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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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고 論하기 힘든 작품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음 솔직히 괜한 끄적거림으로 인해 불후의 명작에 먹칠을 하는 딴지를 거는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구요). 워낙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고 영어로 쓰여진 소설중에 두 손가락안에 꼽힐 정도로 그 영향력이 대단하기에 더욱 더 어려운 작품이기도 하였고요, 각종 유명 리뷰어들의 찬사가 줄지어 있기에 여기에 토를 단다는 자체가 어찌보면 넌센스가 될 수 도 있기에 조심스러운 작품이다는 생각도 듭니다. 엄청난 후광이 뒤를 받치고 있는 작품들은 그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또한 그 명성에 결부된 독특한 사유가 내포되어 있기에 일반 독자로서의 리뷰는 사실 조심스럽기도 하고 크게 반향을 일으키지 못할 거라는 마음으로 나름의 느낌을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는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전형적인 미국 소설이라고 해야 겠죠. 여기서 전형적인 이라는 의미 자체가 다소 왜곡된 象을 뜻할 수도 있지만 그 동안 다양한 콘텐츠로 비쳐진 '아메리카' 의 이미지를 총칭하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북아메리카에 식민지가 건설되면서 급부상한 미국이라는 국가는 전세계의 하나의 대안 혹은 희망으로 여겨진 사례중에 대표적인 현실입니다. 지금도 '아메리카 드림' 에 대한 아우라는 사라지지 않고 있고 물론 그런 드림이 상실되는 순간 미국의 원동력 자체가 그 빛을 잃겠지만요. 특히나 제3세계에 속한 정치적 자유와 금전적인 기아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 아메리카 드림은 복음과도 같은 유일한 끈을 제공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만큼 세계적으로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단어는 많은 것(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모든 면)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위대한 개츠비> 를 전형적인 미국소설이라고 한 점은 바로 작품속의 등장인물들의 성정이나 행위자체 그리고 사유가 독자들의 뇌리속에 전형적이라는 의미가 그대로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가는 아메리카 드림을 내러티브에 교묘하게 뿌려놓고 있어 실상 독자들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상당히 넓은 분포도를 가지게될 수 밖에 없는 형태를 띠게 마련입니다. 이런면에서 보게되면 <위대한 개츠비> 정말 위대한(?) 아메리카 드림의 본 고장 미국을 다루는 작품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번역가의 소견이나 영향력 있는 리뷰어들의 진단은 하나같이 바로 이 아메리카 드림에 대한 예리한 접근과 필체에 대해서 극찬을 하고 있지만 사실 미국 독자가 아니라면 크게 가슴에 와닿지는 않다는 것에 그 괴리감이 있다는 것이죠(물론 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실상 재즈시대라고 명명된 1920년대 당시 <위대한 개츠비> 가 출간될었을때 미국내 독자층에게도 그다지 큰 매력을 끌지 못했던 작품이었고 훗날 대공황을 거치고 2차대전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세계패권을 손에 쥐게 되면서 부각된 작품중에 하나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으로 보입니다. 솔직히 내러티브 자체적으로만 보더라도 크게 눈에 띄일만한 힘이 없다는 점입니다. 뭐 결말부분에 이르러 개츠비가 독박을 자청하는 부분 역시 반전이라기 보다는 왠만한 독자들이라면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의 일부로 보여지고요, 닉이 모든 사건의 진실을 혼자서 안고 가는 부분 역시 전형적인 미국냄새가 난다는 점외에는 특출나게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이벤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명성이 후대에까지 사그러들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앞에서 언급해듯이 피츠제럴드의 역활(아메리카 드림을 바라보는 사유와 이중적인 인물들 배치시키므로서 은근히 슬쩍 면죄부 비슷한 것을 제시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대를 끌어내는 부분)이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는 생각이 드네요. 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과 더불어 작가의 덕을 많이 본 작품이라는 느낌이 듭니다(굳이 이런 작품들이 고전이라고 하면 뭐 할말은 없지만요). 작품의 내러티브보다 작가가 표방했던 사유가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형국이라고 할까요. 이러면에서 영화로 재작되는 개츠비 역시 어디에 포커스를 두고 있을지 사뭇 기대되는 바입니다.

 

   작품은 화자인 닉 캐러웨이가 세월이 지나서 제이 개츠비를 회상하는 구도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한 관전 포인터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피츠제럴드는 닉의 역활에 상당히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사실 언뜻 보면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닉의 회상록에 가까울 정도로 닉의 시선과 관점에서 개츠비를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많은 역활을 수행하고 있죠. 이러한 구조적 설정이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사유의 진정성을 보여준다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나 비미국 독자들에겐 좀더 의미있는 사유이기도 하지요. 당초 신대륙에 정착하면서 가졌던 순순한 아메리카 드림을 상징하는 닉과 이후 자본주의가 덧칠해져 왜곡된 아메리카 드림을 상징하는 개츠비 이렇게 양측의 아메리카 드림을 동시에 고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피츠제럴드의 식견은 상당히 높게 평가될 만 하는 거죠.(피츠제럴드는 닉과 개츠비를 양 당사자를 통해 자신의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으며 이 두 사람의 등장인물은 그들에게 부여된 역활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죠) 당시 독자층에게 어필되지 못했던 부분을 피츠제럴드는 아마도 예견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작중에 매일밤 개츠비 저택에서의 파티에 불나방처럼 각계인사들이 모여들지만 그들은 개츠비의 성공에 질투를 던지고 있으면서도 그 바운드리안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빗나간 욕망을 보여주며, 결말부분 개츠비를 희생양으로 모든 사건을 급히 덮어버리는 철저한 외면에 씁슬함을 감추지 못하게 하죠. 당시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된 부분아닐까 싶네요. 특히 이번 작품은 초반부에 '도덕적인 차렷 자세' 라는 복선을 깔아두면서 사실 독자들에게 이 작품이 어떻게 흘러갈것인가에 대한 립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차렷 자세' 는 이 작품의 핵심적인 키워드이고 피츠제럴드가 작품속에 담고 싶은 담론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독자들에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아니 솔직한 표현으로 철저히 외면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네요) 훗날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가치관이 자리잡으면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되죠.

 

   <위대한 개츠비> 가 곧 국내에도 개봉된다고 하는데 원작을 먼저 대했던 독자들에겐 상당히 반가운 소식이 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무엇보다 피츠제럴드가 표방했던 위대한 개츠비가 영상으로 어떻게 재 탄생하게 될 까라는 부분이 상당히 관심을 끄는 부분입니다. 개츠비로 분한 디카프리오와 닉의 역활을 할 스파이더맨 토비 맥과이어 두사람의 연기력에 기대가 되네요. 캐스팅자체에서 벌써 반은 먹고 들어갈 정도로 이상적인 조합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미리 듭니다. 디카프리오의 집착과 다소 허영적인 고집, 맥과이어의 바른생활 사나이 뉘양스가 개츠비와 닉을 제데로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또한 '항상 어딘가에 발을 가볍게 두들겨 대거나 참을성 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한다는 개츠비의 다소 불안정한 모습과 '형씨' 라는 호칭, 그리고 개츠비의 저택과 데이지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옷차림등 많은 부분에서 원작과 영화를 비교해보는 것도 또 다른 흥미거리이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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