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기대, 없었어요. 나는 그저 공연장에 있었고, 그저 흘러나오니까 흘러나오는 대로 귀를 열었고, 피곤과 고단에 쩐 몸을 풀썩 흐트려 놓고 있었을 뿐이지요.
그러다, 부르르르, 몸이 반응을 합니다. 음악이 몸을 깨우고, 마음에 스밉니다. 음악이 온 몸을 감싸면서 신경계를 타고 곳곳에 전이되는 그런 느낌. 혹시, 아세요? 쉽지 않은 경험이죠. 아마도 지독히 몸이 고단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뭐 그럼 어때요.
감동입니다. 그 파르라니 푸르라니 떨리는 라이브의 음색. 루시아라는 이름. 생소했어요. 어? 발랄하고 예쁘네? 노래보다 말을 먼저 들었을 때 느낌은 그랬는데, 음악이 흐르면서 저는 그만 풍덩 빠지고야 맙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아차리고 말았습니다. 저의 둔감한 센스하곤!
에피톤 프로젝트. 심규선. 아. 부디... 그 노래를 듣고서야 그만... 눈물샘이 먼저 알아챕니다. 눈물이 또르르르... 그제서야 알아차렸습니다. 멍.충.이, 준수. 심규선이 루시아였음을. 에피톤 프로젝트와 함께 작업하던 뮤지션이었음을.
아, 어쩜 좋아요. 제 마음에서 오지은, 한희정, 요조, 타루, 다 밀어버리고선, 루시아는 단박에 만신전에 오르고 맙니다. 배신자요? 어쩔 수 없어요. 속수무책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고야 만 겁니다. 손 쓸 도리도 없이, 마음 붙잡아 둘 여지도 없이. 그저 그럴 수밖에 없는 그런 것.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것이 아닌, 뮤지션을 건졌습니다. 서경식 선생님 알현이 목적이었던 그 자리에서요. 이런 걸 본말이 전도됐다고 하나요? 아님, 레어템 획득? 그는 분명, 레어한 뮤지션이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자면, 레어한 여인일 겁니다. 더디고 무책임한 감이지만, 저는 그런 감을 잡았으니까요!
오늘, 커피를 만들면서 커피향과 함께 한, 아니 공기와 함께 한 거의 모든 시간, 그녀의 음악이 공기 중에 흐르게 하거나, 허밍이 떠돌아다닙니다. 가을비라고 믿고 싶은 눈물이 나무가 그만 잡은 손을 놓아버린 잎 사이로 흐르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 음악들에 위로 받고, 슬픔을 함께 나눴습니다. 고맙습니다. 루시아. 그리고 그 음악들. 지금도 그렇고요. 밤별이 노래와 함께 흘러요.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그녀는 용감하고 씩씩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눈치 챘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묻어있는 어떤 슬픔과 여운. 짝사랑 앓으면서 만들었다는,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의 정조도 그랬지만, 그녀의 말꼬리에 붙은 어떤 마음의 조각들.
부디, 이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는데, 나는 그 박수가 미웠어요. 산통 다 깨는 기분이었어요. 단 몇 초라도 정적과 고요가 필요했거든요. 그 짧은 순간이라도 이 노랠 음미할 수 있으면 했어요. 어떤 라이브 음악은 그렇지 않아요? 박수보다 그저 안에서 곱씹으면서 잔향을 품고 싶은.
당신도 그런 적 있죠?
당신이라는 시간, 그 길고짧음은 큰 의미 없다고 보는데, 당신 없는 계절의 바뀜, 어쩌면 혹독해요. 지금 나무들처럼 많은 것을 놔야 하는데, 당신과 함께 한 순간이 너무 빛났던 까닭일까요.
당신을 떨쳐버리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지만, 나도 당신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하고, 몸을 때론 혹독하게 다그칠 때도 있어요. 헌데, 정말 루시아의 말처럼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상관없이 당신이 있어요. 당신은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 모르죠?
내가 당신을 생각하며 할 수 있는 건, 당신이 만족할 수 있는, 당신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게끔 만드는 커피를 추출하는 것이었는데. 당신은 그런 마음을 들게 한 사람이었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커피를 만들고 있는 걸까요. 내가 가진 도구로 당신을 향한, 당신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날들, 모든 것들이 꿈만 같아요.
그래도 있잖아요. 나도 이 계절이 혹독해도, 이토록 좋은 음악을 해주는 뮤지션들을 만나고, 어설피 깝죽대는 내게 자극과 지혜를 심어주는 서경식 선생님과 같은 좋은 어른들, 내게 커피를 내리게끔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렇게 아주 혹독하지만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있는 새, 11월이 안녕을 고하고, 12월이 안녕을 말해요. 루시아의 노래 중에, 안녕, 안녕 이라고 있는데, 묘하게 맞물리네요. 음악의 힘은 참 강해요. 말했던 가요? 나는 다른 무엇보다, 음악이 가장 힘이 세다고 생각한다는 걸. 서경식 선생님도 비슷한 말씀을 전하셨는데, 칸딘스키가 그랬대요. 음악은 예술 중에서 최고의 분야라고.
부디, 함께 들어요.
루시아의 말을 빌자면, 이것은 무탄산, 열량이 없는 달콤함으로, 죄의식이나 책임감은 조금도 함유되지 않았으니까. 부디, 이것을 낭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