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2001년 9월 11일은 미국 전역을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했습니다. 1941년 진주만 습격이후 미국이 외부세력에 의해 공격받은 적은 없었고 특히 미국 본토에서 그런일이 발생할 것이란 상상은 할수조차 없었기에 그 충격을 더 컸던 것이었죠. 물론 이 9.11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를 충격의 도가니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리고 십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미국민들은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는 행동들이 뚜렷하게 남아있죠.(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과의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의 파렴치한 행동을 묵인하는 행태등) 그리고 전 세계는 강요되었던 자발적이던 혹은 연출에 의거해 연기를 하던 9.11사건에 대한 시각이 극명하게 갈리게 되죠. 뭐 아직도 이런 이분법적인 시각은 여전히 진행중에 있고, 엄밀하게 말한다면 미국측(혹은 제1세계 선진산업국을 주연으로 하고 기타 떨거지 조연국들 앙상블로 하는) 시각이 좀더 지배적인 입장이라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미국측 시각으로 인해 이슬람 전반에 대한 시각 자체가 부정적으로 점철되었고 호의적이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대세에 반론을 제기한다면... 뻔한 사실이니 굳이 언급치 않겠습니다. 대체적인 이러한 시각들이 실상은 우리의 눈에 백태를 씌우게 되었고 우리는 이런 백태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습관에 익숙해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죠.

 

   이런 면에서 모신 하미디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는 바로 제대로 말 못한 9.11에 대한 담론 (이슬람을 포함한 제3세계와 일부 지각있는 자들의 시각) 을 풀어놓은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이 품고 있는 폭발력은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 것으로 보여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감히 어디서 세계경찰국가가 정의를 내렸고 집행이 완료된 사건 (미국을 추종하던 추종할수 밖에는 없는 분위기에 들러리를 하던 간에요) 에 대해서 재심을 청구하는 행위를 아무리 곱게 봐줄려고 해도 그리 녹녹치 않는니까요. 또한 그동안 우리 눈을 가려왔던 백태가 벗겨지고 제대로된 시력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기에 절로 눈길이 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우선 작가는 작품의 제목에서부터 약간의 트릭을 설치해놓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자' 라는 뉘양스가 가져오는 의미가 남다르게 표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이슬람 과격분자라는 부정적인 뉘양스가 지배적으로 떠오르지만 막상 내러티브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굉장히 월가적인 스탠다드에 가까운 근원적인 느낌으로 살짝 변질되면서 제목이 가져다 주는 이중성에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죠. 특히 전자의 뉘양스로 받아들인 독자들이라면 내러티브의 밋밋함에 다소 김이 빠지기도 하죠. 하지만 작가는 바로 또 다른 트릭을 설치해서 밋밋하게 흐를수 있는 내러티브에 밑간을 칩니다.


   바로 에리카와 찬게즈의 동서양 남녀 러브스토리를 깔아 놓은 거죠 (참 이부분이 전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서사라고 보여집니다.) 얼핏보면 작품의 성격이 너무 정치적 색깔이 짙다보니 다소 딱딱한 플롯에 에리카와 찬게즈라는 동서양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덧대어서 분위기를 다소 가라 앉혔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전 개인적으로 에리카와 찬게즈의 사랑이야기가 본 작품의 숨겨진 결정적인 부비트랩같은 설정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찬게즈라는 동양적 담론이 에리카라는 서양적 담론에 손을 내밀지만 응답없는 메아리로 돌아오는 과정을 현세계의 정치적 구도에 빗대어 놓은 대단한 서사로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달리 볼 수 있는 내용이지만 왠지 이들의 사랑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처음부터 불행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강한 인상을 풍기는 것이죠. 물론 이러한 스트럭쳐로 인해서 상당히 도발적이고 딱딱한 느낌을 완화하긴 하지만 결국엔 찬게즈(동양적 담론을 대표)에게 고통을 안겨주긴 마찬가지인 것이죠. 작가는 오히려 찬게즈의 9.11사건을 화면을 통해서 보면서 측은지심이 아닌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는 직접화법보다 찬게즈와 에리카의 러브스토리가 내포하고 있는 정치적 의미가 오히려 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가 정치적 담론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순수정치 소설로 보기 힘든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신 하미드의 절제되면서도 유니크한 서사들이 독자들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특유의 섬세한 묘사는 푸근한 향이 느껴질 정도로 살아 숨쉬고 있어 전체적인 모티브 자체를 뒤흔들 정도로 그 경계성을 무너뜨리면서 로맨스 (정치적 담론과 무관한 부더러움이라고 해야할까요) 를 상상케하는 묘한 느낌을 안겨 줍니다. 그래서 정말 독자들의 판단의식을 주저하게 하는거죠. 


   전반적으로 모신 하미디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는 읽는 독자들에 따라 천차만별이 느낌을 가져올 작품으로 보입니다.(저 개인적으로는 속이 다 시원할 정도로 제대로 까발렸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지네요) 좀더 우측의 프리즘을 가진 독자층에게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불쾌한 느낌을 가져올 것이고 이와 반대측면에 있는 독자들에게는 심년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뚫리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것이 때문이죠. 아마도 이래서 더 주목받는 작품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뭐랄까 추리스릴러 장르와 전혀 무관하지만 작품이 끝날때 까지 왠지 마음이 불안하고 들뜨게 한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불안증세도 양측의 시각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것으로 보입니다. 한쪽은 이 놈의 찬게즈가 결국 미국 정보요원에게 제거될 것 같은데 언제쯤일까라는 그리고 다른 한측은 찬게즈의 넋두리를 들어주고 있는 미국인이 그저 여행객이길 바라는 심정, 결국 작품이 엔딩을 고할때 까지도 독자들의 불안증세를 제거해 주지 않는 스릴러 기법이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설정이 지금 현재 동서양의 불안한 정세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한층 더 작품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것이기도 하죠. 작가는 물론 어느측의 시각이 옳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강요하고 있지 않죠. 그저 이렇게 달리 볼 수 있는 시각도 있다는 점을 보다 직접화법으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직접화법이 상호의 상처를 빨리 치유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점도 보여주고 있고요.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는 작품이지만 번역가의 표현처럼 미니멀리즘의 표본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네요. 보여줄 것은 다 보여주면서도 정제된 서사 하나 하나가 정곡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이번 작품을 계기로 모신 하미디의 작품세계가 왠지 국내 독자들에게도 많은 반향을 가져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강하데 들어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오르한 파묵의 작품들이 동서양이 충돌하는 담론을 소프트하게 융화시키고 있는 서사의 대표라면 모신 하미드의 작품은 동서양의 충돌자체를 액면 그대로 보여주는 서사라는 점에서 묘한 대비와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파묵은 어린아이 머리를 쓰다듬듯이 부드럽게, 하미드는 강한 악력으로 악수하는 듯한 서사들이 상당히 대조적이면서도 결국 파토스를 끌어낸다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죠. 아마도 오르한 파묵에 뒤이어 동서양문화권의 화합을 대변하는 작가로 자리 매김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족이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책의 뒤편에 표기된 '시카고 트리뷴' 등의 유명한 서평들이 왠지 의아한 느낌을 줍니다. 그네들의 가식인지 아니면 이런 도발적인 근본주의자를 보란듯이 품에 안을수 있다는식의 포용력인지 아리송하지만 제 눈에는 왠지 가식으로만 보여진다는 것이죠. 아무래도 저부터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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