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동쪽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1
존 스타인벡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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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존 스타인벡은 20세기 미국 문학의 대표 작가답게 『분노의 포도』로 이미 평탄이 검증된 작가이죠. 이번 작품 <에덴의 동쪽> 역시 전작인『분노의 포도』와 일맥상통하는 연장선에 놓여 있는 작품이지만 작가 자신의 가족사를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 미국 역사 특히 미국 서부 개척 역사를 담고 있는 대하역사소설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입니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서 역사라는 거대한 물줄기 속에서 미미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고 여겨졌던 인간의 존재감에 한발짝 다가가고 있습니다. 작은 지류들이 모여모여 큰 강을 이루듯이 결국 인간의 존재와 그들의 삶의 방식들 각각 점점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 역사라는 관점으로 그 개별 인간들에 대한 애착과 더불어 인간들의 자유의지에 대한 심도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죠. 형식상으로 두 집안의 스토리와 시대의 변천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내러티브의 처음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전반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욱 더 흥미진진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에덴의 동쪽> 은 존 스타인벡 자신이 직접적으로 언급했듯이 자신의 작품 활동과 삶의 결정판과도 같은 작품이자, 기존 자신의 작품들은 바로 이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한 초석이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외가를 작품속에 중요한 비중으로 캐스팅하면서 작품에 대한 애증을 한층 더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서부터 제1차세계대전까지 사이러스 트래스크, 새뮤얼 해밀턴 양대 집안의 3대를 그리고 있는 대하역사소설로, 미국이라는 가치관 그중에서도 미서부가 가지고 있는 모멘텀을 진지하게 해부하고 민낮 그대로 보여주고 있죠. 여기에 존 스타인벡의 전형적인 사유인 인간의 삶, 자유의지, 희망을 모토로 작품 전반에 걸쳐 인간본연의 모습을 성찰하게 합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원죄 의식, 카인과 아벨의 갈등 구조를 모델로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삶과 죽음 등 인생의 대립적인 양면성이 극명하게 표출되고 있죠. 존 스타인벡은 인간이 언제까지 원죄라는 굴레에 얽매어 있어야 하는지, 인간 스스로 죄를 다스릴 수 있는지등 (이게 이번 작품의 키포인트이기도 한데요, '팀셸' 에 대한 해석의 문제) 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기도 합니다. 당연하지만 그 해답으로 인간의 자각 인식, 관용, 인간애, 인간의 자유의지 등을 내러티브 전반에 깔아놓고 있죠.


          이번 작품은 마치 해밀턴 家 와 트래스크 家 두 집안의 스토리를 담고 있지만 촛점은 사이러스 크래스크 집안에 맞쳐서 있죠. 특히 2대인 애덤 크래스크가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역활을 부여 받고 있습니다. (물론 엘리아 카잔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에서는 칼 (제임스 딘) 에 촛점이 맞춰져 있지만요) 새뮤얼 해밀턴과 애덤 크래스크 두 집안의 각각 아일랜드와 미국 동부에서 이주해온 이방인으로 설정되고 그래서 더 객관적으로 서부의 현황을 바라보게 하는 심판자 비슷한 역활도 부여 받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작품에서 신의 한수라 할 수 있는 캐스팅이 있는데요. 애덤의 쌍둥이 아들도 아니고 새뮤얼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가 자신도 아니죠. 그것은 다름아닌 리(작품 말미에 찰스라는 이름이 등장하긴 하죠)의 캐스팅입니다. 리의 등장이야말로 이번 작품 내러티브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활을 하면서 제3자적인 시각에서 두 집안의 균형과 더불어 당시 미국 서부인들의 가치관 그리고 삶에 대한 근원적인 조타수 역활을 수행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바로 리 역시 자의반 타의반으로 서부로 떠밀려온 이방인이라는 것이고 더욱이 백인이 아닌 당시의 인종적인 시각의 견해에서 비교대상이 될 수 없었던 중국인이라는 점에서 다시한번 존 스타인벡의 등장인물 캐스팅에 감탄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어찌보면 작품에 등장하는 작가 자신인 존이 챕터를 시작하는 나레이션 (이부분은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으로 모든 독자들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의 역활을 수행하는 정도에 머물럿다면 작품에 기조에 깔려 있는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삶과 죽음, 인간의 자유의지등 중요한 사유에 대한 해답들은 리를 통해서 끌어가고 있습니다. 달리보게 되면 리야말로 작가인 존 스타인벡의 현현이라고 봐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개인적으로 애덤이나 칼 그리고 새뮤얼보다 더 애착이 가는 인물이기도 하죠. 한편으로 존 스타인벡은 리라는 인물을 통해서 동서양의 가치관의 이질적인 부분들을 해소하는 모습과 노력들을 엿볼 수 도 있다는 재미도 있습니다.


