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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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은 전체 여성의 문제를 사소한 것으로 환원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계급타파운동은 오직 계급 적대에 대해서만 그리고 값싼 노동력의 착취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것은 그들 분석에서 핵심적인 개념이었다. 집에서 일하는 수많은 어머니들과 저임금으로 일하는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들이야말로 경제적 억압의 희생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성해방주의자가 그들의 정조대를 내던지는 바람에 모든 문제는 순전히 개인적이고 성적인 문제로 축소해 버렸다." 여러분은 이말에 동의 하십니까? 동의한다면 어떤면을 그리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왜? 물론 이에 대해서 여성과 남성의 입장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갖는 해답들이 나올 것 입니다. 정답은 과언 무엇일까요? 확언할 수 는 없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존재 사이의 '틈' 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서로를 잘 알고 잘 이해한다고 서스럼없이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서로에 대해 가장 무지한게 바로 남성과 여성이지 않을까 싶네요. 그 만큼 서로의 '틈' 은 물리적으로 벌어진 사이가 크지 않게 느껴지지만 반면에 심리적인 '틈' 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는 그 '틈' 을 메워보고자 하는 노력을 무던히도 경주하고 있지만 정작 그 '틈' 의 진실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죠. 바로 이런 '틈' 에 대해서 제대로 한번 생각해볼 작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멀리 가지말고 그냥 단순하게 남성과 여성의 벌어진 '틈' 을 생각해 보는 절호의 기회를 만나보겠습니다.  


          한마디로 정말 센세이션하면서 (여성독자의 입장에서 이번 작품은 일종의 대리만족감 내지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안 그리고 실현 가능성이 정말 있을 수 있다는 반증을 보여주죠)  쇼킹한 진짜 쇼킹하죠 (그럼 이와 반대로 남성 입장에서는 이번 작품은 그야말로 쇼킹 쇼킹 !!! 그 자체로 다가옵니다)  주제를 다루는 작품을 대면했습니다. 물론 작품을 읽는 내내 두뇌의 좌측과 우측의 기능과 역활을 송두리채 바꿔가면서 읽어야 하는 어려움이 다소 있지만 작품의 플롯만큼은 가히 극찬을 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기막힌 발상의 작품이라고 단언하고 싶네요. 기존의 사고에 단단히 훈련되고 부지불식간에 세뇌된 시스템으로 인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용어와 그 용어가 상징하는 뜻에 대한 이해가 선뜻 가슴 아니 머리속에서부터 정리가 되지 않아 작품의 서두에 친절하게도 요약해 놓은 해설판을 수시로 보면서 재 점검을 해야 하는 불편을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 은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또 하나 더 센세이션한 것은 이 작품이 1996년에 세상에 선을 보였다는 것인데요. 물론 지금은 특별판이라는 타이틀로 재출간 되었지만 20년전에 이런 아이디어를 창조해냈다는 자체가 눈에 먼저 들어옵니다.(아 물론 이렇게 말하면 맨움의 지극히 편협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요. 아닌가 하여튼 남성, 여성 그 개념을 햇갈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소 유머스럽게 (이것도 남성의 편협된 시각에서겠죠) 다가오지만 내러티브가 표방하고 있는 사유는 굉장히 정치 사회 철학적인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남성중심주의(가부장제) 사회문화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남성들은 여성들을 동등한 지위에서 바라보지 않았죠. 그리고 말로는 여권신장운동 운운하면서 마치 동등한 입장에서 배려하는 것처럼 하고 있지만 지금도 지구상의 많은 곳에선 남성들에 의한 여성들의 성차별이 진행중에 있는 것 역시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페호' (중세시대 여성들에게 강제적으로 착용 시켰던 정조대 내지는 브라와 비슷한 개념의 의상) 나 전족처럼 여성을 위한다는 취지에서 강압했던 여러가지 성차별적인 요인들에게 대해서 이갈리아왕국의 입장에서 패러디하고 있는 점들이 눈에 띄는데요.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가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느낌을 받게 될 정도로 다시한번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성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마르크스-엥겔스의 계급투쟁을 빗댄 '스파크스 주의' 패러다임에 대해서도 실랄하게 비판하고 있죠. 성의 해방이 아닌 단순한 남성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을 미덕으로 했던 마치 진보주의적인 패러다임에 대한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성들에겐 지난 오랜세월 동안 행해졌던 여성에 대한 수많은 성차별과 억압 그리고 제도적인 차별들에 대한 역공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 동반자로서의 성에 대한 재인식의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지금의 성정체성과 제도적 스트럭쳐들에 대한 기본 패러다임이 얼마나 허술하고 억지주장인지 새삼 돌이켜 보게 하네요.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계급투쟁' 이라는 모토는 어떠한 시스템속에서도 (가부장제이든 모권제사회이든) 부인할 수 없는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인데요. 이 점은 작품속의 모권제사회에서도 철저하게 성정체성의 권력을 차진한 쪽 (작품속에서는 움, 즉 여성) 위주의 패러다임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 해주고 있다는 점이 왠지 씁쓸한 느낌을 자아내게 합니다. 동성애를 상징하는 '팔루리안' 의 서사 역시 지금과 전혀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거죠. 다만 아쉬운 것은 이 부분의 사유를 좀 더 확장 내지는 변용해서 픽션상이지만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하네요. 물론 이번 작품 전반이 던지는 후폭풍이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왕 뒤집어서 서사할거라면 확 비틀어 버리는것도 낫지 않을까 싶네요.  


           이 작품이 유난히 돋보이는 것은 작품의 내러티브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사유 그리고 이러한 담론들과 스토리를 형성하고 있는 세부적인 요소들이 기가막히게 정반대적 위치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인데요. 마치 이러한 배치들이 들어 맞다는 아니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들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이름, 사고방식, 의상, 식사, 주거형태 나 주거문화 그리고 사회적 구조등 심지어 남녀간의 아니죠 여남간의 성행위와 성적인 매커니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의 역전된 모습을 보게 된다는 거죠. 상당히 혼란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머러스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미시적인 요인들과 거시적인 담론들이 기가막히게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이번 작품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움(지금의 남성)과 멘움(지금의 여성) 자꾸 헷갈리는데요. 완전히 뒤바낀 작품 세계가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신체적인 요소뿐 아니라 의상이나 이름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철저하게 남성과 여성의 역활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작품 세세한 곳까지 치밀하게 설정해 놔서 정말이지 작품을 읽는 동안 자신의 성 정체성마저 혼란스럽게 한다는 점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이거 마냥 웃어야 할지 아니면 두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할지 조차 혼동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성정체성과 더불어 이들이 만들어낸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입니다. 물론 이 작품을 읽은 남성중에 그저 재미있고 흥미롭다는 느낌을 받는 이들도 있을 테고 여성들 중에 통쾌하다 뭐 이런 감정을 가지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이번 작품은 우리들에게 성에 대한 정체성과 이를 구성하는 사회전반의 스트럭쳐 그리고 그가 표방하는 패러다임에 대해서 이제는 정말 심도 깊게 서로 고민하고 대화하는 장을 진심으로 만들어야할 때이지 않나? 그런 생각을 갖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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