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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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5년 8월 일본의 항구도시 나카사키에 두번째 원폭이 투화되면서 일본은 질주 없는 기관차의 제동을 걸게되고, 세계는 다시 평화로운 상태로 환원하게 됩니다. 이 전쟁은 특히 한반도의 우리 민족에겐 지금까지도 많은 트라우마를 안겨준 근원이었고 지금도 일제강점기로 인해 발생한 여러가지 뒷처리로 이웃나라와 녹녹치 않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사건(원폭투하)은 엄청난 파장을 가져온 비극적인 현실(특히 일본인들에게는 더할나위가 없겠죠)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를 포함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는 2발의 원자폭탄과 그로 인한 또 다른 피해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밖의 영역으로 남아있기도 하죠. 뭐 솔직한 표현으로는 그네들이 행한 행위를 생각한다면 2발만으로도 속이 시원찬지 않지만요... 그 동안 이러 저러한 여러가지 반일적인 감정이 녹녹치 않는 저에게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의 작품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유중에 하나가 출신배경을 떠나서 편협적이지 않는 작품의 서사와 전혀 일본적인 느낌을 받지 않게했던 필체등이 눈에 들어오면서 이 양반의 작품에 대해서 상다한 매력을 느꼈던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처녀작품인 <창백한 언덕 풍경> 이라는 작품은 사실 많이 망설여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왜 작가로서 첫 발을 딛디게 되면 아무래도 작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솔직한 담론등이 많이 깔리게 마련이고,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소개란에 '나카사키 원폭과 그 후에 대한 ㅇㅇㅇ ' 표현을 보고 이래저래 자신의 뿌리인 일본에 대한 일종의 화해의 제스쳐이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기에, 그리고 혹여 모를 면피성적인 미화가 있으면 어쩌나라는 불편한 심정이 도사리고 있었다고 할까요. 그나마 그 동안 이시구로의 작품을 대하면서 전혀 일본적인 색체나 냄새를 느끼지 못하였기에 더 이 작가의 작품들이 마음에 들어왔는데 이번 작품으로 통해서 그런 감정들이 송두리채 사라지면 어쩌나라는 걱정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최근래 들어 아니 소설 작품을 대한 이후로 처음으로 주저주저했던 작품이었습니다(이러한 선택을 한 자신에게 저주아닌 저주도 내려보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저의 선입관들은 그저 우려의 작은 목소리였고 그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마치 학창시절 긴가민가 했던 시험답안을 확인했을때의 안도의의마음으로 확인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네요. 그리고 한편으로 영향력 있는 리뷰에서 다소 요란스럽게 과장한 것은 아닌가라는 일종의 배신감도 들더라구요. <창백한 언덕 풍경> 은 미리 알려진 것 보다는 약간은 싱거운 느낌을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음 작품 전반에 걸쳐 원폭과 전쟁 이후에 대한 서사들이 거의 주목받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 하네요. 그러니까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전쟁의 상혼을 치유해 나간다는 통속적이고 뻔한 스토리가 없다는 점이 이번 작품의 특징이지 않을까 싶네요. 아니 그저 종전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서사 방식대로 서사 되다보니 이러한 하나의 거대한 이슛거리가 주목받지 못하고 그저 강물이 흘러 가듯이 덤덤하게 흘러가는 듯이 보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서사방식으로 인해 독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수 있다는 생각도 들게 하고요. 뭐 이런거죠 작품을 대면하는 동안 내내 도대체 그 핵심코어를 캐치하기가 만만치 않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 아!