을까.

 

방점은 그가 내세운 명분, 즉 언어 사용이다. 그는 '불우이웃'이나 '가난한 노인 돕기'와 같은 표현을 쓰지 않았다.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죄. 앞선 표현을 썼다면, 노인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방청객들도 그저 그런 상투적인 모금이구나 싶어서, 감동과 공감은 분명 떨어졌을 것이다. 

 

선의도 좋지만, 더 나아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자연스럽게 공감을 이끌어내기. 그 딱딱하고 냉정한 재판장에서 사람을 움직인 판사라면 충분히 시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진보시장이라고 섣불리 말할 순 없지만, 그는 11월, 한 노숙인이 지하철 화장실에서 숨졌다는 보고를 받고, 시신이 안치된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선 말했다. "연고도 없는 한 사람이 가는 길에 누군가 친구가 되어주는 일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찾아왔다." 

 

라과디아만큼 시민들 사랑을 받을지는 모르겠으나, 저 정도 시장이라면 약간 안심이 된다. 5세 정도는 아니니까! 5세 훈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노숙자들이 지하철 화장실에서 죽지 않도록 지하철 화장실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 이 정도 발언이 나오지 않았을까.ㅋ

 

언어의 한계는, 곧 복지의 한계를 만든다. 또한 공동체의 한계를 조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하지 않았던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

 

아울러, 지금 세상에 있지도 않은 희망과 꿈을 관성처럼 들먹이는 기성 세대의 위로 타령은 좀 역겹다. 그들이 해야 할 것은 위로가 아니라, 젊은 세대에 대한 사과, 그리고 반성과 성찰이다. 젊은이들은 아픔도 아픔이지만, 그 위로(타령)에 질식돼 죽을 것이다. 

 

현실을 말해야 한다. 희망 없음을 얘기해줘야 한다. 도대체, 얼마나 더 열심히, 열정적으로 살아야 이 미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뻐꾸기처럼 날리는가 말이다. 역시 언어의 한계다.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고 싶은, 부끄럼쟁이 혹은 염치실종자들의 언어유희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그 하찮은 위로에 침을 뱉아라.

 

니기미, 조까라 마이싱! 퉤!!

 

좋은 음식 니들만 처먹어대고, 미안하단 소리는커녕 거짓 위로만 지껄여대는 돼지들아,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죄, 벌금 얼마나 낼 테냐! 아니, 돼지들이 그것을 뱉아내도록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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