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나의 한살매
백기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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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젊은이, 백기완 선생님은 요즘 세상에 대해 일갈하신다. “요즘 벗나래(세상), 그 돌아가는 꼴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이것도 사람 사는 벗나래든가?’ 그런 휫딱(착각)이 들 때가 있다. 대통령이라는 이명박이가 앞장서 뻔한 거짓을 참으로 바꾸고, 또 참짜 참은 아예 죽이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땅불쑥하니(특히) 갈마(역사)라는 걸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는 저희들 마음대로 갈마를 거짓꾸리고 있음을 본다.”(p.190)

백 선생님의 지금-여기에 대한 현실인식은 명확하시다. 지금의 현실은 늙은 젊은이의 철학과 당최 조응을 할 수가 없다. 아니 정반대다. 백 선생님의 일생을 관통하는, 아들딸을 키울 때 이르시던 새김말(좌우명)은 이렇다. “모두가 어려운 때 제 배지(배)만 부르고 제 등만 따스고자 하면 키가 안 크니라.”(p.13) 아니, 말로는 서민을 내세우지만, 돈 있고 힘 있는, 이른바 가진 자들의 이익과 이권을 위해서만 작동하는 지금에, 시대착오적인 생각 아닌가!

하지만, 백 선생님은 그 가치를 절대 놓을 생각이 없으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서 정말이지 단호하시다. 그것이 한 순간의 치기로 만들어진 개똥철학이 아니라, 일생을 관통하면서 차곡차곡 쌓아온 절대적 신념체계임을 알 수 있다. 너도 나도 올바로 잘 사는 ‘노나메기’. 그것을 위해 필요한 불쌈(혁명). 과거의 물리적 투쟁보다는 문화예술을 통해 만들어야 할 불쌈. 

책은 우리말로만 되어 있다. 읽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다. 눈에 익지 않은 것들이 많은 탓이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새롭게 알게 된 우리말을 입에서 곱씹어 보고, 기억에 저장하고자 하는 노력이 나름 의미있었기 때문이다. 책 읽기의 새로운 경험이다. 나는 순 우리말만 쓰기보다는 외래어를 충분히 받아들이면서 우리 언어의 외연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순 우리말로 외연을 확장하는 것도 괜찮았으니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난 기억도 있다. 백범 일지는 봐도, 누군가 백범 선생을 만난 기억이라고 내뱉은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뵌 백범 선생’이라는 소제목으로 풀어놓은 이야기는 백범의 아우라와 포스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백범을 떠올려도 매칭이 되는 이야기.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에 세상을 늘 맨몸뚱이 하나로 부딪혀야 했던 어린 시절부터 재야 민주화운동의 투사로서 겪은 고초 등은 시대의 야만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증명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시대의 야만은 방법을 달리해 부메랑처럼 돌아왔고, 비열하고 졸렬한 방법으로 우리를 옥 죄는 것이 지금 시대다. 백 선생님 또한 이 시대에 대한 분명하게 일갈하지 않으셨는가 말이다.   

하지만, 젊은 날 백 선생님의 기백을 보자면 그냥 불끈불끈 힘이 솟기도 한다.  “그렇다, 나도 내 뼈를 갉아 애나무로 삼고, 내 피땀을 뽑아 거름으로 삼으며 온통 불을 지른, 젊은 한때가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런 젊은 날에 마주해 요만큼도 뉘우침 따위는 안 한다. 도리어 모이면 으르고 뽑아대고 뜨거운 것이 빛나던, 그런 젊은 날의 눈물이 있었다. 이 새끼들아.”(p.142) 

백 선생님의 시(詩) 중에 「젊은 날」이라는 시가 있다. “모이면 논의하고 뽑아대고/ 바람처럼 번개처럼/ 뜨거운 것이 빛나던 때가 좋았다/…/우리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헐벗고 굶주려도/ 결코 전전하지 않았다/ 돈벌이에 미친 자는 속이 비었다 하고/ 출세에 연연하면 호로자식이라 하고/ 다만 통일논의가 나래를 펴면/ 환장해서 날뛰다 밤이 내려/ 춥고 떨리면 찾아가던 곳/…” 읽을 때마다 뜨거움이 불끈 솟는 시가 아닐 수 없다. 백 선생님은 그렇게 시대를 밝힌 시인이었고, 시대를 저항한 투사였다.  
 
무엇보다 나는, 이 책에서 이 말을 잊지 못하겠다. “자기 등만 따스면 썩습니다.” 너도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노나메기’가 선생님 혼자의 꿈이 아니어야 한다. 이 책은 시대의 야만이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고, 그것에 맞서 우리는 계속 꿈을 꿔야 한다는 것을 추동한다. 턱없이 없는 사람들 것을 뺏어대는 놈이 여전히 존재하고, 누군가는 주리고 깨지고 쫓겨난다. 이 어찌 내 처지가 아니라고 외면만 할 수 있단 말인가. 백 선생님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봐, 용이 죽어라 하고 썩은 또랑에 엎드리는 까닭을 알아? 어떡하든 구슬을 하나 얻어 하늘로 올라가자는 거라고. 하늘에선 또 무엇을 하자는 건지 알아? 아무것도 해온 것이 없으니 돈장사, 땅장사, 사람장사, 사랑장사, 거짓장사, 됫싸게는(심지어는) 미국 놈 앞잡이 해먹기, 그것으로 거저먹자는 것이다. 그러니 용에 마주한 사랑 따위는 때려치우고 우리 지렁이 사랑을 하자구. 지렁이는 땅을 기고 사는 것 같애도 말이야, 힘이 있어 임마. 무슨 힘인 줄 알아. 온몸으로 땅을 갈아엎어 땅을 살리는 사랑의 힘이 있거든.”(p.144)

나는 다짐한다. 나를 비롯해서 시대의 야만에 억압받는 이들이 부디 버티고 견디길. 그러기 위해서 힘을 보태야 함을. 사람 사는 벗나래(세상)가 아닐지라도 어영차 버티고 살아남아 노나메기를 꿈꾸기. “제아무리 굶더라도, 제아무리 됫싼 매를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 모딘 고비를 어영차 버텨내고 살아남기만 하면 사람은 더없이 착하고 어진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이 벗나래(세상)엔 나쁜 치들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도막에 한술 닿은 끈매(인연)는 달구름(세월)이 가고 또 가도 끊기질 않는 것이 삶이라는 게 아닐까.”(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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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09), 백기완, 한겨레출판사
    from Finding Neverland 2009-12-25 12:58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백기완 선생의 이름 석자를 알 게 된 것은 역시 대선 때문이었는데, 하도 어려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두 번째 출마 때 그의 이름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 92년 대선 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하고, 민중이니 민족이니 무슨 말인지도 모르던 나는 십 수년 그를 잊고 살았다. 웹서핑 중에 몇 번 그의 이름을 만났을 법한데 별 뜻없이 지나쳤으리라. 요즘 이십 대 중에 그를 기억하거나 관심을 둘 사람이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