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격언이랍시고, 어른들은 말했다. 지금도 말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시련이 큰 그릇을 만든다. 조까라 마이싱. 그건 박물관에 처박힌 말이거나,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 지껄이는 상투적인 관성이다. 김한길의 어머니가 말씀하셨듯, 대개의 경우 시련이란 보통의 그릇을 찌그러뜨려 놓기가 일쑤다. 그리고 고생 끝에는 낙? 지랄, 거개는 병이 온다. 자칫하면 죽는다.
최근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와 같은 말도 마찬가지다. 그 말, 나름 청춘을 위로하고 힘을 불어넣고자 한 것이겠지. 그 마음, 폄하하자는 건 아니나, 명백하게는 거짓 위로다. 거짓말이다. 아파서 청춘이라는 명제가 성립 가능하기나 한가. 그런 위로보다 스산하고 암울하며 절망적인 진짜 모습을 까는 게 훨씬 낫다. 세상은 점점 나빠지기만 할 뿐이다. 거짓 위로로는 그것을 멈출 수도 제어할 수도 없다.
김한길의 《눈뜨면 없어라》의 미덕은 그런 것이다. 아직도 그의 이야기가 현실적합성을 지닌 이유다. 그냥 좆 같은 건 좆 같은 거다. 사소하게 행복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도 그렇고, 아프고 슬퍼도 니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하라는 강요도 우습다. 고작 한다는 말이 아프니까 청춘이다? 멘토 남발에 멘티 득실. 멘멘만 거린다.
대한민국은 지금, 그렇게 거짓으로 지탱되는 사회다. 하긴 언제는 안 그랬느냐만은. 거짓에 질식돼 뒈질 나라다. 물론 나는 그 나라의 소시민이니까, 거짓에 휘둘려 버티고 견디다 죽을 것이고.
씨발. 한-미 FTA로 죽도록 피똥만 싸다가 뒈질 불쌍한 우리여.
낭만
낭만도 이미 죽었다. 폐기처분 됐다. 노래방, 다른 선배들은 열심히 노랠 부르고 지랄발광을 하는 와중에 한 선배가 내 귀에 대고 말한다. 니 선배들, 이 낭만이 사라진 시대에 그래도 낭만이 남아 있지 않냐? 개뿔, 무슨 개소리요, 하고 받아쳤다면 개뻥이고. 속으로, 웃었다. 아니, 비웃었다.
낭만은커녕, 추잡이요, 소아병적인 알코올 연대다. 국가의 버림으로 이라크에서 무참히 살해된 김선일 씨를 말도 안 되는 유머 소재로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고, 폭탄주를 돌려야 결속이 강해지고 끈끈해진다고 생각하는 관성. 내가 듣기엔 그 노래들도 풍류 아닌 발악이다.
그런 한편으로 낭만이 밥 먹여주냐고 떠벌리면서, 어떻게든 출세하고 악착같이 돈 버는 게 장땡이라고 생각해서 조언해 준다는 사람들. 낭만이 아닌 것을 낭만이라고 말하고, 알코올을 붓고 마셔야 서로가 끈끈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은 이런 숭고한(?) 충고까지 던진다. 뭐? 정규직만 쓴다고? 아르바이트를 안 써? 그러니까, 니 커피하우스가 돈을 많이 못 버는 거야. 돈 벌려면 알바 써, 임마.
그런 자리에 왜 꼈냐고? 그런 자리, 엎고 나와야 되는 것 아니냐고? 맞다. 그 자리에선 배시시 웃고 넘어가설랑은, 이렇게 뒷북 갈기는 나는 또 얼마나 비겁하고 야비한 존재인가. 닳을 대로 닳고, 찌들 대로 찌든 낭만적 고사(枯死). 그렇게 보면 김한길은 얼마나 낭만적인 사람인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람들을 오가면서 나는 또 죽음에 하루 더 가까워진다.
정말이지, 선배도 고를 수 있다면 고르고 싶다. 낭만이 밥 먹여준다고 증명해주는 선배가 그립다.
사랑
김한길의 찐~한, 사랑 돋는 연애소설을 기다린다. 나는 사랑만이 이 빌어먹도록 병든 세상의 유일한 백신이라는 환상을 가진 사람이니까. 아니, 사랑, 그것밖에 없으니까.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지는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게 사랑이니까. 그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고 사랑을 부정하는 건 바보다. 사람이 바뀔 뿐, 사랑은 영원하다.
김한길은, 사랑을 숨겨놓지도 않은 보물을 찾는 보물찾기와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숨겨놓지 않았으나 숨겨놓지 않았음을 우리는 모른다. 그래서 찾고 또 찾는 것이고. 역시 어른들의 거짓말? 그래도, 삶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유일한 백신은 사랑이다. 누가 뭐래도 그렇다. 사랑 확신범인 게지.
미나. 미국 생활하는 동안 김한길의 애틋한 사랑이자 아내였던 그녀는 이어령의 딸이다. 사실 나는 궁금했다. 이어령의 딸이 왜 가난했을까. 이른바 빨갱이의 아들이었던 김한길과 사랑해서, 결혼해서? 그 내막은 모른다. 물론 그것, 전혀 중요하진 않다.
다만, 나는 《눈뜨면 없어라》의 '작가 후기'에 덤덤하고 짧게 서술된 이혼의 과정이, 그것이 짧고 덤덤해서 더욱 아팠다. 대충 이랬다. 미국 생활 5년, 갖은 쌩고생을 하다가, 그녀는 변호사가, 그는 신문사 지사장이 됐다. 방 하나짜리 셋집은 바다가 내려보이는 언덕 위 삼 층짜리 새 집으로 탈바꿈했다. 이사 한 달 뒤, 그들은 결혼생활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혼에 성공했다.
그 짧은 글에서 당사자가 아님에도 왠 오지랖인지, 내가 다 아팠다. 통증 같은 거? 어떻게든 사랑으로 버티던 미국 일기가 한 순간에 무너진 탓이었을까. 모르겠다. 그냥 아욱아욱. 제목도 얼마나 아픈가. 눈뜨면 없어라. 이별 후 눈 뜨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 어려운 일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김한길의 말처럼 사랑이 존재를 망가뜨리는 병균일지 몰라도, 평생 병균감염자로 살아야한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이유? 없다. 그냥, 사랑이니까.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니까.
Too Much Love Will Kill You. 노래방에서 결국 실패한 노래지만, 따지고 보면 실패가 어딨나. 그저 제대로 못 불렀을 뿐인 게지. 그러니까, 프레디 머큐리가 일찍 죽은 것도 Too Much Love 때문일 테지. 사랑에게 죽임, 당했다. 사랑은 그렇게 치명적이다. 그래도 사랑하겠다는 건 치명적인 것에 맞서겠다는 저항이다.
사랑, 그놈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