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프레드 캐플런 지음, 허진 옮김 / 열림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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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연설문을 통해서 링컨의 사유와 모든 것을 한 눈에 알수있는 기회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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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프레드 캐플런 지음, 허진 옮김 / 열림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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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와 노무현전대통령이 존경했던 인물 에이브러햄 링컨, 그럼 이 세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제일 먼저 뇌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교육 받은 엘리트집안의 출신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세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한 시대의 획을 긋는 패러다임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노무현전대통령은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정해진 엘리트(학연이나 정치적 끈등의 거의 입법화된 경로)코스를 벗어나 이런 인물도 대통령이 될 수 있구나라는 그동안 내제되었던 희망을 현실로 실현시키면서 대한민국 정치판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던 인물이다. 또한 미국의 오바마 역시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성역이라는 미국땅에 진정한 자유와 민주가 무엇인가를 보여준 인물이다. 그래서 이 두사람의 당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의 원조에는 다름아닌 에이브러햄 링컨이 있었다. 

그동안 각종 자료와 위인전등을 통해서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에 대해서 왠만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링컨은 세계적인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미국 본토에서만 건국의 아버지 워싱턴, 재퍼슨과 더불어 가장 존경받고 닮고 싶은 대통령중에 한명으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알고 있는 링컨은 그리 많지 않다. 고작해야 최초로 노예해방을 시킨 대통령 그리고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통령 정도로 밖에 우리에게 알려진게 별로 없는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에서 우리는 제대로된 링컨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이번 <링컨>은 이러면에서 링컨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다가온다. 출생에서부터 유년시절과 청장년시절 그리고 정계에 입문에서 대통령에 취임하여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링컨에 대한 모든 것을 극히 사적인 연애편지에서 부터 자작시와 직접 작성한 연설문등을 통해서 그의 사유를 접할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미국 대통령중에서 글을 잘쓰는 대통령으로는 율리시스 그랜트, 시어도어 루스벨트, 우드로 윌슨과 더불어 링컨을 꼽고 있다. 이 중에 링컨을 제외한 세명은 교육 받은 엘리트 출신이나 타고난 문장가이지만 유독 링컨만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인물이다. 링컨은 출생에서 부터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교육받을 기회조차 제공받지 못했지만 접할 수 있는 책(책이라고 해야 구하기도 힘들었지만)이란 책은 거의 암기할 정도의 독서광이었고 주어진 책을 통해서 항상 정직하고 진실하며 규칙적인 삶을 스스로 배웠고 이러한 유년시절의 사유는 그의 일생을 통해서 사적인 삶이나 공적인 삶에 일맥상통하게 흐리고 있었다. 특히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버트 번스의 시와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유독 좋아했던 그는 후에 그의 공적인 연설문에서 인용함으로써 주옥같은 연설문을 탄생시켰다. 무엇보다 링컨의 연설의 힘은 기존 정치인들의 입발린 소리가 아닌 일반 대중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는 간결하고도 정확한 메세지였고, 이러한 메세지는 남과 북으로 갈린 상황의 화합과 소통을 담고 있다. 특히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문인 게티즈버그 연설문을 통해서 그동안 남과 북으로 나뉘였던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기 위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18세기 건국자들이 만들었던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 더욱 개방적이고 포괄적인 민주주의적 평등을 확립하고자 하는 그의 강력한 메세지였고 이는 지금까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건재하고 있는 버팀목과 같은 헌법을 초월하는 절대정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또하나 이번 책을 통해 링컨의 종교에 대한 사유와 종교적 믿음으로 인한 공세에 대한 그의 반론을 접할 수 있다. 링컨은 엘리트주의와 기독교(링컨의 집안 자체는 남부 침례교의 독실한 가정이었다)를 믿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린적이 한 두번이 아니였다. 하지만 링컨의 다음 연설문을 통해서 보기 좋게 피해간다. "저 역시도 종교를 조롱하는 사람, 종교의 공공연한 적을 공직자로 지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나 죽음이라는 고차적인 문제는 인간과 창조주 사이의 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누구도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도덕을 해치고 감정을 모욕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연설을 통해서 종교적 믿음과 공론의 장이 반드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다. 공론의 장은 공적인 문제를 토론하는 것이고 종교적 믿음은 사적인 일이라고 애둘러 표현했다. 기독교국가에서 이러한 발상자체가 다소 위험해 보이지만 연설문을 유심히 읽어보면 교묘하게 자신의 약점을 피해가는 링컨만의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볼 수 있다.
    