          인간의 원죄,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삶과 죽음, 인간의 자유의지등 인간본연의 사유를 담고 있지만 무엇보다 애덤의 쌍둥이 아들들에 대한 작명을 둘러싸고 애덤과 새뮤얼 그리고 리가 논쟁하는 장면이 압권으로 다가오죠. 히브리어로 '팀셸(timshel)' 이라는 말에 숨겨진 의미에 대한 새뮤얼과 리의 논쟁이 다름아닌 이번 작품에서 존 스타인벡이 만천하에 공표하는 사유와 일치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애덤이 숨을 거두면서 팀셸이라는 말을 남겨두고 유명을 달리하죠. 이렇게 딱 두번에 걸쳐서 등장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와 '너는 죄를 다스려라' 혹은 '너는 죄를 다스릴 것이다' 라는 각각의 해석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 준다는 논거인데요. 창세기 4장을 두고 기존 성서의 해석처럼 '너는 죄를 다스릴 것이다' 라는 절대자가 언젠가는 인간을 죄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약속 내지는 인간에게 죄의 극복을 명령하는 의미를 가지는 일종의 피동적인 뉘양스로 해석되었지만, 리가 해석하는 '다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라는 즉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미는 상당히 센셔이니셜한 뉘양스를 풍기도 있습니다. 이말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결국 다스릴 수도, 다스리지 못할 수도 있다라는 뜻인데요 결국 죄를 다스리는 것은 인간 스스로에게 달렸다는 점을 강조하죠. 죄 (원죄) 에 대한 자각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다른 선택으로 죄를 다슬릴 수도 있고 다스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존 스타인벡은 리라는 현현을 통해서 「인간의 자유의지」 를 만방에 선포하면서 그 어떠한 논리보다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버립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에 이번 작품의 백미이자 하이라이트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부분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반대편인 라이자와 올리브라는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치밀함도 잊지 않고 있죠.   


          우리가 『분노의 포도』에서도 보았듯이 존 스타인벡의 근원적인 사유는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의지 (톰 조드로 대변되죠) 에 대한 선택등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사유가 최우선으로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이번 작품 역시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서 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대하역사 드라마 같지만 그러한 서술들은 부차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작금의 현대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는 존재할 수 있는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찾게 해주는 바이블같은 명작이라 여겨지는 바이죠. 이러한 담론들을 걷어내더라도 이번 작품은 상당히 애정이 가는 작품입니다. 세밀한 인물들의 묘사, 당시 시대상을 짐작케 할 수 있는 각종 장면들 (마차의 시대를 접는 포드 자동차의 등장 그리고 당시 자동차 시동을 거는 복잡한 절차에 대한 서사등) 의 서사 그리고 간략하게나마 등장하는 작가 자신의 나레이션을 통해서 흐르는 강물 같은 군더더기 없는 서사들이 독자들의 시선을 충분히 사로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노벨상을 수상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이번 작품에 대한 찬사는 결코 겉치레적인 멘트가 아님을 독자들 스스로 확인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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