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 바디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8
헨릭 시엔키에비츠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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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오 바디스 (Quo Vadis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참 많이 들어본 말이죠. 종교인이던 비종교인던간에 말입니다. 190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쿠오 바디스> 는 고전 중에 고전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여러차례 영화로도 선을 보였고 연극으로도 리메이커된 작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고전이라는 작품들이 대게 그렇듯이 정작 원작인 <쿠오 바디스> 보다 영화와 연극으로 리메이크된 <쿠오 바디스> 에 길들여저 있어 정작 원작이 가지고 있는 맛은 음미할 틈조차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의『레 미제라블』이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처럼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쿠오 바디스> 라는 작품 역시 원작보다는 축약본이나 엔터테이먼트가 강하게 비쥬얼화된 영상작품이 더 인기를 끌고 사랑을 받았다는 점인데요. 뭐 부인할 수 없지만 이상하리만큼 원작은 묻혀 버리고 말았죠. 그렇다고 원작의 격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고 오히려 원작의 격이 뒷받침 되었기에 후대의 그런 작업들이 가능하지 않았게나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리메이크된『레 미제라블』에 익수한 독자들이 원작을 대할때의 느낌과 충격이 다르듯이 <쿠오 바디스> 의 느낌도 일맥상통하게 다가오리라 여겨 지네요. 워낙 악동인 네로황제 시대의 기독교인과 이를 박해하는 세력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감초 역활을 하는 사랑이야기라는 대강의 써머리를 머리속에 자연스럽게 저장하고 있는 상태에서 대하는 원전의 맛은 과연 어떠한 느낌을 자아낼지도 비교대상이 되면서 독자들의 관심을 갖게 합니다.


          이교도의 상징이자 악의 화신으로 대변되는 가수이자 시인이면서 전차경기 선수이기도 한 네로를 서사한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데요. 작품 초반부에서 네로의 이미지 중 특히 리기아가 궁중연회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네로와 포페아의 이미지를 서사하는 장면은 왠지 그 동안 영화나 구전으로 듣고 보아왔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죠. 특히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더 묘한 서사이기도 합니다. 이부분이 작가의 의도된 설정으로 보여지는데요 리기아 (즉 기독교에서 성모마리아와 같은 신성한 종교적 상징) 의 시각이 과연 어느쪽의 시각일까라는 부분과 네로와 포페아의 진실은 어쩌면 듣고 보아왔던 전설과 다를수있다는 뉘양스 아닌 뉘양스를 줍니다. 물론 작품의 결말쪽으로 다가가 되면 일방적인 리기아의 이미지로 승화되지만 초반부의 이미지로만 보게 되면 아리송한 면도 함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사의 복선은 의도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상반되는 가치관의 충돌을 통하지만 상대방의 가치관을 이분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작품 전반을 통해서 페트로니우스의 말들을 인용함으로써 작가는 더욱 더 이분법적인 사고로 점철될 수 있는 사고의 경계와 균형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죠.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제우스를 비롯한 당시 로마제국이 숭배했던 다양한 신들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자신의 기도를 올리는 모습으로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는 유일하게 그리스도를 찾아 기도하는 모습을 매치함으로써 작품을 두 가지 힘의 충돌로 설정하고 있죠 (네로 황제와 포페아 황후 그리고 검투사 크로톤으로 대표되는 정형적인 로마 가치관과 사도 베드로와 리기아 또 우르수스로 대변되는 기독교 가치관의 충돌을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죠). 그런데 말이죠. 단순하게 두 가지의 가치관 충돌을 작품의 주 메뉴로 설정했다면 작품의 내러티브가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독자들 입장에서도 정말 뻔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하지만, 여기서 작가 헨릭 시엔키에비츠의 절묘한 신의 한수가 등장 합니다. 다름 아닌 그 신의 한수는 '고상한 판관' 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페트로니우스의 등장입니다. 어찌 보면 페트르니우스의 역활은 이번 작품에서 굉장한 의미와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인데요. 역사적인 평판으로도 '현명한 판관' 이라는 평가를 받은 실존인물을 거의 주인공격으로 캐스팅함으로써 로마와 기독교라는 두 가치관의 충돌을 어느 일방적인 승리로 이끌어 가지 않는다는 암시를 깔아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록 헨릭 시엔키에비츠는 자신의 조국인 폴란드를 상징하는 (기독교의 가치관으로 포장은 했지만) 리기아와 우르수스라는 가공의 인물을 통해서 폴란드의 저항과 독립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지만 자칫 뻔한 스토리와 결말을 나름의 공정하고 현명한 방법으로 이끌고 있다는 모습을 페트로니우스라는 인물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이번 작품의 또 다른 묘미이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뻔한 스토리라고 단정짓게 되고 그리고 막상 내러티브속으로 들어가보면 그 뻔함을 재확인하게 되지만 그러면서도 고전이라는 색다른 묘한 매력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전형적인 고전의 스토리와 서사방식 그리고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를 엿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대목이 리기아를 빼앗긴 이후 화풀이를 하는 비니키우스의 서사와 리기아가 해가 떠오르는 궁전뜰에서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기도장면을 서사한 씬은 가히 압권의 경지라고 할 수 있죠. 전형적인 고전의 덕목을 갖추고 있으면서 여기에 기독교라는 종교의 향신료까지 더해져서 정말이지 매끈하게 단어들을 주무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부분들이 눈에 거슬릴 수도 있죠. 독자개인의 취향에 따라선 유치하게 보일 수 도 있지만 다름아닌 바로 이런 부분들이 고전의 참 맛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일종의 오아시스같은 청량감을 제공해 주고 있기에 고전이란 언제 어느시기에 읽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휴식같은 느낌을 줍니다.


         여기에 기독교 가치관 (혹은 폴란드의 저항과 독립이라는 복선적 의미) 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맺을 수 있는 스토리를 페트로니우스라는 인물로 인해 독자들의 균형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헨릭 시엔키에비츠의 절묘한 설정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의 가치관에 일방적으로 손을 들지 않고 (물론 손을 들어준 것 처럼 보이지만요) 슬그머니 로마 가치관에 대한 묘한 뉘양스를 남겨둠으로써 일종의 면피 아닌 면피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지 않았라나는 생각이 들고요. 무엇보다 당시 로마시대를 역사적으로 고증하고 원형을 최대한 반영해서 당시 로마 시내를 재현했다는 점은 당시의 고고학적 자료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는 겁니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디테일한 서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당시 로마 시내를 들여다 보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정형적인 권선징악의 결말을 담고 있는 작품이고 결말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만큼의 무슨 거대한 반전의 임펙트는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팩트와 픽션을 절묘하게 융합하고 실재적인 고증을 통한 디테일한 서사를 통해 역사소설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쿠오 바디스> 는 명작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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