~ 라는 느낌이 한꺼번에 밀물처럼 몰려온다는 것이 이 양반의 주 특기이고 그런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 <창백한 언덕 풍경> 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가즈오 특유의 무덤덤함을 정말 제대로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비록 생애 첫 작품이었지만 오히려 뒤늦게 접하게 되면서 그런 생각이 강하게 다가온다고 해야 할까요. 이번 작품으로 그 동안 소개되었던 작품들을 갈무리해 보면 전 개인적으로 無爲的인 그러니까 뭔가 억지로 끼워 맟추는 인위성이 없는 그저 물이 흘러가고 바람에 구름이 흘러가듯 삶의 한쪽을 무덤덤하게 서사하는 방식이 가장 절묘하게 묘사된 작품이지 않을까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후 발표된 그의 작품들을 보게되면 하나 같이 이런 느낌을 받게 하죠. 참 매력적인 작가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원류를 이번 작품에서 제대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나카사키 원폭 이후 강제 해체된 일본제국과 패전국에서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그 얼마나 많은 가치관들이 서로 상충했을지에 대해선 그저 어림짐작으로도 이해할수 있는 상당한 임펙트였을텐데도 가즈오는 그러한 세기나 강도에 대해서 뭐랄까 철저하게 무시해 버린다는 점입니다. 언제 전쟁을 겪었고 심지어 언제 원폭을 맞았냐 하는 식으로 철저하게 외면해버리는 서사로 일관하면서 에츠코(상당히 작가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은 그래서 어쩌면 작가 자신으로도 비쳐질 수 있는 여지가 있죠)와 사치코, 마리코 등 개인들의 극히 사소한 부분으로 격하시켜 버린다는 점입니다. 너무나 충격이 심해서 외면해버릴수 밖에 없는 굳이 기호화된 문자나 언어를 빌려서 말로 표현하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더 전쟁의 상혼을 어필해 버리는 가즈오 특유의 문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번 작품의 주된 코어는 전쟁의 상혼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한 여성의 삶을 조명하고 있지만 독자들로서는 상당히 애매한 설정을 만나게 되고 마치 남의 집 이야기를 듣듯이 별 관심 없이 주목의 이유도 없이 스쳐가는 일회성의 멘트처럼 다가오는 것 같지만 왠지 모를 동일성을 하나씩 맞닥뜨리게 되면서 심연 깊숙한 곳으로부터 안타깝고 애잔한 감정이 솔솔 피어 오르게 하는 작품인 것 같네요. 무엇하나 이슈가 되는 논거나 극적인 반전에 독자들의 뇌리를 강타하는 임팩트한 서사(단 한 곳이에 있긴 하죠. 사츠코가 고양이를 익사 시키는 장면은 상당히 소름끼치지만요 뭐 여타의 작품이라면 그다지 눈에도 띠지 않겠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이러한 장면이 상당히 강한 임팩트로 다가오기도 합니다.전 일종의 과거의 단절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같은 장면은 없는 아주 밋밋한 내러티브이지만 손에서 놓지 못할만큼 끌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등장인물들의 하나같은 왠지 비현실적인 성정들(이 역시 철저한 설정으로 보입니다)이 어쩌면 전쟁의 상혼이라는 트라우마를 에둘러 녹여 놓은것 같다는 느낌도 들게 하고요. 작품 전체적에서 풍기는 뉘양스가 아마도 원폭이후의 삶을 구체적으로 디테일하게 묘사했더라면 오히려 그 감흥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작가는 전쟁의 상혼이 가져다 준 등장인물들의 성정이나 말투, 행동, 시대의 변화상, 도심 거리의 묘사등 놓치기 쉬운 아주 소소한 부분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므로서 작품 전체의 생기를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보여줍니다.

 

   에츠코 자신의 과거 회상으로 전개되는 스토리는 결국 현재의 시점까지 그 끈을 끊을 수 없는(딸 게이코와 과거의 마리코) 연결고리를 갖고 있지만 게이코의 자살이 어쩌면 전쟁의 상혼이라는 딱지를 떼어버리고 특별한 것 하나없는 행복한 추억으로만 남을 수 있다는 화해의 제스처를 보여주기도 하죠. 참 교묘하게 트라우마를 어필하는 작품으로 왜 가즈오 이시구로가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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