아마도 링컨 만큼 책과 독서를 통해 자신만의 신념과 목표를 달성한 정치인도 없을 것이다. 링컨은 유년시절부터 체계적이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책과 독서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았고 그 미래를 향해서 열심히 책속에서 해답을 찾을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링컨이 위대한 인물로 남는 것은 책속에 찾은 해답을 자신만의 해답으로 설정했던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화합과 소통에 적절하게 실천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과연 링컨이 말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제대로 인지하고 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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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경제학 (양장)
누리엘 루비니 & 스티븐 미흠 지음, 허익준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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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금융위기를 제대로 알고싶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그만큼 명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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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3
로랑 고데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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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신화를 모티브로 지옥에서 아들을 살려낸 아버지의 사랑과 그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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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3
로랑 고데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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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시인이자 음악가인 오르페우스는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의 죽음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금기인 저승 즉 지옥으로 아내를 찾아 떠난다. 그리고 지옥의 神인 하데스를 감복시켜 죽은 아내의 영혼을 데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 받지만 우리가 다 알다시피 오르페우스의 원대한 계획은 실패로 결말 짓게 된다. <세상의 마지막 밤>은 바로 오르페우스의 신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아버지의 지구지순한 사랑과 대을 이은 복수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대판 오르페우스인 피포의 아버지 마테오 역시 오르페우스처럼 정말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린 아들 피포를 잃게 되고 삷을 방황속에 허비하다가 마침내 살인자를 찾아 복수에 나서지만 결국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더 없는 나락속에서 허우적 거리게 된다. 마침내 소아성애자 교수의 도움으로 저승으로 통하게 되는 문을 통과하여 우여곡절 끝에 아들 피포를 다시 이세상으로 데려오지만 정작 자신은 아들 목숨의 댓가로 지옥에 남게 된다. 그리고 지옥에서 다시 돌아온 아들이 성장해서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복수를 완결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이야기이다. 얼피보면 그저 그런 소설로 다가올 수 도 있다. 모성애 못지 않는 극단적인 부성애의 표출과 그 사랑에 대해서 복수로서 마무리하는 되갚음이라는 평범한 구도와 지옥과 현실을 오가는 다소 SF적인 플롯으로 약간의 신비감을 더한 작품정도로 보일 소지가 다분히 존재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돋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를 획일적으로 단순하게 정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르페우스가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듯이 마테오 역시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을 떠나서 대승적으로 작가의 죽음에 대한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죽음과 삶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우리시대에 어쩌면 죽음도 삶의 일부 내지는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도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작중에서 지옥의 통로를 찾아 인생을 매진했던 교수의 표현처럼 우리의 삶은 죽음이 우리 내부에서 살며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넘추지 않고 계속 자라난다는 것을, 즉 죽음은 삶의 시작과 동시에 우리 내면속에 존재해왔다는 것을 암시한다. 삶과 죽음의 세계가 서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비의 날개 한쌍처럼 서로 포개져 있는 것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거나 혹시 잊어버린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원제 지옥의 문(La Porte des Enfers)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쩌면 우리가 흔히 출입하는 하나의 작은 문으로 표시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나폴리의 지진(역사적으로 1980년 11월 나폴린 인근인 메쪼죠르노에서 발생한 대지진을 차용했다)으로 죽은자와 살아있는자의 경계가 구분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진이라는 형식을 빌려 죽은자가 다시 산자들의 틈에 뒤섞이고 산자 역시 죽은자들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발상자체가 매우 유니크한 플롯이라고 해야 겠다. 또한 작가는 마테오가 아들을 구해 지옥의 문을 나서는 순간을 재치있게 처리했다. 죽음과 삶을 구분했던 오르페우스는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삶과 죽음은 단지 문의 이편과 저편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진 마테오는 과감하게 자신 목숨의 댓가로 아들을 문밖으로 밀쳐내는 설정에서 작가는 죽음과 삶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한번 더 강조하고 있다. 

프랑스 영화나 소설하면 대게 독자들이 떠올리는 것은 예술성이다. 미디어의 색감이 아름다운 영상과 주옥같은 빛의 향연 그리고 작가의 예술성이 극에 달한 작품들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보통의 프랑스문학과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왠지 지옥에서 다시 살아나와 복수를 감행하는 내러티브 자체가 프랑스적이라고 하기엔 어색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폴리 거리의 묘사나 죽음과 삶에 대한 묘사 그리고 심지어 복수를 향한 증오의 증폭이나 그 과정에서의 심리적인 묘사는 극히 프랑스적인 예술감이 그대로 베어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죽음과 삶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카론의 배를 타고 아케론(비통의 강,눈물의 강), 시름의 강(코퀴토스), 불길의 강(플레게톤), 망각의 강(레테), 증오의 강(스튁스)을 건너면서 죽음의 세계를 확실하게 삶에서 분리한다. 하지만 작가는 영혼들이 사라지는 것을 산자들의 기억에서 차츰차츰 잊혀져 갈때야 비로소 죽음이 당연시 됨을 말하고 있다. 즉 삶과 죽음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는 하나의 연결고리라는 것이다.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잃었듯이 그리고 마테오가 아들을 사고로 잃었듯이 죽음이라는 것은 삶의 작은 일부분처럼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 오는 것이고 이러한 죽음은 세월이 지나면 삶의 한부분속에 녹아 들듯이 서로가 서로를 연결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혹시 아나 지하의 공동구와 연결된 우리 주변의 멘홀뚜껑이 실은 지옥의 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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