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生> 이미 국내 독자들에게 오래전에 소개된 작품으로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공의 인물로 콩쿠르 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콩쿠르상이라는게 같은 작가에겐 두번 수여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더 화재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죠. 어쩌면 작품뿐아니라 그 이면에 밝혀진 작가의 이력등으로 인해 유명새가 더 큰 작품이기도 합니다. <자기 앞의 생> 은 열네살의 모모(모하메드) 라는 어린애와 그를 어린나이때 부터 돌아온 로자 아줌마라는 대모의 이야기를 아주 하드보일드하면서도 나이브하게 담고 있는 작품으로 상당히 슬픈 스토리를 갖고 있는 작품으로 다가 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내러티브 전반을 감싸고 있는 슬픈기조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시크한 느낌을 자아내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사고 그리고 작품 전반이 표방하고 있는 담론은 왠지 희망적인 느낌을 더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작품을 대면하며서 수시로 엇갈리는 감정의 이입을 느끼게 되고 그러한 밑바탕에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번 작품의 특징중 하나가 작품이 풍기는 분위기(정말 슬픈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왠지 슬프게 다가오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분위기) 만큼 등장인물들의 구성면에서도 상당히 유니크한 면을 볼 수 있는데요. 아랍인과 유대인이라는 물과 기름같은 엇박자의 인물을 중심에 앉혀놓고 있죠. 거기에 세상의 모진 풍파를 다 겪은 황혼의 노인과 세상정이라는 때도 묻지않는 열네살의 꼬마,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두 주인공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사유는 나이와 정반대의 개념을 가지고 있어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설정들을 가지고 있는 구도이기도 합니다. 조연으로 출현하고 있는 인물들의 면면도 뭔가 어울리지 않는 면면을 보여주면서 오히려 그런 부자연스러운 인물들의 구성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조화시키는 역활을 수행하고 있기도 합니다. 뭐 좀 크게 앞서나간다면 이러한 부조화나 뒤틀림이라는 것이 우리네 인생의 정확한 표출이라는 듯이요. 


           무엇보다도 이번 작품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율배반적인 감정이입을 가져오는 작품인데요. 왠지 슬퍼야할(정말이지 슬퍼해야 마땅할이라고 해야겠죠) 내러티브가 분명한데 작품을 읽으면서 본인도 모르게 미소짓고 키득거리게 하고 하는 이런 의외의 감정을 불러 오면서 "이거 내 사고나 감정에 살짝 문제가 있는건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인데요. 참 절묘한 앙상블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우리들 삶의 커다란 견지에서 볼때 "生" 이라는 개념이 이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도출하게도 하네요. 여기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작품의 구도자체나 등장인물들의 설정등이 작가가 추구하는 사유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삶의 진수를 느끼게 해준다는 점이 일품으로 다가오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 뭐라고 할까요 어제 죽은이들에게 왠지 죄스러운 마음을 갖게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 삶은 내 생은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고 희망적이다라는 약간 못된 느낌도 들게 하니까요.


           정말 밑바닥 인생(모모의 표현을 빌리자면 '똥'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의 애환을 그린 작품인데요. 프랑스 빈민가의 코딱지만한 아파트(은밀한 집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왠지 우리의 인생살이 공간을 축약해놓은 것 같은 냄새를 풍기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칠층에 그 흔한 엘리베이터도차 없는 곳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고, 그 아이들을 돌보는 여인은 100키로에 가까운 거구에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로자 아줌마라는 여인과 우리의 주인공 모모(모하메트) 돌보는 아이들의 대부분이 창녀들의 아이들로 정말 오갈데 없는 인생 밑바닥을 출생과 더불어 온몸으로 맞이하는 아이들 주로 북아프리카 핏줄을 가지고 있는  그런와중에서도 부득이하게 아이들을 빈민구제소 같은 곳으로 보내는 날 로자 아줌마는 병이 날정도로 아이들을 사랑하기도 했다 자식을 버리는 엄마들이 제일 나쁜 인간이고, 차라리 동물세계의 법이 인간세상의 법보다 낫다고 믿는 아줌마와 그런 아줌마를 사랑하는 모모. 어디 하나 눈씻고 찾아봐도 정말 제대로된 인생이 없을 정도의 출연진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러다보니 대게 이런류의 작품들이 줄것만 같은 잿빛같은 색깔의 처지는 분위기라던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 눈물바다로 만드는 신파조 같은 통상적인 분위기를 독자들은 머리속에 떠올리기 마련인데요. 막상 작품속으로 들어가보면 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죠. 작가의 의도적인 분위기 제거라고는 전혀 찾아볼수 없을 만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입니다. 사실 이 부분이 키포인트라고 볼수있는데요, 작품 전반이 표방하는 행복이라는 키워드와 살짝 거리가 멀 것 같은 인물이나 설정들이 죽음과 생의 이분법적인 뉘양스를 걷어 냈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은 또 다른 느낌과 색깔로 독자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작품이네요. 분명히 내러티브 전반을 흐르고 있는 분위기가 다소 무겁고 가라앉을 수 밖에 없는 구도 이지만 모모라는 주인공을 통해서 바라 보는 세상의 분위기와 색깔은 나도 모르게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한다는 점에서 유니크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마치 백지위에 백지를 켜켜이 쌓아 올리듯이 무의미한 삶과 죽음을 그리는 것 같지만 실상 눈에 보이지 않는 백지위에는 우리들의 생과 죽음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어 상당한 무게감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자기위의 생> 이라는 작품이 왜 꾸준하게 독자들의 뇌리속을 떠나지 않고 읽혀지는 작품인가 하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어떠한 작가의 의도됨을 엿볼 수 없다는 것이죠. 작중에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건 아니란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희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별로 신경쓰지 않고 살아가게 한다" 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듯이 삶, 죽음 그리고 생에 대해서 인위적인 작위감이나 정형화된 사유 내지는 흐름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독자들의 가슴속에 잠시 스쳐지나갈 정도의 임펙트로 다가오기에 이 작품이 오래세월에 걸쳐서도 누구나 공감을 할 수 있는 작품으로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커다란 감흥이나 카타르시스를 원하는 독자들에겐 다소 싱겁고도 밋밋한 느낌으로 다갈올 수 있는 작품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맛이 MSG에 기들려진 미각보다 오래토록 혀안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하죠. 달리 표현한다면 이번 작품만큼 포텐이 크게 묻혀있는 작품도 드물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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