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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본능 - 불, 요리, 그리고 진화
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신들의 왕, 제우스는 어째 위대함보다 쫌생이 같은 면모가 좀 더 드러난다. 불을 ‘숨카놓은(숨겨놓은)’ 것만 해도 그렇다. 그만큼 불이 유용해서겠지? 제우스는 혼자 뭔가 꿍꿍이를 갖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많은 자식을 낳은 걸 보니, 불장난을 했던 것도 같고. 신들의 신치고는, 불 갖고 무슨 장난을 쳤는지, 재미있는 신이야.
그런 제우스의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 그는 제우스의 장난감인 불을 훔쳤지만, 제우스처럼 숨카놓고 장난치지 않았다. 인간에게 불을 내줬다! 그는 혼자 불장난을 할 생각이 없었는지, 제우스의 쫌생이 기질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지 모르겠으나, 냉큼 불을 건넸다. 덕분이었을까. 인간은 불을 통해 문명의 문을 열었다. 굳이 따지자면,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맨 처음 문명을 가르친 장본인. 참고로, 프로메테우스는,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물론, 쫌생이 제우스가 그걸로 끝낼 리는 없었다. 복수. 판도라를 보냈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가 그녀에게 뿅 갔다. 판도라를 아내로 맞았고, 그 유명한 판도라의 상자는 여기서 탄생했다. 인류는 제우스의 저주로 불행을 맞이해야 했다. 실은 그것이 불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참고로,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의미.
알다시피, 프로메테우스는 형벌을 받았다. 코카서스 바위산에 쇠사슬로 묶였다. 낮이면 제우스가 보낸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신세. 아파, 마이 아파, 간이 아파. 간 때문이야~ 물론 밤이면 간이 다시 회복되는 쳇바퀴. 곧, 영원한 고통의 굴레.
당사자들이 불 갖고 장난을 치는 동안, 그렇다면 인간은? 프로메테우스가 깔때기였던 것인지, 인간은 추위와 맞설 수 있게 됐다. 무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청동과 철의 시대를 불러왔다. 그리고 하나 더, 음식을 요리할 수 있게 됐다. 《요리 본능》의 저자 리처드 냉엄은 요리할 수 있게 된 것에 주목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주면서, 요리 대접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불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은 온기와 빛뿐만이 아니다. 뜨거운 음식과 안전한 물, 마른 의복, 위험한 동물로부터의 보호, 친구에게 신호할 수 있는 수단, 심지어 마음의 평안까지도 제공한다.”(pp.22~24)
리처드 냉엄은 불로 음식을 만드는 화식이 인류의 진화를 가져왔다는 가설을 내놓는다. 자연 그대로의 것, 생식에 대한 예찬이 지금 종종 흘러나오지만, 그는 화식 예찬에 더욱 적극적이다. 생식은 먹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에너지 전환에서도 화식만큼 효율적이지 않다. 화식은 인간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줬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이것이다. '음식을 익히면 우리가 그로부터 얻는 에너지의 양이 늘어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불로 요리하기’는 우리가 먹는 양식의 가치를 높이고 우리의 몸과 두뇌, 시간 사용 방법, 사회생활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p.14)
추가된 에너지는 생존율과 번식률을 높였다. 유전자를 널리 퍼트렸다. 해부학적 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생리작용은 물론이요, 생태, 생활사, 심리, 사회 변화, 익힌 음식이 지닌 파괴력이었다. 물론 가설이다. 랭덤은 인류가 익힌 음식을 먹기에 알맞은 치아와 창자를 갖춰서 익힌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익힌 음식을 먹는데 적응하면서 짧은 치아와 짧은 장을 갖게 됐다고 주장한다.
그럴 듯하다. 랭덤은 익힌 요리의 가치를 극적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독보적으로 큰 뇌를 가질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부실한 육체에 빛나는 정신력을 부여해 준 것이다." 가히, 이 정도면 요리를 향한 숭고한 숭배다. 그게 자신의 가설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는진 몰라도.
