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을 찾아가는 까닭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공항대합실에 서서 출발하는 항공편들의 목적지를 볼 때마다 그토록 심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겠지. 망각, 망실, 혹은 망명을 향한 무의식적인 매혹.                                                        -김연수, 《여행할 권리》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떠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곳, 공항. 소설가 김연수가 말했듯, 여기만 아니라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항은 그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여느 일상과 다른 나의 존재. 그것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꼭 정치적 망명이 아니더라도 문화 망명자로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재미까지.

그래, 왜 아니겠는가. 공항은 생에 스핀을 먹이는 행위가 이뤄지는 곳이다. 김연수의 표현을 빌자면, "생을 바꾸는 공간"이다. 스핀이 제대로 먹었느냐, 아니냐는 일단 떠나보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일. 떠나보면 알게 될 거야, 라는 책 제목만큼 공항에서 맞아떨어지는 건 없다. 떠나보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여행, 또한 그것이 생이다.

나도 생을 바꾸기 위해서였을까, 공항에 서 있다.  

역시나 언제나처럼 두근세근. 떠남은 곧 박동임을 확인한다. 이번에는 동티모르다. 살짝 낯 익은 세계다. 동티모르 사람들이 생산한 (공정무역)커피를 다루고 있는 커피쟁이니까. 나는 그 커피를 통해 동티모르의 자연과 사람들을 상상했다.  

그러나 낯선 땅이다. 내 발과 몸은 동티모르를 모른다. 그래서 궁금했다. 처음 밟아보는 그 땅은 내게 어떤 지령을 안겨줄까.

혹시 그것 아는가? 비행기가 땅에서 이별(이륙)하는 원리. 그것은 엔진의 추진력과 날개의 양력 때문만이 아니다. 여기가 아닌 그 어딘가로 향하겠다는, 승객들의 마음. 그 마음들도 비행기를 뜨게 한다. 동티모르를 향한 각자의 마음가짐과 설렘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나는 그것이 비행기를 뜨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직항은 없지만, 경유지를 거친 동티모르행 비행기를 뜨게 한 동력에는, 내 마음도 있었다. 간다, 동티모르. 기다려라, 동티모르. 지금, 만나러 갑니다, 동티모르인 여러분. 

 

커피를 만드는 사람인 나는, 지난 7월 커피 산지를 찾았다. 동티모르 공정무역커피를 다루면서, 몸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세계의 잇닿아있음. 동티모르 커피노동자와 한국 커피노동자는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글과 사진, 관념으로 알고 있던 그것. 나는 그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염원을 품고, 비행기가 이륙한다. 나는 이 순간이 가장 짜릿하다. 누군가는 이륙할 때의 이물감이 싫어서 비행기 타기를 주저한다지만, 나는 변태스럽게도 오르가슴을 느낀다. 마음이 몸을 뜨게 만드는 순간, 나는 새로운 세계로 향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 향하고 있다는 설렘이 주는 쾌감이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짧은 밤, 머물렀다. 동티모르 직항이 없는 까닭이었다. 발리 덴파사공항에서 2시간여 남짓한 거리지만, 그 2시간을 더 날 수 있는 정치적 힘은 없다. 발리를 상징한다는 꽃, 캄보자의 강렬한 향이 내가 낯선 땅에 와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후텁지근하고 눅눅한 날씨. 동티모르의 날씨는 어떨까, 그것이 더 궁금했다.   

이튿날, 아침을 먹고 스쳐지나듯 발리를 떠난다. 비행기편으로 발리로부터 1시간50분, 호주 다윈으로부터 1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동티모르.  

공식명칭은 티모르 공화국이다. 동티모르 언어인 테툼어로 티모르 로로사에(Timor Lorosa'e)라 부른다. 남지나해와 인도양 사이 티모르 섬의 동부와 티모르 섬의 서부 일부만을 동티모르로 일컫는다. 티모르 섬은 호주와 인도네시아가 통치하는 여러 섬에 둘러싸여 있다. 지리적으로는 오세아니아에 속하지만, 정치·경제·문화적으로는 아시아의 일부로 본다.

이런 지형 여건은 식민의 역사와도 깊은 연관을 맺는다. 1520년부터 시작된 400년 이상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 1975년 11월,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나, 다음달 인도네시아의 무력침공으로 이듬해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강제편입됐다. 이후 독립을 향한 여정은 멀고 험했다. 2002년5월20일, 인도네시아로부터 완전히 독립, 공식 인정을 받았다.  

21세기 첫 독립국이 됐다는 명예를 받았지만, 여전히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한국도 독립 직전, 상록수 부대 등을 PKO(평화유지군) 파병의 명분으로 보낸 바 있다. 박희순, 고창석씨가 주연한 <맨발의 꿈>의 배경이 동티모르다.   

어쨌든, 발리에서 동티모르로 가는 여정은, 쉬이 길을 내주진 않았다. 만만디 습성이라고나 할까. 발리와 동티모르를 오가는 하루 한 편의 비행기는 연착은 대수요, 기다림은 필수였다.  

 

'메르파티(Merpati, 비둘기)'라는 이름의 비행기는 우리의 사라진 기차, '비둘기호'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기체는 낡았다. 비행기 안에서 난생 처음 바퀴벌레를 만나는 일을 겪었지만, 상관 없었다. 나는 비둘기의 꼬리를 잡고 동티모르로 향한다. 무언가 좋은 소식을 들고 가야할 것 같은 기분이다. 비둘기는 자고로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 아니었던가.   

마침내, 동티모르 사람들이 사는 나라, 동티모르 커피가 자라고 있는 땅에 첫발을 디뎠다. 그 첫 순간, 이곳을 사랑하게 되리라, 직감했다. 허울만 좋은 10위권 경제대국 이방인의 눈에, 오랜 식민지배와 내전을 거친 동티모르는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지만, 사람들의 눈빛과 자연은 그것이 다가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이곳은, 동티모르였다. 나는 동티모르를 밟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