그러나 이 책, 대중들이 보기엔 아카데믹하지 않나 싶다. 아니 내가 과문해서 그런 건가? 좀 더 쉽게 풀어쓸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단어나 내용이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먹는 것 갖고 왜 이러나, 이 사람! 고개를 끄덕일 만한 내용 충만하지만, 중간중간 턱턱 막히는 아카데미 앞에 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고뇌를 생각했다. 간 때문이야~ 간 때문이야~
그러다, 남녀 역할 분담과 결혼과 가정의 형성 등의 대목은 흥미로웠다. 6장(요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리니)와 7장(요리하는 인간의 결혼 생활)이 그것이다. 여성들의 입장에선 화식이 웬수이자, 원흉일지도 모르겠다. 요리라는 이름의 향기로운 냄새와 맛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부엌에 유폐했는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요리를 해야한다며 생에서 실종됐는가.
랭덤에 의하면, 화식은 여성을 집에서 요리하게 만든 주요인이다. 남자가 요리를 할 때도 드문 간혹 있으나, 가정에서의 요리가 여성의 몫이라는 건, 놀랍게도 문명 여부와 상관없이 일관된 규칙이란다. 그는 세계 전역의 소규모 사회를 조사해, "조사한 모든 사회에서 여성은 가족들에게 매일 식사를 제공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결론을 낸 제인 콜리에와 미첼 로살도의 연구도 언급했다.
어떤 사회에서는 미혼 여성이 남성에게 음식을 제공한다면 약혼 제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상 추파를 던지는 셈이란다. 문득,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다. 은수(이영애)가 상우(유지태)에게 은근슬쩍 툭 던진다. "라면 먹고 갈래요?" 라면의 용도에 대한 새롭게 눈뜬 그때가 있었지, 흠흠. 그러고 보면,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시절, 내게도 자신이 만든 음식을 같이 먹자며 추파(?)를 던지던 소녀가 있었는데, 나는 그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던 기억.
뉴기니 보네리프족의 경우엔, 여자가 그들의 주식인 사고야자를 식사로 준비해서 남자에게 주면, 그녀는 남자에게 시집간 것으로 간주된단다. 음식과 결혼 혹은 성관계의 연계는 어디에서나 일상적일 수도 있겠다. 하긴 식욕 중추와 성욕 중추는 바로 옆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지 않는가. 보네리프족 남자가 머리에 꽂고 있던 사고야자 포크를 빼서 여자에게 보여주면 성관계를 하자고 요청하는 것이라니, 사회마다 지닌 음식의 함의란 참 재미있는 것이다.
그래서 랭덤은 화식을 통해 남녀가 서로 보호해 주는 배우자 관계의 유대 체계가 신속하게 진화했을 것이라고 본다.
화식은, 남녀 관계에서 남자에게 좀 더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은 남성의 권위애 매우 취약하게 됐다는 것이다. 남성 지배문화가 자리한 동력으로서의 화식.
"화식은 여성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었고 자녀들을 먹여 살릴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동시에 남성 지배 문화가 강요하는 종속적 역할을 새로이 떠맡도록 하는 덫이 되었다. 그리고 남성이 문화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새로운 제도를 창조하고 영속화하였다."(p.228)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주지 않았다면 여성은 요리에 얽매이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어찌 보면, 여성들에게 불은 판도라의 상자였던 셈이다. 재앙을 함께 얻은 셈인가?
그래서 나는 요리하는 남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굳혔다. 나는 사랑에 종속되고 싶은 남자니까!ㅋ 내게 있어, 요리는 공동의 몫이다.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으면서 종속되는 관계를 위한. 그래서 지금은 커피를 요리하지만, 더 많은 요리와 맛있는 요리를 사랑하는 여자에게 제공하고 싶다. 《요리 본능》은 그런 나의 본능을 일깨운다.
랭덤과 다른 나의 결론은, 요리는 사랑이다.
다시 한 번, 장석주의 詩를 꺼내본다.
詩의 마지막,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아무렴. 첫사랑을 잃지 않으려면!
그러니까, 부디 당신도. 남자라면 그리 하고, 여자라면 그런 남자를 만나시라. 건투를 빈다.
요리가 인생사에서 중요한 이유다. 요리본능!
간을 쪼이고 있는 프로메테우스에게 간에 좋은 요리라도 만들어줘야겠지?
프로메테우스에게 깔맞춤 요리가 있을 텐데, 누가 알고 있다면 알려주소.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으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 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 장석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